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40화 (40/189)

혈술 (2)

내 물음에 그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어떻게······? 이 숲에 뱀파이어가 살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인간?"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이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나? 너희 부족은 이 숲에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다고 들었다. 누구도 아는 이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그것이 오만이지."

"······."

그는 말없이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날 노려볼 뿐이었다.

옆에서는 루디카 자매가 안절부절 못한 기색으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른 악의는 없다. 이 숲에 찾아온 이유는 하나뿐이다. 여기 보이는 뱀파이어들, 부족과 고향을 잃은 이 둘에게 새롭게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다."

"······뭐?"

"이들은 칼데릭의 북쪽 산맥에서 살던 뱀파이어들이다. 그곳에서 살던 부족들끼리 다툼이 나서 부족은 대부분 죽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도망쳤다고 하더군."

그의 시선이 루디카 자매에게로 향했다.

이미 엘로드 숲의 부족에도 그런 뱀파이어들이 몇몇 있을 테니 내 설명으로 사정은 바로 이해했을 것이었다.

"그러니 관용을 베풀어 이들을 너희 부족의 품으로 받아들여줄 수는 없겠나? 용건은 그것뿐이다."

그가 말없이 자매와 나를 번갈아 보고는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저 어린 뱀파이어들의 사정은 둘째치고, 왜 인간인 네가 저들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이냐?"

"노예 사냥꾼들에게 붙잡혔던 걸 내가 구해줬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 나는 이 숲에 뱀파이어 부족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때 또 다른 기척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나타났던 방향에서 새롭게 나타난 뱀파이어들이 가지의 양옆에 착지했다.

그리고 우리를 발견하고는 놀란 기색을 띠었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하고 뱀파이어? 이게 무슨 상황이냐, 플로크?"

나와 대화를 한 뱀파이어의 이름이 플로크였던 모양.

그가 동료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뱀파이어들이 우리를 힐끔거리며 설명을 모두 듣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잠시 어떻게 해야 되나 소근거리며 의논했다. 하지만 초감각에 내용은 다 들렸다.

"일단은 보고부터······."

"그래, 내가 다녀올 테니 너희 둘이서 지켜보고 있어줘."

이내 결론을 내린 그들이 내게 말했다.

"거기서 어떤 행동도 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 인간. 네게 정말 다른 의도가 없고 그 어린 뱀파이어들을 돕기 위해서 온 것뿐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래."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루디카 자매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해 더 직위가 높은 뱀파이어를 데려오려는 모양이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 것이다.

동료 뱀파이어들이 다시 떠나가고 한 명만 남아서 우리를 경계하듯 지켜봤다.

그렇게 말없이 가만히 대치한 채 다른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

한 뱀파이어 여인이 가만히 서서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그녀는 공간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 위에 있었는데, 바위의 한가운데에 난 흠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붉은 돌덩이 하나가 검은 사슬에 감긴 채 박혀있었다.

바깥의 빛 하나 들지 않은 이 지하 공간을 홀로 요사스런 핏빛으로 밝히고 있는 불길한 돌.

바위 아래에는 그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는 다른 뱀파이어들이 있었다.

"······."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뜬 여인이 붉은 돌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이 닿자 돌은 더욱 강렬한 핏빛을 뿜어냈다.

돌에서 뿜어져나오는 불길한 기운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뿐인 뱀파이어들조차도 몸을 떨게 만드는 그 기운을, 여인은 홀로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이어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피가 돌로 천천히 흡수되었다.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여인의 표정이 그제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건 단지 돌에 흡수되고 있는 피 때문이 아니었다.

'크하하하하하하······!'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기괴하고도 공포스러운 웃음.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그 압도적인 정신파는 지금까지 수십 번을 겪었어도 도저히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인은 무너져내릴 것 같은 의식을 가까스로 유지하며 끝을 기다렸다.

이내 돌에서 뿜어져나오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 돌은 좀 전보다는 조금이나마 붉은 빛이 약해진 것처럼 보였다.

"······하아."

무사히 의식을 끝낸 여인이 비틀비틀 바위에 난 계단을 내려왔다.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뱀파이어들이 다급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한 사내가 나서서 그녀를 부축했다.

