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감각 (4)
괴인이 쓰러진 걸 확인한 나는 도로 고개를 푹 떨궜다.
진짜 아파서 뒈질 것 같다.
뻥 뚫린 옆구리가 부글부글 끓으며 새 살이 올라온다. 초재생이 활성화되어 상처를 재생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상이 심각한 건지 놈의 마력이 회복을 더디게 하는 건지 회복이 더딘 느낌이었다.
"끄으······."
이내 부상을 전부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힘이 쭉 빠진 기분이었다.
여태 겪어왔던 위험 중에 이번이 제일 아찔했다.
옆구리가 아닌 머리에 공격을 맞았다면 난 그대로 죽었으리라. 아무리 초재생이라도 머리까진 회복시키지 못할 테니.
공간을 밝히고 있던 마법진의 빛도 괴인이 죽자 전부 사라졌다.
죽은 놈을 빤히 바라보다가 아차 하며 아셸을 돌아봤다.
아셸은 벽에 널부러져서 미동도 없이 쓰러져있었다.
나는 엉망이 된 옷가지를 추스르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어이."
부상이 심각한 건가, 이걸 어떻게 깨워야 되나 감이 안 와서 일단 뺨을 툭툭 두드려봤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아셸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그녀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나?"
"······예. 제가 얼마나······ 그 괴인은?"
"죽였다."
혼란스러워하는 아셸은 이내 상황을 이해한 듯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가, 참담한 기색이 되었다.
공격 한 번 맞고 날아가서 리타이어됐으니 솔직히 이번엔 그럴 만도 했다. 나야 레벨이 보이지만 그녀는 아니니까.
"죄송합니다. 또 아무것도······."
"대군주 못지않게 강한 놈이었다. 자책은 됐으니 이거나 마셔라."
그 말에 아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품에서 스칼릿을 꺼내들었다.
공격이 바로 아래쪽에 맞았기에 이건 다행히도 무사했다.
아셸이 고개를 저으며 검을 바닥에 세우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괜찮습니다."
"마시래도."
"아닙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하여튼 고집 참······.
억지로 내밀어도 계속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기에 입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아셸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다가 발을 헛짚고 다시 넘어졌다.
격한 반응에 나도 좀 놀라서 넘어진 그녀를 내려다봤다. 얘 혼자 뭐 하니.
"상태가 정상이 아니잖나, 역시."
"······."
이쪽을 바라보는 아셸의 눈에 희미하게 섞인 민망함과 원망이 느껴졌다.
그러게 누가 계속 고집 부리랬나.
"명령이니까 마셔라."
결국 아셸은 스칼릿을 받아들고 마셨다.
그녀는 내게 있어 대체할 수 없는 인재다. 이깟 포션 따위야 백 병이라도 아까울 리가 있나?
조금이라도 트러블이 있다 싶으면 문제가 없도록 바로바로 해결해줘야 했다.
'그나저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쓰러진 괴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새끼는 대체 뭐였지?'
왜 이 숲에 뜬금없이 저런 미친 레벨의 괴물이 있었던 걸까.
고대 마법의 황금기에 강한 마법사들이 아무리 많았다지만 97레벨이라면 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강자였을 것이다.
'엔피루스 데이마라고 했지.'
고대의 인물들에 대해선 게임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기에 모르는 이름이었다.
설정부터가 대륙 곳곳에 묻혀있는 유적들 외엔 기록이 거의 없는 게 고대 시대였다.
나는 걸음을 옮겨 제단 위로 올라갔다.
죽은 놈의 주위를 둘러보자 책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들다가 멈칫했다.
책이 살짝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지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대체 얼마나 오래된 거야?
별 수 없이 책 앞에 쭈그려앉아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앞장을 넘겨봤다.
"······."
뭐지?
나는 멀뚱히 책에 적힌 글자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이건 고대 문자인데 술술 해석이 됐다.
아까도 일단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에 신경 안 쓰고 넘어갔는데, 괴인과도 고대 언어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했었다.
평소 쓰던 말처럼 갑자기 이해되기 시작한 고대의 언어에 나는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이 감각은 전에 한 번 겪은 적이 있었으니까.
'처음에 빙의됐을 때도 그랬었지.'
처음 이 게임에 빙의됐을 때도 문제 없이 대륙공용어로 죄수와 대화를 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때와 비슷한 어떤 현상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었다.
'혹시 대화가 트리거인가?'
내가 모르는 언어로 상대와 직접 대화를 하는 게 트리거라면 말이 되는데.
나중에 다시 확인해보기로 하고, 일단은 책의 내용으로 다시 신경을 돌렸다.
- 나는 영원한 존재가 되고자 했다.
책의 첫 문구는 그렇게 시작했다.
-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필멸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다. 마력이나 다른 힘으로 노화를 늦추어도, 산 육신은 버리고 죽은 육신으로 부활해도 결국 끝은 찾아온다. 나는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필멸의 껍데기를 벗고 영원한 존재가 되고자 했다.
이어서 구구절절 이어진 내용은 마법 연구에 대한 내용이었다.
읽어봤자 이해도 안 됐기에 대충 넘어갔다.
- 하지만 그 수많은 노력들에도 결국 나는 염원을 이룰 수 없었다.
- 수천 년을 살아온 육신에 끝이 다가왔다. 원래라면 더 살 수 있었겠지만 여러 연구를 거치며 쌓인 부담에 한계가 온 것이다.
