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4) - 무료 끝
어두운 방 안.
한 남자가 책상에 다리를 꼬아 올린 채 앉아서 의자를 까닥이고 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 터질 듯한 근육질의 전신. 하지만 그와 상반되게 자아내는 분위기는 음산하고도 날카롭다.
앞쪽에 서서 막 보고를 마친 수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니까······."
"예."
"큐백스에서 정체 모를 젊은 귀족 놈팽이가 뱀파이어를 거금에 구매했다, 알아낸 건 이것뿐인가?"
"······그렇습니다."
"그게 내 동생이 죽은 거랑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도 전혀 모르고 말이야······."
남자의 말꼬리가 흐릿하게 늘어졌다.
수하는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의 버릇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킬로프의 수장 잭, 그것이 남자의 정체였다.
조직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경매 주최를 앞두고 현재 잭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동생인 존이 도미호크 시로 경매품인 노예들을 호송해서 오다가 습격을 당해 죽었다.
더 열이 받는 건 그 씹어 죽일 새끼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추적을 하기엔 발견이 너무 늦었고, 뒤늦게 전후 사정을 알아보려 큐백스로도 수하들을 보냈지만 알아낸 거라곤 방금 들은 보고처럼 별 것 없었다.
"후우우······."
잭이 늘어지는 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분노를 억누르기가 힘든 건 오랜만이었다.
틈틈히 자금도 빼돌리고, 함부로 노예들에게 손을 대고, 여러모로 미운 놈이었어도 그래도 세상에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길바닥에서 구르던 시절부터 발킬로프를 조직하고 3군주령 제일의 암조직으로 키우기까지 계속해서 함께해온 혈육.
다시금 꾸역꾸역 치솟는 노기와 허무함을 억누르며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곧 경매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더 자세한 조사는 일단 그쪽부터 마치고 나서였다.
똑똑.
"들어와라."
노크가 울리고, 한 엘프 노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경매에 참석하는 자들의 입장을 맡은 간부 조직원이었다.
잭이 슬며시 눈을 뜨고 물었다.
"뭐냐."
"예, 다름이 아니라 경매에 정보가 없는 분이 참석하셔서 말입니다."
가면을 쓰곤 있다지만 그건 참석자들끼리 서로의 얼굴을 가리기 위한 용도일 뿐이다.
주최자인 발킬로프는 당연히 참석자들의 정체를 대체로 파악하고 있었다. 애초에 초대장을 건네는 것도 그들이고, 늘 참석하는 이들만 참석하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물론 종종 정보가 없는 참석자가 생길 때도 있었고, 그럴 때는 그쪽에 더 약간의 주의를 기울이고는 했다.
평소라면 알겠다고 가볍게 넘길 보고였으나 잭은 보고를 올린 수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존, 그놈이 뱀파이어를 구매했다는 놈에게 초대장을 건넸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젊은 인간 남자와 붙어있는 호위 기사는 계집이었다고 했고. 외관이 어떻다고?"
"남자 쪽은 흑발에, 호위 쪽은 백발이었습니다."
잭이 다시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받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흑발의 인간 남성과 백발의 인간 여성이었습니다."
"그놈들이군."
큐백스에서 경매에 나갈 뱀파이어를 구매했다는 놈들.
잭은 잠시 생갹에 잠겨있다가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동생의 죽음과 그들이 어떤 연관이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나마 당장 기대해볼 건덕지는 그것뿐인 듯했다.
***
지하로 내려가자 펼쳐진 풍경은 제법 놀라왔다.
좌석과 단상, 딱 상상했던 정도의 경매장의 모습이긴 한데, 공간이 생각보다 넓었기 때문이다.
경매장 내부를 벽면 곳곳에 박힌 흐릿한 발광석들이 어스름히 밝히고 있었고, 이미 좌석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맨 뒤쪽에는 2층 난간에 놓인 좌석들도 존재했는데, 저건 한눈에 봐도 VIP석처럼 보였다.