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마치 자신이 의식을 치르듯 덩달아 고통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이였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뿐히 그의 팔을 치웠다.

"괜찮다. 늘 하던 일에 요란 떨지 말거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직 손에 떨림이 멎지 않은 그녀를 보며, 사내는 더욱 심란해진 얼굴이 되었다.

혈정의 기운을 억누르는 의식.

그것은 족장들이 대대로 물려받아온 의무이며, 부족의 평화를 위해 반드시 다해야 하는 책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의식이 진행될수록 수명이 깎여나가는 혈육을 보면서도 사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내는 시선을 돌려 바위 위에 박힌 돌을 다시 노려봤다.

대체 부족은 언제까지 저 빌어먹을 것을 떠안고 형제들의 생명을 낭비해야 한다는 말인가? 대체 언제까지······.

"······어서 돌아가서 쉬십시오, 누님. 족장님을 모시거라."

지하 공간에서 나와 여인은 다른 뱀파이어들과 함께 돌아갔다.

사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한 뱀파이어가 이쪽을 향해서 빠르게 달려왔다. 숲을 주기적으로 정찰하는 임무를 맡은 전사였다.

"전사장님."

사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

이어진 보고를 들은 사내가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이 어린 뱀파이어들을 데리고 왔다고? 우리 부족의 존재는 어찌 알고?"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보고부터 서둘러서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인간 쪽의 머릿수는?"

"둘뿐입니다."

사내가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힐끗 쳐다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전사들을 대동하고 가겠다. 일단 족장님께는 보고를 올리지 말아라."

***

대충 몇십 분을 기다렸을까.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수많은 기척들이 느껴졌다.

수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너무 많았기에 나는 좀 당황했다.

'······뭐 이리 많이 몰려와?'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뱀파이어들이 우리가 서있는 곳을 포위하듯 사방의 나무 위에 올라섰다.

그 인원이 가볍게 수십은 됐다. 게다가 레벨도 전부 60이 넘는 정예들이었다.

뭔 전투라도 벌이러 온 모양새에 아셸의 표정도 굳고, 루디카 자매도 겁에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정말 인간이 발을 들였군."

그중 한 뱀파이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이들의 대장 격인 인물이라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복장도 그렇고, 머리 위의 레벨부터가 그러했으니까.

【Lv. 81】

······무려 아셸과 동등한 레벨의 강자.

나는 레벨을 확인하고서 곧바로 그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 부족, 그중에 이 정도 레벨이 되는 강자는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전사장 칼데르번.'

족장의 친동생이자 엘로드 숲 부족 제일의 전사.

내 기억으로 5년 뒤 그의 레벨은 83으로 지금보다 더 높았던 것 같다.

갑자기 전사장까지 튀어나올 줄은 조금 예상 못했는데.

"인간,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라."

나와 가만히 시선을 교환하고 있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 숲에 있는 우리 부족의 존재를 알았지?"

아까야 적당히 대답했지만 확실한 답변을 얻으려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건 그들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긴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세간의 눈을 피해 숲에서 얌전히 살아오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간이 찾아온 상황이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오히려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나."

"······뭐?"

"다른 이들의 발길이 닿지는 않지만 이곳은 엄연히 칼데릭의 영역권이다. 군주들의 눈이 있고 수많은 정보 조직들이 있지. 너희는 이 숲에서 대략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자리를 잡고 살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 정말 진심으로 누구도 너희의 존재를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만이다."

실제로도 대군주와 몇몇 군주들은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는 거지.

그리고 이들이 엘로드 숲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온 세월은 이미 2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 부분은 일부로 틀리게 말했다.

너무 자세히 알고 있으면 경계가 강해질 테니 전부 다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다고 여기게 하기 위해서였다.

옆에서 루비카가 의아한 기색으로 날 보는 게 느껴졌다.

왜냐면 그녀에게 이들에 대해 설명했을 때는 이 숲의 부족 출신의 뱀파이어와 연이 있다고 말했었으니까.

왜 그걸 말하지 않나 싶겠지만, 당연히 거짓말이니까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들은 평생을 이 숲에서만 살다가 죽는데 어떻게 연이 닿을 수 있겠나.

