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술 (1)
엘로드 숲은 칼데릭의 북서부에 위치한 광활한 숲이다.
일단 칼데릭의 영역이긴 하지만, 이 거대한 판타지 대륙에는 당연하게도 문명이 꽃핀 곳보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간직한 장소가 훨씬 많다.
칼데릭만 해도 대군주령과 나머지 아홉 군주령에 크고 작은 수많은 도시들이 있다. 그러나 그 외곽은 그냥 버려둔 거나 마찬가지인 무주공산의 땅이었다.
'아, 더럽게 흔들리네.'
그리고 그 말은 즉슨, 엘로드 숲으로 향하는 길은 관도와 다르게 조금도 개간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평소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무표정을 유지한 채 반대편 자리를 바라봤다.
아셸과 함께 앉아있는 루디카 자매는 서로한테 기대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도미호크 시에서부터 엘로드 숲으로 향하기 시작한 지도 며칠이 흘렀다.
언제나와 다를 것 없는 여정이었지만 다른 게 있다면 뱀파이어 둘이 동행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나는 잠에 든 두 자매의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루비카는 자기가 언니라고 평소에도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럴 때 보면 그냥 나란히 어린애였다.
옆에 앉은 아셸도 어쩐지 묘한 눈길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멋쩍은 듯 시선을 돌렸다.
왠지 자매의 모습을 보며 죽은 동생을 떠올린 것 같았다.
그때 아셸이 입을 우물거리더니 말했다.
"저······ 궁금한 걸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
나는 의외라는 눈빛을 지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먼저 나한테 뭘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얼마든지."
"군······ 아니, 론 님께선 지금까지 유적 같은 장소들을 찾아다니시지 않았습니까."
아셸이 앞말을 더듬고서 질문했다.
여정 중에는 군주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라 했기에 아셸이나 바로스나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셸은 먼저 나를 부를 일이 거의 없었기에 아직도 익숙치 않은지 종종 실수를 했다.
근데, 그나저나 유적은 갑자기 왜?
"다름이 아니라, 무엇을 목적으로 그런 일을 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아······ 그건가.
'얘도 그걸 이제야 물어보네.'
나야 신비들을 찾고 흡수하면서 아주 알찬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아셸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보지를 못했으니 대체 내가 뭘 하고 다니는 건지 궁금해하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그녀가 지금 호위로 따라다니는 이유는 전 대륙에 이름을 알리게 해주겠다는 내 말 때문이 아닌가.
한데 군주다운 일은 뭐 하나도 안 하고 이러고 있으니 어쩌면 지금 마음속으로는 답답해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앞으로 많은 일들을 할 거라느니, 일단 그때는 거창하게 말하긴 했었는데······.'
근데 뭐 그렇다고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한 건 아니었다.
이 여정을 마치고 군주성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말이다.
특히나 마족의 침공, 세인테아의 용사, 성검 계승······ 이 라사 세계의 메인 스토리에 대한 문제는 현재의 내 포지션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아직 감도 안 잡힌다.
지금 당장 뭘 계획하기엔 그쪽은 너무 스케일이 컸으니까.
'어차피 다음 군주 회의가 오면 대군주가 뭐라도 일을 맡기긴 할 테고.'
일단 칼데릭 내의 신비들부터 전부 찾은 다음에 상황을 봐서 생각해야 할 일이다.
아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때까지만 좀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찾고 있는 것이 있다. 궁금하겠지만 그게 뭔지는 말해줄 수 없어."
"······."
"염려하지 마라. 너와 했던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
"······예?"
아셸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기색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궁금해서 여쭤본 것이었습니다. 론 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의심한 적은 없습니다."
"······."
너무 또 그렇게 믿으니 양심에 찔리네.
나는 슬쩍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즈음,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마차를 멈춰세웠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잠들어있던 루디카 자매도 어느새 잠에서 깼다.
메뉴는 평소처럼 고기와 수프와 빵.
바로스가 빠르게 식사를 완성하고 적당한 곳에 둘러앉아서 먹고 있는데, 루디카가 수프를 떠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슬쩍슬쩍 나와 루비카의 눈치를 봤다.
"왜 그래, 루디카. 피가 먹고 싶어?"
바로 동생의 상태를 눈치챈 루비카가 자기 팔을 걷었다.
그러나 루디카는 머뭇거리며 내가 앉아있는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 이리 와라."
그에 루디카가 한 번 더 언니를 쳐다보고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익숙한 듯 내 팔뚝을 앙 물고 피를 빨아먹는 모습에 루비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루, 루디카?"
루비카를 일행에 낀 뒤로는 처음으로 내 피를 먹는 루디카였다. 그녀에게 있어선 당황스러운 광경일 법도 했다.
지금까지는 언니의 눈치를 보느라 참고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뭐 하는 거야, 루디카. 이리 와서 언니 피를 먹어. 은인께 실례잖아."
그러나 루디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속 내 피를 먹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루비카는 충격받은 얼굴이 됐다. 마치 저번의 바로스 같은 모양새였다.
"너, 너. 맨날 언니 피가 제일 좋다고 그랬으면서······."
······왜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지?
울상이 되어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난 뻘쭘해져서 물었다.
"너는 피를 먹지 않아도 괜찮나?"
루디카보다야 나이가 많지만 루비카 역시 아직 완전한 성체 뱀파이어는 아니었다. 흡혈 본능이 날뛰지는 않나 싶었다.
그에 루비카가 날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제가 흠칫 놀라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 괜찮아요. 다 큰 뱀파이어니까 참을 수 있어요."
별로 그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도 자매 둘을 양팔에 나란히 붙이고 채혈하고 싶진 않았기에 굳이 더 묻지는 않았다.