- 사령술을 이용해 망자의 몸으로 부활한다면 존재를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시는 살아있는 존재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은 평생을 망자의 몸으로 살아야 되겠지. 그것은 내 모든 걸 부정하는 것이다.
- 내 평생을 함께한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기로 했다. 유산은 남기고 싶지 않다. 남길 거라곤 이 일기뿐이다.
- 외로움, 내가 이 감정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괜찮은 놈 몇 명을 제자로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을.
여기까진 마법에 미친 마법사의 평범한 일생처럼 보였다.
근데 왜 죽지 않고 이런 꼴로 여태 살아있었던 건데?
그에 대한 답은 바로 다음 내용에 나왔다.
- 죽음의 순간, 모든 걸 내려놓자 그제야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왔다.
- 이 육신의 수명을 아득히 늘릴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지만 부질없었다. 그를 위해선 격이 높은 존재의 육신이 제물로 필요했다. 지금의 다 죽어가는 육신으로는 제물을 구하긴 커녕, 간신히 펼친 결계 속에서 생명만 부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어찌 이리도 얄궂은 운명인가.
- 영원한, 완전무결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이곳에 속박되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더라도 언젠가 이곳을 찾아낼 누군가를 기다리겠다. 영겁의 시간이 흐르더라도 난 사라지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제물이라니······ 그래서 나를 보고 놈이 기뻐서 날뛰었던 건가?
제왕의 혼 때문인지 놈의 눈에는 내가 격이 높은 존재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 다음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갈수록 엉망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을 혼자 갇혀있어서 그런지 정신이 점점 망가지는 게 글에서 보였다.
내용을 전부 훑어본 나는 책을 덮었다.
'별 건 없네.'
그냥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곳은 지도에 적혔던 장소가 아니었고, 이 엔피루스라는 놈은 던전의 제작자가 아니었다.
나는 아주 우연히, 재수 없게도 미친 고대의 마법사가 봉인된 장소를 원래 찾던 던전 대신 발견한 것이었다.
'······뭔 미친 우연이냐, 이게.'
게임에 빙의되면서 나 무슨 패널티라도 받았나?
스탯창이라도 볼 수 있으면 행운 스탯이 -99로 표시되어있는 거 아니야?
초재생을 찾을 때도 그렇고, 부동 장막을 찾을 때도 그렇고, 어째 신비를 찾으려 할 때마다 순조롭게 가는 일 없이 위기가 터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한 번 속으로 욕을 뇌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기에서 놈이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겠다고 적었으니 찾아봐야 유물 같은 게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통로를 나가 다른 곳도 더 돌아다니며 둘러봤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저 이 지하 공간이 내가 머물던 군주성에 못지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넓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이다. 이만큼이나 거대한 공간이 이 숲에 통째로 묻혀있던 건가.
나는 허무함을 느끼며 아셸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나가지."
***
밖으로 빠져나가자 어째서인지 레일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얘는 또 어디 갔어?'
볼일이라도 보러 간 건가 싶어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뭐에 습격이라도 당했다기엔 주위에 전투의 흔적 같은 건 아무것도 없이 들어갔을 때 그대로였다.
내 명령을 받고 주위를 둘러보고 온 아셸이 말했다.
"특별한 흔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설마 튀었나.'
그렇게밖에 여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셸의 실력을 보고 겁을 먹어서 그냥 내뺀 걸지도.
유적을 함께 목격했으니 우리가 죽여서 입을 막으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니까.
'돌아가는 길이야 복잡하지도 않았으니 상관없지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결국 진짜 테이르가 발견했다는 던전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는 아쉬웠기에 더 찾아보기로 했다.
나뭇가지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이동했다.
꽤 한참이 지나 또 다른 야광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야광수는 꽤 커다란 바위에 바짝 붙어서 솟아있었는데, 그 주위에는 수풀이 가득했다.
나는 설마 싶어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봤다.
무성한 수풀을 살피자 바위와 지면 사이에 있던 작은 통로가 드러났다.
"······."
나는 그 통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셸도 가까이 다가와서 통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씨발······.'
욕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가 간신히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이걸 놔두고 쓸데없는 걸 찾아서 그 개고생을 했단 말이지.
콰아앙!
아셸을 시켜 통로를 넓히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좁게 이어진 복도를 지나서 넓은 공간이 나타나자, 중앙에 목각인형처럼 나무로 된 거인들이 우두커니 서있는 게 보였다.
【Lv. 48】
놈들의 머리 위에 있는 초라한 레벨을 바라보며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그래, 여기가 맞구만. 테이르가 발견했다는 던전이.
곧 놈들의 눈에 푸른 안광이 피어오르더니, 옆쪽의 벽면에 고대어로 된 문자가 빛나며 나타났다.
- 모험자여, 시련을 맞이하라.
- 시련을 극복하고 이 던전에 숨겨진 나의 유산을 차지하라.
- 가디언들을 피해 각각의 가장자리의 있는 마석을 파괴하면 움직임이 점점 느려질 것이고, 모두 파괴하면 멈출 것이다.
나는 공간을 둘러봤다.
그 말대로 공간의 가장자리의 벽면엔 각각 마석들이 박혀있었다. 저 마석들을 전부 파괴하는 게 던전의 클리어 조건인 모양.
쿠웅.
이내 가디언들이 움직이며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아셸."
"예."
"치워라."
콰아아앙!
아셸의 일격에 가디언들이 전부 쓸러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