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35화 (35/189)

뱀파이어 (3)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셸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발킬로프 놈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공자님······ 혹시 머리가 갑자기 어떻게 되신 겁니까?"

장발이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개를 양옆으로 까닥였다.

"아무리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내고 싶으셔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셔야죠. 저희가······."

나는 놈을 가리키며 말을 끊고 말했다.

"저놈은 잠깐 목숨을 붙여둬라. 물어봐야 될 게 있으니."

"이런 씨······."

놈이 와락 인상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아셸의 검이 뽑혔고, 푸른빛의 섬광이 어둠을 뚫고 번뜩였다.

촤아아악!

그리고 터져나오는 선혈들.

그걸로 끝이었다.

목을 잃은 사내들의 몸이 하나둘씩 바닥에 널부러졌다. 가도가 피로 물들고,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의 시체들이 만들어졌다.

예전이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보이지도 않았겠지만, 이제는 초감각 덕분에 선명하게 보였다.

아셸이 장발 놈의 양옆으로 검기를 쏴서 놈들의 목을 일격에 베어버린 것이었다.

"······끄아아악!"

장발이 잘린 팔의 절단면을 붙잡고 고통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끅끅거리다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본다. 전멸한 수하들을 본 놈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이, 이게······ 대체 뭔······."

놈의 눈에는 아셸이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레벨이 60에 가깝다고 해도 80레벨이 넘는 아셸과는 아득한 격의 차이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놈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도미호크 시에서 열리는 경매에 뱀파이어가 나오나?"

"······."

"너희들이 붙잡은 뱀파이어 자매 중 언니 쪽 말이다."

"······마, 맞습니다. 나옵니다."

놈은 순식간에 공손해져서 반쯤 정신이 나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려주십시오, 공자님. 원하시는 건 전부 말씀드릴 테니······."

"경매가 열리는 장소와 날짜는?"

"아, 앞으로 정확히 보름 뒤, 장소는 도시 외곽에 있는 호튼이란 자의 저택의 지하에서 열립니다. 해가 떨어질 즈음부터 자정까지······ 초대장을 들고 찾아가시면 됩니다."

저택의 지하인가.

"경매에는 누가 참가하지?"

"대체로 인근 도시의 귀족들이 참여하고······ 군주성에서 오신 관리 분들도 몇몇 참석합니다."

"양지의 경매도 아닌 듯한데 대놓고 참가하나?"

"무, 물론 아닙니다. 전부 각자 가면을 착용하고 경매에 참석합니다."

"초대장은 한 장당 한 사람만 참여가 가능한가?"

"······아닙니다. 초대장을 가진 참석자가 한 명까지는 동행인을 붙여서 경매에 참여하는 게 가능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볼 만한 건 이게 끝이었다.

놈이 다급해져서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고, 공자님. 제가 도미호크의 경매장까지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이놈들이야 어차피 쓰고 버리는 소모품 같은 놈들이니 죽인 건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VIP로 경매에 참여하실 수 있도록 제가······."

말없이 놈을 빤히 내려다봤다.

내 눈빛에서 곧 일어날 미래를 읽었는지 놈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저, 저를 죽이시면 나으리께서도 곤란해지실 겁니다! 저는 발킬로프의 간부입니다! 군주성의 고위 관리들도 모두 저희 단체에 발을 걸치고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제 형님이 바로 발킬로프의 수장······!"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강하면 짓밟고, 약하면 짓밟히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

"네가 말했듯 자연의 순리일 뿐이니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처절한 외침이 들렸다.

"씨, 씨발 이 개새끼야아아!"

놈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들고 돌아선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동시에 내 옆을 스치고 아셸의 신형이 날아들었다.

푸화학!

파육음이 울리고, 무언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차피 아셸이 아니었어도 부동 장막으로 막을 수 있었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아셸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가까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약간의 묘한 기분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핏물과 함께 널브러진 시체들을.

사람이 죽는 거야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많이 봤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직접 벌인 학살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살아생전 첫 살인은 권성을 죽인 것이었지만 그때는 별 느낌이 없었다.

그건 솔직히 인간보다도 괴물을 죽인 기분이었고, 즉살로 죽여버린 만큼 무언가를 죽였다는 감각도 별로 없었으니까.

그리고 칼데릭을 돌아다니며 마주친 도적들이야 나서기도 전에 바로스가 알아서 전부 죽여버렸고.

이번에도 별 느낌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근데 그게 단지 제왕의 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묘한 기분을 느끼는 건 충격이나 죄책감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마음이 너무 평온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쓰레기들이었다고는 하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 모양이지.

"으윽······."

쓰러진 수인족들이 하나둘씩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당혹스런 눈으로 전멸한 발킬로프들을 둘러봤다. 그러다 이내 이쪽으로 시선이 모였다.

"······우리를 도와준 것인가, 인간?"

방금까지 장발에게 밟혔던 수인족 여인이 경계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차까지 챙겨서 서둘러 떠나라. 시간이 지나면 방금 죽인 놈들이 속한 조직에서 추적하려 들 수도 있다."

"아,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다른 수인들을 통솔해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상이 심각한 동료들을 살피고 철창에 갇힌 이들을 구했다.

구속에서 풀려난 어린 수인들이 울고불며 그들에게 안겨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마차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여인이 소리쳤다.

