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감각 (5)
생각했던 대로 그리 수준이 높은 던전은 아니었다.
가디언들을 전부 처리하고 계속해서 나아가자 이번엔 함정이 나왔다.
일자로 길게 이어진 통로의 벽면 곳곳에 마법진들이 새겨져있었다.
- 첫 번째 시련을 통과한 그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 사방에서 빗발치는 마력 화살들을 뚫고 반대편 통로로 나아가······.
콰아앙!
아셸이 양갈래로 날린 검기에 벽면에 있던 마법진들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뭐가 나오긴 했지만 그대로 하이패스.
벽에 쓰인 문자에 시련이니 뭐니 하면서 이것저것 참 많이도 준비해놨다.
제작자는 이렇게 다 처부수면서 전진하는 걸 기대한 게 아닐 텐데 왠지 좀 미안해지기도 하고.
'그나저나 아직까지 잘도 작동하네.'
던전이라는 건 대부분 고대에 만들어졌다.
때문에 제작자가 준비해둔 가디언이나 함정들이 너무 오래되서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저번의 부동 장막이 숨겨져있던 던전처럼.
근데 이 던전은 제작자가 그닥 뛰어난 마법사인 것 같지도 않은데 여태 장치들이 망가지지 않고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아마 고대에서도 비교적 후기에 만들어졌거나, 아예 고대 시대의 던전이 아닌 건가 싶었다.
이윽고 여기가 마지막 단계라고 광고하는 듯한 거대한 석문이 나왔다.
'끝인가?'
여기까지 오면서 숨겨진 공간 같은 건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찾는 신비는 분명히 저 안에 있을 터.
시련 아닌 시련은 이걸로 끝인가 싶었는데, 문 바로 앞쪽의 바닥에 문자가 빛났다.
- 마지막 시련은 그대들의 행운을 시험하는 시련이다.
- 무력, 지혜, 동료, 신뢰, 그리고 강력한 장비들. 그 모든 것들을 갖추었다 한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운.
- 문 바로 앞에 놓인 구슬을 들고, 문에 난 두 개의 흠 중 하나에 꽂아넣어라.
- 정답을 택했다면 문은 열릴 것이고, 오답을 택했다면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아셸은 고대어를 읽지 못했기에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설명을 모두 읽은 뒤 걸음을 옮겼다.
문 앞의 받침대에 놓여있던 구슬을 집어들고 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철컥.
별 고민 없이 왼쪽의 흠에 구슬을 끼워넣었더니 문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바닥에 문자가 빛났다.
- 오답이다, 모험자여.
- 아쉽게도 그대는 나의 유산을 차지할 자격이 없다. 미련을 버리고 돌아가라.
나는 뺨을 긁적이다가 아셸에게 말했다.
"아셸, 부숴라."
콰아아앙!
거대한 석문이 산산조각 터져나갔다.
마법으로 강화라도 됐던 모양인데 아셸의 무력 앞에서는 별 의미도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관문까지 죄다 힘으로 처부수고 도착한 던전의 끝.
나는 무너진 문 앞에 서서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고 아셸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라."
"예."
그녀를 남겨두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좁은 통로를 지나서 이내 나타난 건 연구실 같은 공간.
그 한가운데에는 보물상자처럼 고급스런 목함이 놓여있었다.
그걸 열자 안에는 낡은 고서 한 권과 편지가 들어있었다.
"······."
책은 제목을 보아하니 던전 제작자가 자신의 마법을 정리한 마법서인 듯했고, 편지도 제작자의 편지였다.
대충 내용을 살피니 여기까지 온 걸 축하 어쩌고, 자신의 마법은 일인전승이니 한 명한테만 전수 어쩌고.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편지를 접었다.
던전의 장치들을 보면 제작자의 마법 실력도 알 만한데, 편지엔 무슨 세기의 대마법서라도 남겨놓은 것처럼 써놨다.
'이런 거야 아무래도 좋고.'
주위를 둘러봤다.
더 나아가는 통로도 없으니 신비가 있을 공간은 이곳뿐이다.
하지만 당장 보이는 광경에 신비의 문양은 어디에도 없었다.
설마 이 고생을 하고 또 허탕인가?
나는 약간의 조바심을 느끼며 주위를 좀 더 샅샅이 훑어봤다.
