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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41화 (41/189)

혈술 (3)

'아, 씨발······.'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사방의 뱀파이어들을 둘러봤다.

부동 장막은 훌륭하게도 몰아치는 공격을 모두 막아주었다.

게임에서도 9성급 스킬이었던 이 절대적인 방어기가 고작 이 정도에 뚫릴 리가 없다.

근데 그게 끝이었다.

내가 이 상황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만히 서서 방어하는 것밖에 없고, 방금처럼 허세나 부리며 입 좀 터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좀 먹히긴 했는지 뱀파이어들도 굳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제 어쩌냐.'

이대로 본격적인 싸움이 이어지면 결국 지는 쪽은 우리다.

나야 내 몸만 지키기도 바쁘니 즉살은 사용하기도 힘들고, 저쪽은 아셸만 한 강자가 있는 데다가 머릿수도 훨씬 많았다.

그리고 이곳은 놈들의 터전. 저쪽은 전력을 계속해서 보충하는 게 가능하다.

아셸이 어떻게 전사장을 쓰러뜨린다고 하더라도 그냥 애초에 답이 없는 싸움이었다.

빌어먹을, 역시 이 숲에 오는 건 좀 더 신중히 결정했어야 됐나?

"······저."

옆에서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기에 시선을 돌렸다.

내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된 아셸이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차 하며 어깨를 놔주었다. 신경이 팔려서 깜빡 잊었다.

아셸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폐허가 된 반경을 둘러봤다.

부동 장막은 오크킹 때 잠깐 사용했던 것 빼고 한 번도 그녀의 앞에서 펼쳤던 적이 없긴 했다.

나는 다시 전사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더 해볼 건가?"

할 수 있는 게 입 놀리는 것뿐이니 그걸로 어떻게는 상황을 타개해보는 수밖에 없다.

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 눈에는 좀 전과 달리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다.

"뻔뻔하기 이전에 너희는 정말로 어리석구나."

"······."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또 어느 정도의 힘의 격차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공격인가. 내가 너희에게 아무런 적의가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다. 아니면 오늘 너희 부족은 모두 멸망했을 것이니."

"······인간, 넌 대체 누구냐?"

내 말에 놈이 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의도한 대화의 흐름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대답하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멀리서부터 가공할 속도로 가까워지는 기척이 감각에 걸렸다.

슈와아아악!

늘어지는 자취를 그리며 나무들을 헤치고 날아온 핏빛 구체.

뱀파이어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 구체를 바라봤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앞쪽에 멈춰선 구체가 사람의 형태로 빚어지더니, 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구체에 달려있던 로브를 걸치고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Lv. 67】

"······누님!"

전사장이 기겁하듯 소리쳤다.

그 외침에 나는 그녀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족장?'

엘로드 숲 부족의 족장인 아클리나.

방금 그건 육신을 피 자체로 바꾸는 그녀의 고유한 혈술이었다.

전사장에 이어서 이제 족장까지 튀어나왔네.

"너무 가깝습니다, 누님! 위험한 인간이니 어서 뒤로 물러나십시오!"

그녀가 폐허가 된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린 동족들을 구해서 온 인간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보거라, 칼데르번."

그녀의 서늘한 목소리에 전사장은 움찔한 기색이었다.

"나한테 보고도 올리지 말라 하고, 전사들까지 이렇게나 대동하고 나서서 이들을 공격한 것이냐?"

전사장과 다른 뱀파이어들은 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족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족장인 아클리나다."

"······."

"부족을 대표해서 부족원들의 만행엔 진심으로 사과하겠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

나는 일단 속으로 안도했다.

그녀의 태도를 보니 더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도 다른 종족들에 대한 적의와 경계심이 특히 강했던 전사장과 달리, 족장은 온건 부족의 머리답게 비교적 유한 성격이었었다.

그래도 다짜고짜 공격부터 한 건 괘씸했기에 물었다.

"이 숲에 찾아온 게 내가 아닌 다른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거다. 그때는 싸늘한 주검에 대고서 지금처럼 사과라도 할 생각이었나?"

족장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알다시피 세간에서 뱀파이어들에 대한 인식은 무척이나 좋지 않다. 우리가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장소는 이곳뿐이고, 그렇기에 다른 종족들이 부족의 터전에 발을 들이는 것에 대해서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다. 우리 쪽의 사정도 조금은 이해해줬으면 한다."

나는 혀만 한 번 차고서 뭐라 더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는데 이 숲에 찾아온 목적은 꺼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일단······.

"나는 칼데릭의 7군주다."

원래라면 딱히 말할 생각도 없었다. 경계심만 더 살 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상황이 이러니, 경계를 사더라도 또 충돌한 일이 없도록 보험을 들어놔야겠다 싶었다.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인 '혈정'에 관한 것도 그들에게 있어서 부족의 운명과 직결된 굉장히 예민한 문제였으니까.

내 말에 족장과 전사장을 포함해서 뱀파이어들은 일제히 흠칫 놀란 기색이었다.

아무리 세간과 동떨어져서 사는 이들이라도 칼데릭에서 군주라는 존재가 지니는 위상과, 그 강함을 모를 수는 없다.

"군······ 주?"

특히나 계속 침착했던 족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게 눈에 띄었다.

그녀가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알기로 7군주는 인간이 아니라 수인족일 텐데."

그녀가 말하는 건 전 7군주였다.

그가 죽어서 7군주좌가 비었고 그걸 최근에 내가 차지했다는 사실까지도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 숲에서는 세간의 정보에 거의 어두울 테니까.