"정말로 고맙다, 인간들! 나는 단단한 바위 부족의 부족장인 카고르다! 부족의 명예를 걸고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다!"

단단한 바위?

이름 한 번 참 단순한 부족이었다.

이 대륙에 널리고 널린 게 저런 야만 부족들이었기에, 이 마주침에 특별한 의미를 가질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또 볼 일이 있겠나. 앞으로는 노예 사냥꾼들을 더 조심해라."

"······그래도 은혜는 반드시 기억하겠다! 너의 이름을 알려다오!"

"론이다."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랐다.

어느새 잠에서 깨 창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던 루디카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 서린 두려움이 보였기에 나는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네 언니는 경매장에 있는 게 맞는 모양이다. 금방 구해주마."

정리가 끝나고 수인들이 먼저 떠나갔다.

나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경매장······.'

일단 도미호크 시에서 열리는 경매에 대해선 대충 알았다.

보름 뒤, 호튼이란 인물이 소유하고 있는 저택의 지하에서. 그 저택도 발킬로프에서 관리하는 저택이겠지.

'그대로 참가할까?'

머릿속에 두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그냥 조용히 경매에 참가해서 루디카의 언니만 구하는 것.

어차피 돈이야 넘치도록 있으니 어떤 뱀파이어에 미친 변태 귀족 놈이랑 입찰 경쟁이라도 붙지 않는 이상, 수월하게 내가 낙찰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경매고 뭐고 싹 다 뒤집어엎는 것.

이거는 아셸이 있으니 그냥 혼자서 할 수도 있다.

경매장에 발킬로프의 전투원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지는 상관없었다. 레벨 차이 앞에 머릿수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아니면 도미호크 시의 시장을 찾아가서 권력으로 찍어눌러 일을 완전히 키워버리든가 할 수도 있을 테고.

자기가 관리하는 도시에서 경매가 열리고 있는데 당연히 시장이 모를 리가 없고, 다 함께 엮여있을 테니까.

"······."

잠시 저울질을 하던 나는 끝내 조용히 처리하는 쪽을 선택했다.

역시 다른 군주령에서 일을 크게 벌이는 건 꺼려졌다.

더 성가시게 엮이는 일 없이 어서 루디카의 언니만 구해서 엘로드 숲으로 향하자. 그거면 됐다.

'그리고 방금 죽인 놈들은······.'

목격자야 없지만 혹시나 꼬리가 밟힐 수도 있긴 하겠다 싶었다. 보는 눈이 없다고 추적을 못하는 것도 아닐 테니까.

물론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밟히면 밟히는 거지, 뭐. 또 충돌이 있으면 추적자들도 전부 처리하면 될 뿐이다.

그래도 계속 귀찮게 굴면, 그건 그때 가서 발킬로프를 통째로 뒤집어버려도 되는 거고.

생각은 금세 정리되었다.

다시 출발한 마차가 가도를 가로질렀다.

***

시간이 흘러 도미호크 시에 도착했다.

경매가 열리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기에 그동안은 그냥 도시 구경이나 했다.

그리고 경매일이 다가온 밤.

나는 숙소에 바로스와 루디카를 남겨두고 아셸과 둘이서 거리로 나왔다.

'보이는군.'

거리에는 이미 가면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나돌고 있었다.

호위로 보이는 이들도 옆에 붙어있는 걸로 보아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 도시로 온 귀족들임은 분명했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며 야시장이 열린 거리를 걸었다.

마침 가면을 파는 노점상이 있었기에 멈춰서서 가판대에 늘어진 가면들을 살폈다.

여러 동물 가면들도 있었고, 광대가 쓰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가면들도 있었다.

나는 그중에 여우 동물 가면으로 대충 하나 골랐다.

"너도 하나 골라라."

아셸에게 말하자 그녀가 가면들을 슥 훑어봤다.

성격을 생각하면 아무거나 대충 하나 고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이내 아셸이 가면 하나를 집어들었다. 길쭉한 귀가 달린 토끼 가면이었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걸 골랐기에 빤히 쳐다보니, 그녀가 멋쩍은 듯이 말했다.

"너무 눈에 띄면 다른 걸 고르겠습니다."

"아니, 상관없다."

가면을 계산하고 우리는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호튼이라는 인물의 저택은 도시의 외곽에 있었는데, 위치는 진작에 파악해뒀다.

대로를 걷다가 골목길로 빠져서 다시 좁은 길로 나왔다.

주변에 사람들은 점점 없어지고, 서서히 저멀리 목적지인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택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어차피 지하에서 경매를 진행하다고 하니 의미는 없었다.

저택 입구 인근에는 가면을 쓴 이들이 하나둘씩 저택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가면을 써라."

"예."

나와 아셸은 가면을 쓰고 그들 사이에 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짧게 이어진 정원을 지나 다다른 저택의 입구에는 한 엘프 노인이 서있었다.

그가 앞선 사람들의 초대장을 검사하고 있었기에 나도 품에서 초대장을 꺼냈다.

내 차례가 오고 나는 노인에게 초대장을 보여주었다.

그가 가면을 쓴 나와 아셸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초대장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즐거운 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안으로 들어가셔서 앞쪽에 보이는 계단으로 바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