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5)
놈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굳어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순간 사고가 정지한 모양새였다.
"······크핫!"
이내 놈이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까지 숙이고서 끅끅거리며 웃던 놈이 정색하고서 말했다.
"정신이 나간 거냐? 칼데릭에서 군주의 이름을 사칭해?"
"······."
"네가 군주면 내가 세인테아의 용사다, 미친 새끼. 생각보다 훨씬 맛이 간 놈이었구나. 그딴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가 정말 먹힐 거라고 생각해서 지껄인 거냐."
뭐, 이런 반응이군.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놈에게는 그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게 정상이었다. 군주가 왜, 그것도 엔록의 7군주가 대체 왜 3군주령에서 이런 비밀 경매에 참여하고 있겠나.
"그래, 몸뚱이가 성한 채로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하니 바람대로 해주마."
그렇게 말하며 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단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진행자의 진행을 멈추고 자신이 단상의 한가운데에 섰다.
"죄송하지만 여러분, 잠시 경매를 중단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참가자들이 앉은 좌석에서 소란이 일었다.
"저희 조직원들을 살해하고 초대장을 강탈하여 경매에 참가한 이가 있습니다. 쥐새끼를 먼저 처리하고 경매를 계속해서 정상적으로 진행하도록 할 테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뭘 어쩌려나 했더니 경매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생각도 없던 모양이다.
단상에 선 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자연스레 주변의 시선도 나를 향해서 일제히 몰렸다.
참가자들이 떠들어대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이 또한 재밌는 이벤트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
슬슬 피곤하다.
이 역겨운 경매를 기껏 여기까지 꾹 참고 봤더니 결국 이 꼴이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별 수 있나? 날뛰는 대로 어울려줘야지.
"마지막 기회를 주마. 순순히 잡힐 테냐, 아니면 저항하다 팔다리 한두 군데는 잘릴 테냐."
어느새 주위에는 무장한 이들이 나타나서 내가 앉아있는 곳을 넓게 둘러싸고 있었다. 발킬로프의 전투원인가.
전부 50레벨이 넘고 60레벨이 넘는 이들도 몇몇 있는 걸로 봐서 정예 전력인 듯했다.
'약은 새끼네.'
나는 단상에 서있는 놈을 바라봤다.
말만 하는 걸로 봐선 당장 자리에서 지 손으로 찢어버릴 것처럼 굴더니, 혼자 뒤에서 빠져있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내 쪽의 전력이 정확하게 어떤지 모르니 일단 경계하겠다는 거겠지. 신중하다면 신중한 판단이었다.
여전히 가만히 앉아있는 내 모습에 놈이 혀를 차고는 명령했다.
"두 연놈 다 목숨만 붙여놔라."
주위에 있던 다른 참가자들이 바깥쪽으로 물러나고, 전투원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장내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좀 전까지의 더럽고 질척거렸던 열기는 순식간에 서늘함과 흉흉함으로 돌변했다.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우습게도 이 분위기가, 이제 곧 시체와 피비린내로 가득 채워질 이 상황이 사람을 사고파는 경매보다 차라리 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나도 벌써 이 세계에 적응을 다 한 걸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다.
"아셸."
"예."
입을 열자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셸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나지막이 뒷말을 이었다.
"전부 죽여도 상관없다."
상대는 수십, 그리고 전부 50, 60레벨대의 실력자.
반면에 내 쪽은 아셸 한 명.
그러나 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싸우기 전부터 결과는 이미 정해져있었다.
지금껏 너무 규격 외의 괴물들만 마주쳐왔을 뿐이지, 아셸은 이 세계에서 충분히 최상위 반열에 속하는 강자다.
내가 설득해서 호위로 영입하지 않았다면 본래 대군주성의 최정예 전력인 흑린이 되었을 실력자.
발킬로프가 아무리 3군주령 최고의 암조직이라 한들 격 자체가 아득히 달랐다. 토끼 떼 사이의 늑대였다.
이 라사 세계관에서 레벨의 차이란 그토록 절대적이고 불합리한 것이었다.
"죽······."
전투원 하나가 입을 열려고 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촤아아아악!
아셸의 검에서 뿜어져나온 거대한 빛살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이어서 그들의 몸이 일시에 투두둑 갈라지며 무너져내렸다.
전투라고도 할 수 없었다. 발킬로프의 전투원들은 그렇게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전멸했다.
내게 있어선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지만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흐, 흐아악!"
잠시 상황을 못 파악하고 있던 참가자들이 이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장내가 혼돈으로 휩싸이는 와중에 나는 단상 쪽의 놈, 잭을 응시했다.
"······!"
반쯤 넋이 나가서 상황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놈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단상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와······.'
저렇게 바로 도망친다고?
그 뒤를 쫓아서 바로 아셸이 날아들었다.
등 뒤에서 휘둘러오는 검에 놈은 기겁하며 방어를 했다. 잠시 두 사람의 공방이 이어졌다.
놈도 레벨이 70에 육박하는 만큼 조금은 버티는가 싶었으나,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한쪽 팔을 잘리고 벽면으로 튕겨나가 처박혔다.
"끄억······!"
아셸이 검을 거두고 이쪽을 돌아봤다.
전부 끝났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그녀의 압도적인 무력에 새삼 감탄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매 참가자, 그리고 진행자나 피라미 조직원 놈들은 진작 도망쳤고, 남아있는 건 단상 구석의 노예들뿐이었다.