"······아."
그리고 구석에 놓여있던 책장을 움직여서 뒤쪽의 벽면을 살펴봤을 때, 그제야 나는 씩 웃을 수 있었다.
벽면에 새겨진 신비의 문양.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그것은 딱 책장만큼의 크기라서 절묘하게 가려져있었다.
나는 문양을 향해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었다.
화아악!
언제나처럼 문양이 밝게 빛나며 내 몸으로 흡수되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주위를 천천히 다시 둘러봤다.
'······뭐야, 이건.'
느껴진다.
신비를 흡수함과 동시에 선명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리가, 냄새가, 주위에서 흘러들어오는 모든 자극들이.
방 바깥에 서있는 아셸의 존재가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하게 인지되었다.
정신을 좀 더 집중하자 감각이 더욱 날카로워지며 바닥에 기어다니는 벌레의 기척까지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의 문턱을 넘은 것만 같은 기분.
'이거였나?'
이 판타지 세계의 초인들이 평소에 느끼는 감각이 바로 이거였던 건가?
그리고 비단 감각뿐이 아니었다.
내 반사 신경 또한 아득히 향상된 게 느껴졌다.
나는 바닥의 돌을 하나 집어들고 던져봤다.
포물선을 그리며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돌이 마치 굼벵이 기어가듯 느리게 보였다.
거기에 시각까지 강화됐으니 날아가면서도 돌멩이의 각진 부분 하나하나가 전부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개쩌네, 진짜.'
이건 정말 놓쳤으면 안 됐을 능력이다.
아까 고대 마법사한테 제대로 당하고서 한 번 더 확실히 깨달았었다.
방어 능력을 가져봤자 공격에 반응할 수 없으면 무용지물이라고.
그러나 이 정도의 인지 능력이라면 이제 웬만한 초인들의 속도에는 대응할 수 있을 것이었다.
'빨리 적응을 해야겠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피며 한껏 날카로워진 감각을 도로 진정시켰다.
방금 막 얻었으니 아직이야 익숙하지 않았지만 적응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 신비에는 이름이 없다.
없다기보다 몰랐다. 게임에서 테이르가 딱히 이름을 붙여서 말한 적이 없었으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적당한 이름을 떠올렸다.
초재생의 신비도 있으니까 이것도 대충 그런 느낌으로.
'초감각.'
이걸로 초감각까지 벌써 세 개의 신비를 얻었다.
***
우리는 바로 던전을 빠져나왔다.
제작자의 유산인 마법서야 필요도 없었지만 굳이 두고 나올 이유도 없었기에 챙겨서 나왔다.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마법을 배울 일은 없겠지만, 나중에 내가 영입할 인재한테 이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던전에서 나온 다음에는 생각하고 있던 것부터 아셸에게 말했다.
"아셸."
"예."
"한번 전력을 펼쳐서 검을 휘둘러봐라."
"······예?"
그녀가 움찔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기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를 공격하라는 게 아니라 빈 허공에 하라는 거다."
"아······."
뜬금없이 이런 요구를 하는 건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었다.
아셸은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이유는 묻지 않고 순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대로 검을 휘두르려는 그녀에게 나는 다시 말했다.
"전력으로. 네 특질까지 사용해서."
백월족인 아셸은 마력을 강화시키는 종족 특질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 특질까지 활성화한 정말 전력의 그녀를 보고 싶은 것이었다.
내 요구가 조금 당황스러운지 아셸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서 특질을 펼쳤다.
사아아.
아셸의 몸이 은은하게 빛나더니 곧 전신의 피부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녀가 특질을 사용한 건 나도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거였다. 지금까지는 딱히 사용할 상황이 없었으니까.
자세를 잡은 그녀가 숨을 한 번 고르고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슈와악!
그냥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거라곤 믿을 수 없는 파공음이 울리며 허공에 검격이 그려졌다.
나는 초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그녀의 검무를 응시했다.
'······보인다.'
저 검격이 나를 향한다고 해도 충분히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움직임이 보였다.
초감각은 전력을 펼친 81레벨의 움직임도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심지어 아직 여유가 있었다.
'이 정도면 80레벨대 정도는 어느 정도 다 반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이상의 강자라면 어떨까?