아무튼 대답 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던 전사장은 어느 정도 납득한 기색이었다. 그가 주제를 바꿨다.

"노예로 붙잡혔던 뱀파이어들을 구해서 우리 부족에게 데려다주기 위해 온 것이라 했지. 그 아이들인가?"

"그렇다."

그때 눈치를 보고 있던 루비카가 나서서 말했다.

"······저희는 칼데릭의 북쪽에 있는 산맥에서 살던 뱀파이어예요! 그리고 이분들은 정말로 순수한 선의로 저희를 구해주셔서 이곳까지 데리고 와주신 거고요. 그러니까······."

분위기가 험악하니 날 변호라도 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 곳을 잃은 동족이라면, 그것도 어린아이들이라면 얼마든지 부족의 품에 안을 수 있다."

"······."

"하지만 인간들은 아니야. 너희는 결코 마을에 들일 수 없다. 그러니 일단 그 아이들부터 이쪽으로 보내라."

그 말에 그녀들은 불안한 눈으로 날 돌아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괜찮으니 가거라."

그렇게 그녀들은 머뭇머뭇 뱀파이어들이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전사장이 한 뱀파이어에게 눈짓을 했다.

눈짓을 받은 그녀가 자매를 덥썩 품에 안아들고 가지를 타며 숲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나는 전사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본 목적을 꺼낼 시간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

나는 말을 하다가 말았다.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주위에 우리를 포위하듯 선 뱀파이어들에게서 느껴지는 적의가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콰아앙!

갑작스럽게 정면에서 날아든 공격을 아셸이 나서서 대신 막았다.

피로 이루어진 가시가 그녀의 검에 산산조각 박살났다.

그녀가 인상을 사납게 일그러뜨리고 공격을 날린 전사장을 노려봤다.

나도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뭘 하자는 거지?"

그가 담담한 투로 손을 거두며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너희는 살아서 숲을 나가게 둘 수 없다."

"······내가 너희 부족의 존재를 알고 있어서인가? 나뿐만 아는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아니, 그게 아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동족을 구해준 것에는 깊이 감사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숲에 들어온 외부자를 지금껏 살려둔 적이 없어. 그것이 긴 세월 동안 부족이 터전과 평화를 지켜온 방식이고, 예외는 없다."

주위를 둘러싼 뱀파이어들이 곧바로 전투 태세를 취했다.

그들의 몸에서부터 흘러나온 피가 허공에 뭉쳐지며 형태를 빚어냈다. 누군가는 거대하게, 누군가는 날카롭게.

"그러니 이곳에서 죽어라, 인간."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이 개 같은 흡혈귀 새끼들이······.'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아무리 그래도 동족까지 구해서 왔는데 이렇게 죽이려 들 줄은 몰랐는데.

곧 우리가 서있는 자리로 사방에서 혈류가 몰아칠 듯했다.

나는 옆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아셸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엇······."

"내게 가까이 붙어라."

그리고 곧바로 부동 장막을 펼쳤다.

동시에 사방에서 공격들이 쏟아졌다.

***

쉬지 않고 몰아치는 혈류가 인간들이 서있는 자리를 집중포화했다.

다른 전사들이 공격을 퍼붓는 와중에 전사장 칼데르번도 전력을 다한 공격을 준비했다. 침입자에게 방심 따윈 없었다.

스으으.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허공에 뭉쳐지더니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혈술이었다. 이 극독성을 띈 피에 맞으면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흔적도 없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다.

거대한 가시의 형태로 빚어진 자색의 혈액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며 인간들이 서있는 자리를 휩쓸었다.

콰아아아앙!

혈류가 휩쓴 자리가 그대로 소멸하여 폐허가 되었다.

정예 전사들과 함께 퍼부은 합공을 피하지도 않고 전부 고스란히 직격당했다.

칼데르번은 이걸로 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혈무와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광경에 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

인간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멀쩡한 채로 서있었다. 심지어 옷가지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서.

그 상식을 벗어난 광경에 전사장과 다른 전사들은 충격에 빠진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인간 남자가 유유히 주위를 둘러봤다.

"이게 끝인가?"

그가 더없이 오만하고 무심한 목소리로 읆조리듯 말했다.

"형편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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