그들은 어디로 도망치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질려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디아의 언니도 있었다.
"구속을 풀어줘라."
"예."
"안쪽에도 더 있을 테니 그들도 데려와서 한 곳으로 모으고."
나는 노예들은 아셸에게 맡기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아셸의 검에 복부가 쩍 갈라지고 한쪽 팔도 잘린 채 다 죽어가던 놈이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대, 대체······ 넌······ 뭐냐······."
나는 그 바로 앞에 멈춰섰다.
"말했잖아, 7군주라고."
"······."
"아직도 믿기지가 않나?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하겠냐만."
"왜······ 왜······."
놈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완전히 탈진해버린 얼굴로 그 말만을 반복했다.
왜 대체 7군주가 이곳에 있는 건지, 왜 대체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
굳이 다른 말은 붙이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물음이었다.
나는 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쓰레기들 중 너희가 하필 우연히도, 재수 없게 내 눈에 거슬린 거다. 그뿐이지."
정말 단지 그뿐이었다.
우연히 뱀파이어를 발견했고, 우연히 놈의 동생의 선을 넘은 악행이 눈에 띄었고, 그래서 죽였고, 그 사실을 경매에 참여했다가 걸렸고.
내가 이들에게 특별히 원한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저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굴러온 일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경매는 개판이 났고 이제 곧 수장도 죽을 테니, 발킬로프도 오늘부로 끝일 듯했지만.
"······크아아아악!"
억울함과 울분 섞인 눈빛으로 날 노려보던 놈이 마지막 힘을 짜내 몸을 튕기듯 일으켰다.
멀쩡한 쪽의 손에는 어느새 허리춤에서 뽑은 단검이 들려있었다.
서늘한 날이 목을 노리고 섬전처럼 찔러왔으나 부질없는 발악이었다.
놈의 움직임은 초감각에 너무도 느릿하고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부동 장막에 막힌 검날이 허공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정지했다.
놈은 눈을 부릅 뜨고서 검자루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다시 휘청이며 바닥에 몸을 무너뜨렸다.
한계가 온 듯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즉살을 발동하며 옆으로 밀어버렸다.
풀썩.
그게 놈의 최후였다.
나는 시체에 눈길도 주지 않고 노예들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새 구속에서 풀린 그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안쪽에서 아셸이 몇몇 노예들을 더 데리고 나왔다.
"그게 전부인가?"
"예, 그렇습니다."
나는 한곳에 모인 그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경매에 나온 인원보다 적은 것 같은데······ 알아서 도망친 사람들도 있는 건가?
"인간, 우리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때 누군가 사나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디카의 언니인 뱀파이어였다. 그녀는 여전히 적의 가득한 시선을 띠고 있었다.
기껏 구해주고 받기엔 억울한 눈빛이었지만 이해는 됐다.
가족들은 인간의 손에 죽고, 자신은 이곳에 노예로 잡혀왔으니 당연히 인간들이 증오스러울 수밖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루디카의 언니가 맞나?"
내 말에 그녀가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 루디카? 어떻게 내 동생을······."
"나는 네 동생의 부탁을 받고 널 구하러 온 거다. 그러니 경계할 필요 없다."
나는 그녀에게 대강 설명해주었다. 큐백스에서 루디카를 만난 것부터 이곳 경매장에 오기까지의 사정을.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녀가 기쁨과 안도감 반, 그리고 여전히 경계가 반 남은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정말 내 동생의 부탁을 받고 온 거예요? 정말로?"
"그래. 아니면 내가 네 동생의 이름을 어떻게 알겠나."
"······."
"이 도시에 있는 여관에서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따라와라."
그녀가 머뭇거리며 나와 아셸을 번갈아봤다.
눈짓을 주자 아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끌었다.
그렇게 그녀는 주춤주춤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언니라서 그런지 루디카보다는 의심이 많구만.
나는 다른 노예들을 둘러봤다.
루디카의 언니를 확보한 것으로 목적은 달성했지만, 남은 사람들은 어째야 될까······.
'······시장을 찾아가는 편이 나으려나.'
아, 다른 군주령에서 깽판 치기는 진짜 싫었는데.
나는 3군주 천궁에 대해 떠올렸다.
그는 대군주만큼이나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 이번 일이 그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그는 세상만사 무관심한 성격으로 보이는 한편 별 사소한 일에 이상하리만치 집요하게 굴기도 했다.
군주들이 신경 쓰는 건 누구를 죽였고 어떤 피해를 입혔냐가 아니다. 발킬로프 따위야 3군주의 안중에나 있겠나?
다만, 다른 군주가 자신의 영역에서 난동을 피웠다는 사실 자체를 못마땅해할 수 있었기에 그게 좀 걸렸다.
그 미치광이와 다름없는 6군주 폭왕도 다른 군주령에서는 함부로 제멋대로 굴지 않으니까.
물론 이게 뭐 엄청난 소란을 벌인 것도 아니고, 먼저 공격을 당한 쪽도 나니까 별 문제는 없겠지만······ 아무튼.
"너희들은 이제 자유다."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노예들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 말에도 그들은 그저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자유라고 말해봤자 가진 것도 하나 없고, 아예 돌아갈 곳이 없는 이들도 있겠지.
이 난장판을 벌여놓고 이들을 여기에 그대로 남겨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일단 최소한의 뒷정리는 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