그때 바로스가 슬쩍 나서서 루비카에게 말했다.
"이봐, 뱀파이어. 원한다면 내 피를······."
"싫어요. 맛 없는 냄새 나요."
이전에 루디카에게 들었던 것과 똑같은 반응에 바로스는 다시 조금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뱀파이어한테 엘프의 피는 영 아닌 모양이다.
***
그 뒤로도 여정은 별 탈 없이 순조로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드디어 엘로드 숲에 도착했다.
나와 다른 이들은 잠시 가만히 서서 숲의 초입을 둘러봤다.
평범한 숲보다도 나무들이 훨씬 더 큼직했기에 제대로 분위기가 나는 숲이었다.
이곳 엘로드 숲은 본래 세간에서는 부르는 이름이 없는, 그냥 거대한 숲이다.
대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산맥과 숲에 일일이 다 이름이 붙어있지는 않으니까.
단지 여기에 사는 뱀파이어들이 숲을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 것뿐이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마차를 지켜야 하는 바로스만 제외하고 우리는 이내 숲의 안쪽으로 출발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네.'
숲이 무척이나 크기에 뱀파이어들을 찾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못 찾을 거라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일단 무작정 깊은 곳으로 계속해서 이동하면 어떻게든 결국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리고 길을 잃을 걸 생각해 도미호크에서 비싼 나침반도 하나 구했었다.
나침반이라기보다는 한 쌍으로 구성되어 서로의 위치를 알려주는 물건이었는데, 마법 아이템은 아니고 아마 뭐 자석과 비슷한 성질을 지닌 물질로 만들어진 물건인 듯했다. 여긴 판타지 세계니까.
어쨌든 하나는 바로스에게 있으니 다시 돌아가는 데에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좀 으스스한 숲이네요."
숲길을 걷는 중 루비카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나무들이 워낙에 커서 해가 가려진 탓에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숲이기는 했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뱀파이어는 햇빛을 싫어하는 편인가?"
보통 그렇겠지만 라사 세계관 내의 뱀파이어는 그런 것과 관련된 정보가 정확하게 나온 적이 없었다.
낮에도 태양 아래서 멀쩡히 잘 다니기는 하지만 혹시 좀 싫어하는 성향이 있나 싶었다.
루비카가 날 의아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진 않은데요. 오히려 저는 이렇게 어두운 게 더 싫어요."
그렇군. 궁금증 하나를 해결했다.
숲을 돌아다니며 뱀파이어를 찾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이기에 식량도 넉넉하게 챙겼다.
하지만 아껴둬서 나쁠 건 없기에 사냥을 통해 식량을 수급하기도 했다. 물론 사냥은 아셸의 몫이었다.
그리고 물론 평범한 짐승들뿐만 아니라 몬스터들도 출현했다.
쿠웅.
아셸의 검에 거대한 멧돼지가 쓰러져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온몸에 자잘한 가시들이 난 게 상당히 징그럽게 생겨먹은 놈이었다.
이 숲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들 중에는 확실히 내가 모르는 놈들도 있었다.
이 엘로드 숲 자체가 게임에서는 거의 돌아다닌 적이 없는 낯선 필드였기 때문이다. 관련 퀘스트에서 뱀파이어들을 만날 때나 잠깐 스치듯 지나갔지.
"우와아······."
순식간에 몬스터를 처치하고 아셸이 검을 회수하는 모습을 보며 루디카가 눈을 빛냈다.
그녀는 아셸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경매장에서 대학살을 봤던 루비카는 어딘가 아셸을 조금 무서워하는 기색이었지만.
"어떻게 해야 그렇게 강해질 수 있어요?"
루디카의 물음에 아셸이 조금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단련을 하면 된다."
"단련을 어떻게 하는 건데요?"
"······매일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어쨌든 몸을 움직여야지. 그리고 더 강한 상대와 대련도 하고."
어린애한테 설명하는 게 쉽지 않은 듯 보였다.
루디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저도 여기서 살게 되면 이제 매일 단련할래요! 더 강해져야 언니도 지키고 새로 사귈 친구들도 지키죠!"
"······."
그 말에 루비카도 침울한 기색이 되었다.
아셸이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그런 자매를 쳐다봤다.
그녀 역시 일족이 절멸한 과거가 있으니 아픔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숲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지 사흘째가 되었을 때였다.
"······."
여느 때처럼 하염없이 숲길을 걷고 있는 중,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와 아셸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부터 나무들의 가지를 딛고 이쪽을 향해 훌쩍훌쩍 뛰어오는 인형이 보였다.
아직 먼 거리에서도 초감각을 통해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 머리칼에 붉은 눈, 그리고 숲에 어울리는 사냥꾼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남자.
【Lv. 51】
'뱀파이어.'
뱀파이어다.
머리 위에 보이는 레벨은 51로 상당히 높았다.
애타게 찾아다니던 뱀파이어가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음에 기쁨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조금 긴장했다.
이윽고 바로 근처에 있던 나무의 가지에 착지해 멈춰선 그가 우리를 내려다봤다. 나도 놈을 빤히 쳐다봤다.
상대의 눈빛에는 당연하게도 우호적인 감정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하고······ 뱀파이어?"
나와 아셸과 루디카 자매를 번갈아 보던 놈이 조금 혼란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는 뭐냐? 이 숲으로 들어온 이유가 뭐지?"
확실히 녀석에게 있어선 굉장히 뜬금없는 상황일 것이었다.
애초에 이런 깊숙한 숲까지 찾아오는 이도 없거니와,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 인간과 뱀파이어의 조합이라면.
나는 당황하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 부족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