나는 호송선에서 봤던 권성의 움직임이나 군주 회의 때 복도에서 마주친 광랑의 일격을 떠올려봤다. 아까 전에 내 옆구리를 통째로 없애버렸던 고대 마법사의 공격도.
초감각을 얻기 전의 공격들이야 아예 보이지도 않았으니 떠올려봤자 가늠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모르겠다. 직접 다시 확인하지 않는 이상에야.
어쨌든 어느 정도 만족스런 결과를 확인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만."
칼질을 멈춘 아셸이 멈춰서서 가볍게 숨을 골랐다.
많이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정말 전력으로 펼친 모양이었다.
근데 어째서인지 그녀가 무언가를 기대하듯 나를 빤히 바라봤다.
"······."
왜 저렇게 쳐다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유를 깨달았다.
'······설마 내가 뭐 실력 평가라도 하려고 방금 걸 시킨 줄 아나?'
저 묘하게 기대하는 눈빛을 보니 그게 맞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확실히 잠재력이 있다. 계속 노력해라."
"······알겠습니다."
그녀가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내 실력으로 너한테 무슨 조언을 해주겠냐.
밤이라 어두웠지만 우리는 쉬지 않고 바로 숲을 빠져나갔다.
여러모로 지쳤지만 초재생이 있으니 버틸 만했다. 잠이야 마차로 돌아가고 나서 자도 됐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즈음에야 마차에 도착하니,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바로스를 볼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어디서 사냥이라도 한 건지 그는 토끼 한 마리를 잘 손질해서 구워먹고 있었다.
우리 없는 동안 잘 먹고 있었던 것 같아서 다행이네.
내친 김에 그 자리에서 나와 아셸도 함께 식사를 하고서 도시로 돌아갔다.
***
도시로 되돌아와서 레일로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다시 모험가 길드에 들러봤다.
다른 모험가에게서 그녀가 도시에 돌아왔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른 도시로 급히 떠나갔다고.
'진짜 쫄아서 튄 거였구나.'
상황이 좀 우스웠지만, 어쨌든 신변에 문제가 있던 게 아니라는 건 확인했기에 그녀에 대해서는 그걸로 신경을 껐다.
하루 더 묵고 나서 바로 도시를 떠났다.
다음 목적지는 원래 예정했던 대로 신퇴의 1군주령. 이번엔 좀 멀었다.
현재 위치에서부터 4, 3, 2군주령을 그대로 쭉 곡선으로 관통해서 최단 경로로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 3군주령 변경의 대도시 중 하나인 큐백스에 도착했다.
성문의 검문줄에서 대기하고 선 마차에 차례를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가 이제 갈림길인데······.'
조금 고민이 됐다.
내게 있어 가장 필요한 능력 중 하나인 혈술. 그것을 얻을 수 있을 장소인 엘로드 숲.
그 엘로드 숲이 이 큐백스 시에서 서쪽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쭉 1군주령으로 갈지, 아니면 엘로드 숲에 한번 들러볼지.'
원래 계획대로면 혈술을 얻는 건 뒤로 하고 그냥 신비에 집중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부동 장막과 초감각을 얻고 어느 정도 안전에 자신이 생기니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마음이 든 것이었다.
'······아니, 역시 아니다.'
짧은 고민 끝에 역시 그냥 1군주령으로 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로드 숲으로 향하는 건 너무 변수가 많았으니까.
내 안전에 확신이 생겼다고 한들, 결국 혈술을 얻기 위해선 그곳에 살고 있는 뱀파이어 부족과 대화가 통해야 했다. 근데 그럴 건덕지가 뭐 하나라도 있나.
그러니 본래 계획대로 일단 혈술은 뒤로 미루고 신비에 집중하는 게 최선일 것이었다.
"······?"
상념에 잠겨있는데, 바깥에서 소란이 일기에 창밖을 바라봤다.
성문 앞에 서있는 검문줄을 무시하고 옆쪽으로 당당히 지나가는 마차 몇 대가 있었다.
줄을 선 행인들이 쉬쉬하며 시선을 돌리는 광경이 보였다.
마차의 짐칸은 철창살이 박혀서 마치 감옥처럼 되어있었는데, 그 안에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갇혀있었다.
'······노예 상단?'
나는 창틀에 턱을 괴고 그들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