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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33화 (33/189)

뱀파이어 (1)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며 사람들이 실린 마차를 끌고 가는 무장한 사내들.

슥 레벨을 훑어보니 전부 다 30은 넘을 정도로 높았다.

【Lv. 57】

게다가 행렬의 가장 선두에 서있는 장발의 남자.

대장격으로 보이는 그의 레벨은 거의 60에 가까웠다.

단순한 노예 상단이라기엔 상당한 레벨들에 뭐 하는 놈들인가 싶었다.

초감각으로 예민해진 청력에 행인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킬로프다."

"야야, 빤히 쳐다보고 있지 마."

발킬로프?

어딘가 익숙하게 들리는 이름에 이내 놈들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발킬로프라면 분명 그놈들이 아니었나? 3군주령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악명 높은······.

'맞네, 그놈들.'

정보가 하나둘씩 떠오른다.

노예 판매를 가장 주력으로 하고, 그 밖의 더러운 일들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하는 위험한 단체.

게임에서는 놈들이 여는 비밀 경매에 VIP로 참석한 군주성의 고위 관리를 암살하는 서브 스토리가 있었던가.

나는 철창에 갇힌 노예들을 응시했다.

하나같이 눈들이 죽어있는 게 삶에 전혀 의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신분제가 완전히 살아 숨 쉬는 이 판타지 세계엔 노예 역시 존재했다.

노예 제도가 불법인 국가들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그게 적어도 칼데릭은 아니었다.

군주가 원한다면야 특정 군주령에서는 불법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할 군주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봐라, 너희들! 멀쩡히 있는 줄을 두고 뭘 멋대로 지나가고 있는 것이냐!"

그때 내 얼마 떨어진 앞쪽에 서있던 마차에서 한 젊은 남자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렸다.

귀족으로 보이는 그가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옆을 지나쳐가는 노예상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모습에 지켜보는 행인들의 분위기가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대장인 장발 남자가 다가온 그를 보더니 히죽 웃었다.

"보시다시피 저희가 달린 물건들이 많아 줄을 서기 번거로워서 말입니다. 조금 양해를 해주십시오."

그러면서 그가 뒤쪽에 실린 노예들을 가리켰다. 그들을 물건이라 칭한 것이었다.

"양해? 지금 장난하는가?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나으리, 혹시 어느 가문의 자제이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남자가 허 웃더니 말했다.

"가문? 지금 날 겁박하는 것이냐? 내 아버지께선 1군주령 볼카디온 체일 시의 부시장이시다! 감히 비천한 노예상 놈들이······."

그에 듣고 있던 사내들이 실실 비웃음을 지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남자가 당황했다.

"이, 이놈들이 정녕?"

"이런, 제가 무려 부시장 님의 자제를 몰라뵙고 결례를 저질렀군요. 죄송합니다."

"그, 그래. 내가······."

"한데 먼 곳에서 오셔서 저희가 누구인지 잘 모르셨나 봅니다."

장발이 슬쩍 남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초감각이 있었기에 내 귀에는 그 속삭임이 선명하게 들렸다.

"······좀 그만 귀찮게 굴고 꺼져라, 애송아. 그깟 같잖은 직위로 설치지 말고. 사지를 다 비틀어서 뽑아주랴?"

그에 남자가 새하얗게 질려서 아무 말도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장발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마저 갈 길을 가버렸다.

나는 그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웃기는 놈이네.'

발킬로프라면 아마 군주성의 여러 고위 관리들과도 연줄이 깊었을 것이다. 괜히 한 군주령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단체일까.

다른 군주령에서 온 귀족이야, 그것도 고작 부시장 가문이라면야 신경도 쓸 리 없었다.

남자는 떠나가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치욕스런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다시 자신의 마차로 돌아갔다.

성문의 경비병들도 익숙한 듯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그들을 바로 도시 안으로 마차를 하나씩 통과시켜주었다.

"표정이 안 좋구나."

아셸이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기에 말을 걸어봤다.

그녀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아닙니다."

"노예들이 불쌍한가?"

"······예, 솔직히."

"그래서 돕고 싶다는 건가?"

"아닙니다. 제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였다.

저번에 5군주령에서 종업원을 도와줬던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 세계에서 노예 매매는 합법이고, 저들은 그 테두리 안에서 노예를 사고파는 상인일 뿐이다.