"전 7군주는 죽었다. 그리고 내가 새로운 군주가 되었지."

내 말에 족장은 말없이 침음을 흘릴 뿐이었다.

다짜고짜 군주가 숲에 찾아왔으니 그녀로서는 지금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나는 바로 본제로 들어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보겠나?"

"······이야기?"

"이 숲에 찾아온 건 아까 전의 뱀파이어 자매를 데려다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용건도 있다. 너희 부족이 가지고 있는 혈정에 관한 것이다."

뱀파이어들이 방금 전보다 더 경악하며 나를 쳐다봤다.

난데없이 숲에 찾아온 외부인의 입에서 혈정이란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을 테니까.

"당신이······ 대체 혈정에 대한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지?"

정신을 차린 족장이 이제는 적의가 담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혈정.

그것은 이들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 부족이 현재 품고 있는 가장 큰 골칫덩이였다.

배경이 자세하게 전부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은 기억하고 있었다.

'선조 가스칼리드.'

지금으로부터 먼 과거, 아직 지금으 부족이 엘로드 숲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기도 전일 때.

이들 부족들의 선조 중에는 아주 강력한 뱀파이어가 하나 있었다.

그는 온건 부족이 된 지금의 자손들과는 다르게 사악하고 흉포한 뱀파이어였다. 6군주 폭왕처럼.

'한 이름 모를 대마법사한테 패배해 치명상을 입고, 결국 생명이 다해서 죽었다고 했지.'

뱀파이어라고 죽음이 다른 생물들과 다르지는 않다. 뼈와 살이 썩고,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혈정이었다.

'가스칼리드의 영혼과 혈술이 잠들어있는 돌.'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장로 뱀파이어 하나가 게임에서 뭐라뭐라 설명했던 것 같기는 한데, 잘 기억은 안 난다. 어차피 설정일 뿐이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가스칼리드의 분신과도 같은 그 사악한 돌을 후손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는 것이었다.

가스칼리드가 부활하는 날이 부족이 멸망하는 날이라는 유언과 함께, 그들은 대대로 혈정의 기운을 잠재우기 위한 의식을 지금까지 아주 오랜 세대에 걸쳐 치뤄왔다.

그러나 문제는 의식의 여파였다.

가스칼리드의 피를 이어받은 족장의 혈육들이 자신의 피를 바쳐 혈정의 기운을 진정시키는 의식.

그건 단순히 피를 바칠 뿐이 아니라 의식에 나선 이의 생명력과 정신을 갉아먹는 의식이다.

한마디로 엘로드 숲의 족장들은 의식을 행하면 행할수록 단명할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봉인을 하고 있는 것이 겨우였기에 어디로 옮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냥 남겨두고 숲을 떠나면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짓이고.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엘로드 숲의 부족들은 혈정이라는 흉물을 떠안고 족장들의 목숨을 대대로 짜내왔다.

그리고 바로 그 혈정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내가 엘로드 숲에 찾아온 이유였다.

정확히는 해결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능력인 뱀파이어의 '혈술'이 목적이었다.

"나는 너희의 선조인 가스칼리드를 알고 있다."

이제 서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됐으니 제대로 입을 털어볼 때였다.

날 노려보고 있던 족장이 그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뭐라고······?"

"혈정, 너희의 선조가 내린 저주와도 같은 그 물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머릿속에 구상해뒀던 스토리를 술술 풀었다.

"당시의 족장이었던 할리온이 가스칼리드의 혈정을 직접 봉인했었지. 알고 있나?"

"······."

"족장이라면 선대의 기록들이 남아있을 테니 물론 알고 있겠지. 나는 그와 연이 있었고, 그가 내게 맡겼던 부탁이 있다.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혈정을 완전히 소멸시켜달라는 부탁이었지. 미래의 후손들이 더 고통받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이야."

"자, 잠깐."

내 말에 점점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던 그녀가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들의 선조가 살아있을 때의 몇백 년 전의 인물이란 말인가?"

"그렇다."

그에 아셸도 조금 놀란 기색으로 날 돌아봤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진짜라고 해도 딱히 말이 안 될 건 없었다.

군주들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세계에서 경지를 넘은 초인들에게 육신의 수명이란 기본으로 몇백 년은 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조금 엄숙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부탁을 지키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 혈정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굉장히 뜬금없겠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아니면 어찌 외부인이 혈정과 자신들의 선조에 대해 알고 있겠는가?

나는 족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뇌에 빠진 듯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응?

"이건 저희 부족의 문제입니다. 몇 마디 말만 듣고 외부인에게 혈정의 문제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말이 정말 모두 사실이라면 죄송하지만, 그래도 저희를 배려한다면 돌아가주십시오."

돌아온 건 단호한 거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칼같이 거절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했다.

"누, 누님.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

오히려 나에 대해 더 적의를 품고 있던 전사장이 당황하며 그녀를 말렸다.

"그럼 안녕히."

그럼에도 그녀는 내게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는 단호히 몸을 돌렸다.

나는 조금 허망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껏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포기하는 건 절대로 안 되지.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들어가야겠군."

내 말에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사실 너희들의 허락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건 나와 너희의 선조가 한 맹약이고, 그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제가 방금 괜찮다고 말씀드렸음에도 말입니까?"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뻔뻔하게 말했다.

"그래. 그러니 더 충돌을 빚기 싫다면 나를 혈정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죽은 벗의 후손들의 피를 보기는 싫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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