나는 입구에 서있던 이의 안내에 따라서 자리를 골라 잡고 아셸과 함께 앉았다. 적당한 중간 열이었다.
'이건 뭐야.'
의자의 팔걸이에 번호가 쓰인 피켓 같은 것이 있었기에 들고 살펴봤다. 보아하니 경매에 입찰할 때 사용하는 거였다.
피켓을 내려놓고 다시 단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서 노예들이 나오는 건가.'
그리고 진행자가 노예들을 소개하며 떠들고, 참석자들은 그걸 우리 안의 짐승 보듯 구경하다가 마음에 들면 입찰하고.
이런 장소를 경험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도 벌써부터 대충 그려지는 광경이었다.
나는 작게 혀를 차며 아셸을 돌아봤다.
그녀 역시 자리가 불편한지 가면 너머로도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언제 시작하냐.'
사람들이 점점 모이며 어느새 좌석은 절반 이상이 가득 찼다.
나처럼 경매가 시작하길 기다리며 조용히 앉아있는 이들이 있는 반면 동행자와 떠드는 이들도 있었는데, 초감각으로 그들의 대화가 훤히 들렸다.
"이번에 수인 노예들 중에 상등품이 많은 모양이야. 기대하라고 아주 자신을 하던데."
"그런가? 내 마음에 쏙 드는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군. 걸어줄 목줄도 따로 하나 특별히 제작해놨는데······."
듣고 있기 역겨운 대화였기에 이내 신경을 껐다.
잠시 뒤, 단상의 커튼이 걷히더니 조명과 함께 가면을 쓴 정장의 남자가 무대에 나타났다.
"모두 안녕하십니까, 경매에 참여해주신 신사숙녀 여러분!"
이제부터 경매가 시작되려는 듯했다.
유쾌한 목소리로 인사한 진행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잠시 주절주절 떠들다가,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입찰 방식은 앉아계신 의자에 준비되어 있는 피켓을 들고 입찰 가격을 불러주시면 됩니다. 자, 그럼 첫 번째 상품입니다!"
단상 옆에서 반쯤 전라의 엘프 여인이 몸이 구속된 채 걸어나왔다. 눈에 생기가 전혀 없는.
"첫 번째 상품은 여성 엘프입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정도의 미모에 이런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엘프는 쉽게 보기 힘들죠. 자, 그럼 이제 시작이니 가볍게 20골드부터 입찰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좌석에 앉은 이들 중 누군가가 바로 피켓을 들어올리며 본격적인 경매가 시작되었다.
30골드, 40골드, 70골드, 별 소란도 없이 빠르게 100골드까지 오르고 나서야 더 이상의 입찰은 없었다.
"100골드까지 나왔습니다! 더 입찰하실 분은 없으십니까?! 괜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 정도 품질의 엘프 노예는 정말 어디서도 구하기 힘듭니다!"
진행자는 계속해서 입찰을 재촉하다가 마지막 카운트를 끊고 아쉽다는 듯 외쳤다.
"축하드립니다! 56번 신사 분께서 100골드에 낙찰하셨습니다!"
그 뒤로도 경매는 계속해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정말 다양한 종족들이 노예로 나왔다. 인간부터 시작해서 수인과 엘프, 그리고 다른 희귀 종족들.
진행자는 몇몇 노예들에겐 그들이 잡혀온 뒷배경을 설명하는 것에도 힘을 썼다. 왜냐면 그 또한 노예의 값을 올리는 데에 크게 한몫하는 부분이었으니까.
특히나 세인테아 출신의 몰락 귀족 영애가 나왔을 때는 입찰가가 천정부지 솟아올라 500골드까지 치솟았다.
"······."
경매장의 더럽고 끈적한 열기가 몸에 달라붙는 듯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조용히 경매를 지켜봤다.
대충 열 명도 넘게 거치고 나서야 드디어 내가 경매에 참여한 목적이 나왔다.
"다음 상품은 무려 뱀파이어입니다!"
나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단상으로 끌려나온 이를 바라봤다.