더 파고들면 이것저것 수많은 불법들을 저지르고 있겠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렇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노예들이 너무 불쌍해서 저 남자들을 전부 처치해버리고 노예들을 구해준다면?

그렇게 구한 노예들은 어떻게 할 건가? 끝까지 책임지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인가?

또 발킬로프 놈들은 어떻게 하고? 먼저 건드렸으니 죽어라 복수를 하려 들 텐데.

물론 군주의 권력이라면 저까짓 암조직 하나 따위야 뿌리째로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3군주령에 속한 단체라고 해도 군주와 대적했다는 것부터가 칼데릭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니까.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냥 순간의 자기만족일 뿐이지.'

저 발킬로프뿐만 아니라 이 대륙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노예 상단과 노예들이 존재할 것이다.

앞으로 그런 노예상들을 마주칠 때마다 죄다 처죽이고 다니기라도 할 건가? 뒷일 생각도 안 하고 노예들은 풀어주고?

그건 그냥 망나니와 다를 게 없었다. 뭐 하나 명확한 기준이나 신념도 없이 제 꼴리는 대로 일만 싸지르고 다니는.

내가 도울 수 있는 선까지는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돕겠다만, 그 선을 넘으면서까지 무리를 하는 건 곤란했다.

현재의 최우선 목적은 어디까지나 히든 피스들을 모으고 내가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정의의 사도 행세나 하고 다니려고 지금 칼데릭을 떠돌고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도 불쌍하긴 해.'

어쨌든 현대인의 눈으로 보자면 안타까운 인권 유린의 현장이긴 했다.

하나둘씩 성문 안으로 사라지는 마차들을 바라봤다.

"······!"

그러다 곧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지막 마차에 실려있던 노예들 중 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흑발에 적안을 지니고 있는 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

'······뱀파이어?'

초감각을 더 끌어올려서 시력을 강화하니 그녀의 입에 삐죽 튀어나온 송곳니도 보였다.

분명히 뱀파이어가 맞다.

흑발과 적안은 뱀파이어의 종족적인 특성이다. 돌연변이가 아니고서야 뱀파이어는 전부 흑발에 적안이다.

더불어 옆에 있던 사내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런데 흡혈귀가 나와봤자 누가 입찰하긴 하겠어? 찝찝해서."

"그래도 희귀성이 있는데 다 팔리겠지. 변태 같은 취향 가진 귀족 나으리들이 얼마나 많냐."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며, 철창 안에 쭈그리고 누워있는 소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마차가 성문을 통과하고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

나는 등을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웬만해서는 보기 힘든 희소 종족이기에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노예로 잡힌 녀석을.

순간 무언가가 머릿속에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뱀파이어······ 엘로드 숲······.'

뱀파이어는 희소 종족인 만큼 종족애가 강하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저 어린 뱀파이어를 구해서 엘로드 숲으로 데리고 간다면?

저 녀석이 엘로드 숲의 뱀파이어들과 같은 부족인 줄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동족이다.

동족을 구해서 데려왔으니 최소한 다짜고짜 공격은 받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터.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잖아?'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이상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이건 충분히 할 만하다 싶었다.

***

도시에 들어간 다음 숙소를 잡고, 곧바로 발킬로프에서 운영하는 노예 거래점을 찾아갔다.

경비를 서고 있던 놈들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의 직원이 보였다.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던 뚱뚱한 중년의 여인이 날 보고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공자님. 어떤 노예를 구하려고 찾아오셨나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까 보니까 뱀파이어 하나가 노예로 들어온 것 같던데."

"······어머, 맞아요. 방금 막 도착했죠."

여인이 조금 당황했다가,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한데 그 아이는 이미 다른 분에게 판매가 예정된 상품이라 구매하실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판매가 예정돼?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말의 숨겨진 의미도.

'그러고 보니 아까 입찰이 어쩌고 했었지.'

도미호크 시에서 열리는 그걸 말하는 거다. 발킬로프가 주최하는 비밀 경매.

그 뱀파이어 소녀는 아무래도 경매에 나가기로 예정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얼마를 지불해도 불가능한가?"

"예, 그렇습······."

"200골드, 백금화 두 닢이라고 해도?"

"······예?"

