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38화 (38/189)

뱀파이어 (6)

도미호크 시의 시장인 발롱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홀로 테라스에서 티타임을 즐긴 뒤, 잠자리에 들기 전 새벽까지 독서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저택에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손님이 찾아온 건 그때였다.

"아니······ 베고스 님이 이 새벽에 대체 어쩐 일이십니까?"

경비를 서던 기사들에게 안내받아 중앙홀로 들어온 사내를 보며, 발롱은 눈을 깜박거렸다.

군주성의 고위 인사관인 베고스.

발롱은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왜냐면 이 도시에서 열리는 발킬로프의 비밀 경매를 암묵적으로 허용해주고 있는 인물이 바로 시장인 발롱이었고, 베고스는 그런 경매의 VIP였으니까.

'오늘이 경매 주최일이었지.'

이런 새벽에 방문한 건 둘째치고 베고스의 표정이 어쩐지 다급하게 보였기에, 발롱은 의문스럽게 바라봤다.

베고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내 이런 늦은 시간에 경황도 없이 찾아온 건 미안하네만······ 경매에 일이 생겼네."

"일이라니, 그게 무슨······."

"어떤 미친놈이 경매장에서 학살을 벌였어. 관리자들도 다 죽고 잭 그놈도 죽었네. 발킬로프는 이제 끝이야."

"······예? 잭 그자가? 발킬로프의 수장이 죽었다는 겁니까?"

발롱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도미호크의 악마 잭, 3군주령의 음지에선 가장 큰 거물이 난데없이 살해를 당했다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완도 수완이지만 그의 실력도 3군주령 전체에 정평이 나있을 정도로 굉장한 강자였는데······.

"대체 누구에게 살해당했다는 겁니까?"

"그걸 나도 모른다는 거네. 심지어 여럿도 아니고 고작 한 명이었어."

"한 명이라니······ 혹시 군주성에서 나온 인물인 게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모를 리가 있겠나? 아무튼 그래서 서둘러 자네하고 의논하려고 찾아온 거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세."

그때였다.

"시, 시장님."

다급히 달려온 기사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발롱이 의아하게 그를 돌아봤다.

"또 무슨 일이길래 방정이냐?"

"그, 그게······ 7군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순간 발롱은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어 몇 초 동안 눈만 깜박거리다가, 되물었다.

"누가 왔다고?"

"7군주님께서 지금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기사의 말은 발롱에게 있어 갑자기 땅이 꺼졌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게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7군주라고? 7군주?

'······왜?'

갑자기 7군주가 자신을 왜 찾아왔단 말인가?

사칭?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떤 미친놈이 칼데릭에서 군주의 이름을 사칭하고 시장을 찾아온단 말인가.

"······!"

그게 당연한 사고의 흐름이었기에 경비를 서던 기사들도 난데없이 저택에 찾아와서 자신을 7군주라고 말한 남자와, 그 뒤에 달린 다양한 종족의 이들을 안으로 모시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유유히 홀로 들어서고 있는 낯선 방문자들의 모습을 보며 발롱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의 선두에 서있던 남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도미호크의 시장인가?"

"······예! 제가 도미호크의 시장인 발롱입니다."

긴가민가하던 발롱은 영문 모를 위압감에 이내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아무리 7군주령에서 멀리 떨어진 3군주령이라지만 7군주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는 그도 알고 있었다. 인간 남성이라는 것.

그러니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정말 7군주가 맞을 것이다.

한편 베고스도 남자, 7군주와 그 옆에 서있는 아셸을 보고서 경악했다.

'저······ 저······!'

경매장에서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발킬로프의 전투원들을 몰살하고 경매장을 학살판으로 만들었던 정체불명의 남녀.

7군주가 고개를 돌려 베로스를 쳐다봤다.

베고스는 한순간 넋을 놓았다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7군주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저는 3군주성의 인사관인 베고스입니다!"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했다. 뜬금없이 그런 어마무시한 실력자가 어디서 튀어나왔겠는가?

뭔가 큰 줄과 연결되어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군주 본인이었을 줄이야.

'잭, 이 미친 새끼······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초대장을 강탈당했다며 경매장에서 7군주를 먼저 공격하려 들었던 건 분명 발킬로프 측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뭐가 어떻게 꼬였기에 그런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발생한 건지 베고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7군주의 입이 열렸다.

"시장,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 찾아왔다."

······부탁?

발롱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어지럽게 굴리며 대답했다.

"예, 얼마든 말씀해주십시오!"

"이 도시에서 발킬로프의 비밀 경매가 주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순간 발롱과 베고스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 그것이······."

"물론 알고 있었겠지. 그걸 탓하려는 건 아니고, 지금 내 뒤에 있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경매장에 노예로 팔려나온 이들인데 어쩌다 처지가 마땅치 않게 됐거든."

상황의 맥락을 알고 있는 베고스는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발롱도 앞서 베고스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그의 반응을 슬쩍 살피고서, 눈치 빠르게 상황을 유추했다.

'······경매장에서 학살을 벌였다는 자가 7군주였던 건가?'

7군주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자네가 이들의 신변을 책임지고 맡아줬으면 해. 돌아갈 곳이 있는 자들에겐 여비를 넉넉히 쥐여서 보내고,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겐 적당한 일자리를 구해줬으면 하는데."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으나 발롱은 의아했다.

군주가 일개 노예들 따위의 신변을 챙겨주고 있는 게 더없이 괴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7군주의 본래 성향이 그런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 것인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감히 의문을 표할 수는 없었다.

"맡겨주십시오. 이들의 신변은 제가 철저히 보장하겠습니다."

"그래, 용건은 그게 끝이다. 그럼 이만 가지."