다른 노예들처럼 손만 구속된 게 아니라 입에 재갈까지 물려있는 흑발 적안의 소녀. 한눈에 봐도 루디카와 닮은 얼굴.
"흡혈귀, 저주받은 종족이라고 불린다지만 꺼려하실 필요는 전혀 없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린 뱀파이어는 성체와 달리 그들 고유의 피를 다루는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니까요! 또 워낙에 야성이 강한 만큼 길들이는 맛도······."
그녀가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좌석에 앉아있는 이들을 죽일 듯 노려봤다. 나와도 잠깐 시선이 마주쳤다.
진행자의 설명이 이어지고 슬슬 피켓을 들어올릴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나으리."
옆자리에 누군가 다가와서 털썩 앉았다.
"경매는 즐겁게 즐기고 계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전신에 근육이 터질 듯 우락부락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Lv. 68】
특히나 인상적인 건 머리 위 레벨이었다.
70레벨에 가까운 수준의 실력자.
뜬금없이 내게 말을 걸어온 그는 곧바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저는 발킬로프의 수장인 잭이라고 합니다."
"······."
"한창 흥이 오르는 중에 죄송하지만, 나으리께 조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큐백스 시에서 어린 뱀파이어를 구매하셨더군요. 초대장도 한 장 받으셨고 말입니다."
"그랬지."
"나으리께 초대장을 건네드린 놈이 제 동생이었습니다. 근데 그놈이 이곳 도미호크로 노예들을 호송해서 오다가 웬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랬나? 유감이군."
"······예, 아주 유감이죠. 그래서 말입니다."
놈의 눈이 야수처럼 번뜩였다.
"참 타이밍이 공교롭기에 혹시나 여쭙는 겁니다만, 나으리께선 그에 대해 뭐라도 알고 계신 게 있으신지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안하지만 잘 모르겠군."
놈이 나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제가 나으리의 사지를 하나씩 비틀어서 뽑아버려도 같은 대답이 나오겠습니까?"
"······."
"이 짓거리를 하면서 늘은 게 눈치밖에 없어서 말이야. 네가 내 동생을 죽인 게 맞군, 그렇지?"
······걸렸네.
죽인 장소에서부터 추적을 당한 걸까, 아니면 경매에 처음 참여한 거라 눈에 띈 걸까.
아무래도 중요한 건 아니었다. 놈은 이미 내가 동생을 죽였다는 걸 확신한 듯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놈이 죽기 전에 형이 수장이니 뭐니 했던가.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물을 줄은 생각 못했는데.
'조용히 볼일만 보려 했더니.'
이래서야 그러기는 글렀다.
나는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죽였다."
"왜 죽였지?"
"글쎄, 왜 죽였을까?"
놈이 분노를 삭히는 듯 다시 한 번 긴 숨을 뱉어내고서 말했다.
"아직 말장난이 나오나 보군. 내가 지금부터 너에게 뭘 할 것 같나?"
"······."
"일단 고문실로 끌고갈 거다. 우리 조직에는 뛰어난 고문 기술자들도 아주 많거든. 장담컨대 세상에 이런 고통도 존재한다는 걸 네 온몸의 살과 뼈로 실감할 수 있게 될 거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그냥 죽여달라고 빌고 또 빌게 되겠지. 너도, 지금 네 옆에 앉아있는 호위 년도."
놈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나마 편한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줄 때 묻는 것에 성심성의껏 답하거라. 넌 누구인지, 또 내 동생은 왜 죽였는지."
"감당할 수 있겠나?"
놈이 내 말에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감당? 같잖은 허세는 관둬라, 애송아. 이 3군주령에서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 네가 군주님의 숨겨진 자식이라도 되느냐? 아니면······."
"나는 7군주 론이다."
말소리가 우뚝 멈추었다.
놈은 귓가에 들려온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뭐라고?"
"두 번 말해줘야 되나?"
나는 팔걸이에 턱을 괴고서 다시 앞쪽의 단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시작된 경매와 오르는 입찰가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7군주, 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