여인이 잠시 말을 잃었다가 다급히 말했다.

"자,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공자님? 바로 지점장 님을 모셔올 테니······."

그렇게 말하고 안쪽으로 들어간 여인이 돌아온 건 잠시 뒤였다.

두 남자를 대동하고서 돌아왔는데 그중에 한 명은 낯이 익었다.

'그놈이네.'

아까 검문줄에서 봤던 그 장발 놈.

놈이 내게 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서 인사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공자님. 뱀파이어 노예를 구매하시려 방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이쪽은 지점장인 클링크고, 저는 발킬로프의 간부인 존이라고 합니다."

존이라는 놈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내 뒤에 선 아셸을 한 번 순식간에 훑어봤다.

"한데, 공자님께서는 누구이신지 감히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굳이 알 필요가 있나?"

내 말에 놈의 인상이 아주 미약하게 일그러졌다가, 도로 펴졌다.

"하하! 물론 그럴 필요는 없죠. 백금화 두 닢에 뱀파이어 노예를 구매할 의향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말입니다, 들으셨다시피 이미 구매할 분이 정해진 상품이라 저희도 판매에 약간의 곤란함이······."

혀가 길어지며 간을 보려는 놈에게 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백금화 세 닢."

"······."

"더 올릴 생각은 없다. 그만 나불거리고 이 금액에 판매할 건지 아닌지만 말해라. 없다면 바로 돌아가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앞에서 백금화 세 닢을 꺼내들었다.

그에 옆에 선 지점장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놈을 돌아봤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놈이 이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말씀대로 백금화 세 닢에 판매하겠습니다. 저희 발킬로프 노예 거래점을 이용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는 놈의 안내에 따라 건물의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간격을 두고 있는 철창마다 노예들이 갇혀있었는데,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여기입니다."

끝내 도착한 감옥에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갇혀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찾던 뱀파이어 소녀도 있었다.

발목에는 철로 된 족쇄를 차고 있었는데, 발목이 다 까져서 피로 딱지가 진 게 보였다.

철창을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간 놈이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일어나라, 흡혈귀 년아. 네 주인님이 오셨다."

그에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봤다.

공허함이 감도는 텅 빈 눈 속에 나에 대한 경계심과 적의가 섞인 게 느껴졌다.

나도 그녀를 마주 보다가 말했다.

"족쇄를 풀어라."

"예, 예. 알겠습니다."

이내 놈이 발목의 족쇄를 풀어주고 소녀를 철창 밖으로 내보냈다. 아셸이 그녀를 받아들었다.

"원하시면 바로 목욕을 시켜서 깔끔한 상태로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놈이 눈웃음을 지으며 소녀를 바라봤다.

그 눈빛을 받은 소녀가 몸을 움찔 떨었다.

"됐으니 바로 데려가겠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대금을······ 아, 감사합니다."

나는 바로 놈에게 백금화 세 닢을 넘겨주었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간 다음 더 대화도 나누기 싫어 바로 나가려는데, 놈이 나를 붙잡고 말했다.

"공자님, 혹시 저희가 도미호크 시에서 주최하는 비밀 경매에 대해서 아십니까?"

나는 뒤를 돌아봤다.

놈이 씨익 웃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대체로 다양한 종족의 품질 좋은 노예들이 나오고, 가끔 유적에서 발굴된 보물들이 나오기도 하는 경매입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이걸······."

놈이 그렇게 말하며 내게 넘긴 건 고급스런 봉투에 담긴 초대장이었다.

"도미호크 시에 위치한 지점장을 찾아가시면 그가 알아서 경매에 대해 잘 안내해드릴 겁니다."

"······."

"그럼 부디 또 만나뵐 수 있기를 고대하겠습니다, 공자님."

또 만나긴 개뿔.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건물을 나섰다.

초감각으로 강화된 청력에 안에서 놈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존 님, 정말 괜찮은 겁니까? 경매에 나갈 상품이었는데······."

"형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면 되니까 상관없어. 그리고 어차피 한 놈 더 있잖아."

"하지만 그래도······."

"뱀파이어면 끽해야 100골드도 못 넘길 상품이었는데, 그걸 몇 배로 팔았으니 얼마나 이득이냐? 킥. 보니까 어디 다른 군주령에서 온 귀족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녀를 데리고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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