그러고 7군주는 노예들을 남겨둔 채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 뒤를 호위 기사와 한 뱀파이어가 따랐다.

갑자기 찾아와서 갑자기 떠나가버리는 모습에 발롱과 베고스는 당황해서 인사했다.

"사, 살펴가십시오! 7군주님을 뵙게 되어 평생의 영광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들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허리를 피지 않았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크게 안도하고 있었다.

혹시나 경매와 관련해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책임을 물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으니까.

물론 이곳은 3군주령이고 이 도미호크 시를 관리하는 건 온전히 시장의 권한이라지만, 어디 군주가 그런 어쭙잖은 권력이 통하는 상대이던가?

"······십 년은 늙은 기분이군."

베고스가 그 말대로 기가 다 빠진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발롱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대체 7군주께서 도미호크 시에는 왜 찾아오신 건지······."

"위대하신 분들의 생각을 어찌 우리가 짐작하겠나. 이렇게 무사히 넘어간 거나 다행으로 여기세."

발롱이 덩그러니 남겨진 노예들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베고스 님께서 말하신 경매장의 인물이 7군주님이 맞는 거지요?"

"맞네."

"그럼 이제 발킬로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뭘 당연한 걸 묻고 있나, 완전히 끝이지. 고리를 만들어둔 게 있으면 자네도 서둘러 끊어버리게. 후······ 나도 서둘러서 군주성으로 돌아가봐야겠군. 이게 대체 뭔 날벼락인지."

***

노예들의 신변 문제는 그렇게 시장을 이용해 간단하고 확실하게 처리했다.

뭐, 경매의 주최를 눈감아주고 있던 시장도 다 똑같다면 똑같은 놈이었지만······ 여기서 굳이 더 들쑤실 것도 없었다.

경매장에서 학살을 벌인 건 어디까지나 발킬로프가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지, 뭔 정의를 집행하겠답시고 그런 게 아니니까.

우리는 곧장 숙소로 돌아왔다.

루디카는 바로스와 함께 여관의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의 모습을 본 루디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언니!"

"······루디카!"

둘은 곧바로 서로에게 달려들어서 안겼다.

날 완전히 믿지 못했는지, 여기까지 오면서도 계속 얼굴에 일말의 경계를 띄고 있던 그녀도 동생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품에 안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바로스에게 물었다.

"별 일은 없었나?"

"예."

자매의 재회가 끝나고, 그제야 그녀는 의심이 완전히 풀린 얼굴로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저희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언니 쪽의 이름은 루비카였다.

나는 두 자매를 앞자리에 앉혔다. 이제 본 목적인 엘로드 숲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루디카는 이미 들은 이야기였지만 언니인 루비카는 아직 모르는 이야기였으니까.

루비카는 동생을 한쪽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내가 하는 말을 경청했다.

"엘로드······ 숲이요?"

이야기를 모두 듣고, 경계심과 조심성이 많은 성격인 듯한 루비카는 예상했던 대로 조금 불안한 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다른 부족의 터전이라니, 그들이 저희를 반길지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아도 본래 그들이 살던 곳에서도 동족에게 쫓겨나 고향을 잃은 자매였다.

다짜고짜 다른 뱀파이어 부족을 찾아가는 게 어떠냐 물어도 이쪽이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뱀파이어가 이 세계에서 이미지가 나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다 큰 성체는 흡혈 본능을 억누를 수 있지만, 성체라고 전부 피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는 놈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인간과 마찬가지였다. 어른은 아이보다 욕망을 더 잘 제어할 수 있지만, 어디 세상에 그런 훌륭한 어른들만 있던가?

'특히나 6군주 폭왕이 그 끝판왕이지.'

그런 놈들이 모여서 부족을 이루면 말 그대로 이 종족 저 종족 다 사냥하고 다니는 흡혈귀 떼가 되는 거고.

루디카 자매가 속해있던 부족의 터전을 침략했다는 부족도 그런 쪽에 가까운 놈들이 아닌가 싶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라."

나는 불안을 씻어주기 위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엘로드 숲에 사는 뱀파이어 부족은 굉장히 온화한 부족이다. 나 같은 인간이야 배척하겠지만 동족이라면 다르지. 외부자라고 해도 사정을 설명하면 순순히 받아들여줄 거다."

물론 나는 그들을 직접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게임을 플레이했으니까.

게임 스토리에서 엘로드 숲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진행될 때, 그들 부족 중에 이들 자매와 비슷한 이유들로 엘로드 숲에 흘러들어온 뱀파이어들이 등장한 부분도 있었다.

엘로드 숲의 부족은 그런 이들까지도 전부 포용해서 자기들끼리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딱 한 가지 '문제'만 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함으로써 그토록 필요한 혈술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거고.

루비카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아무 말도 없다가, 내게 물었다.

"근데 당신······ 아니, 그······."

"론이다."

"네, 론은 엘로드 숲에 산다는 뱀파이어 부족과 친분이 있는 건가요?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좀 곤란한 부분을 찔러서 묻네.

이 둘은 지금 내가 자신들을 순수한 선의로 새 부족들을 소개시켜주려고 하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이들 자매를 이용해서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들과 연결점을 만드려는 거니까.

나는 약간 양심이 찔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 출신의 뱀파이어와 우연히 연이 닿은 적이 있었지. 그래서 엘로드 숲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거다."

어쨌든 난 이들을 엘로드 숲까지 데려가야 하기에 일단은 안심시키는 게 중요했다.

다시 고뇌에 빠진 루비카는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론의 말대로 엘로드 숲으로 가볼게요. 저희한테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해요."

"뭘, 잘 생각했다."

설득은 끝났다.

이제 혈술을 얻으러 엘로드 숲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