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감각 (3)
"어? 저 나뭇가지에만 잎사귀가 하나도 없네요. 신기하네."
레일로도 이마에 손바닥을 붙이고 휑한 가지를 바라봤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겼다.
'생명 없는 가지.'
그게 의미했던 건 바로 저 나뭇가지였던 모양이다.
아니고서야 달리 뭐가 있겠나? 저건 우연이라기엔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근데 저런 게 어떻게 가능하지?'
그저 나무의 유전적 특성인지, 아니면 암호를 남긴 던전의 제작자가 이 나무에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건지.
딱히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넘어갔다.
그보다 저게 생명 없는 가지라면, 던전을 찾는 가장 결정적인 힌트라는 뜻이었다.
암호에 생명 없는 가지가 모험하는 자들을 인도하리라, 라고 써져있다고 했으니까.
"······."
나는 빤히 나뭇가지를 올려다봤다.
가만히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뭘 어떻게 인도해준다는 거야?
혹시 저걸 자르면 가지가 훨훨 날아다니면서 길 안내라도 해주는 건 아닌가······ 라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이 순간 떠올랐지만, 아무리 여기가 판타지 세계라도 그건 아닌 것 같고.
'······방향? 방향인가?'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해봤다.
혹시 그냥 나뭇가지가 뻗어있는 방향으로 이동하라는 건가.
아리송했지만 달리 생각나는 것도 없었기에 일단 이동해보기로 했다.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면 되고.
나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쪽으로 이동한다."
그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듯한 그녀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나으리, 생명 없는 가지라는 게 혹시 저걸 말하는 게 아닙니까? 잎사귀가 하나도 안 달렸으니 의미가 얼추 연결되는데요?!"
"······."
참 빨리도 알았다.
던전 탐사도 꽤 해봤다더니 얘는 어째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나뭇가지가 뻗어있는 방향을 향해서 나아갔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넘어가서 어둠이 숲에 내려앉았다.
발광성을 꺼내들고 걸으며 나는 주위를 유심히 살펴봤다. 어디에 던전의 위치를 암시하는 흔적이 있을지 몰랐으니까.
몇십 분쯤 이동했을까, 확실히 눈에 띄는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나무들 사이에서 홀로 잎사귀를 희미하게 빛내며 존재감을 뿜어내는 한 그루의 나무.
'······야광수?'
레일로도 그걸 발견하고서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야광수네요. 웬만해선 보기 힘든 건데 이 숲에도 있었네."
야광수는 그 명칭대로 밤에 빛을 뿜어내는 나뭇잎을 가진 나무였다. 반딧불처럼.
정확히 우리가 이동하고 있던 경로에 위치해있었기에, 뭔가 흐릿하게 감이 왔다.
'설마 저건가?'
황혼이 가라앉은 때, 밤이라는 시간대가 암호에 굳이 끼어있던 이유.
그건 다르게 해석하면 밤에만 특정해서 볼 수 있는 무언가가 던전으로 향하는 힌트라는 뜻이다.
그리고 야광수는 밤에만 이렇게 빛을 뿜어내는 나무였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팍팍 연결되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야광수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음······.'
그래서 뭐지?
생명 없는 가지가 향하는 방향으로 이동했고, 덩그러니 놓여있는 야광수를 발견했다. 여기서 이제 더 뭘 어쩌라는 걸까.
나는 레일로에게 물었다.
"뭔가 좀 알겠나?"
"네?"
"가장 거대한 나무, 황혼이 완전히 가라앉은 때, 생명 없는 가지가 모험자들을 인도하리라. 그래서 그 멘그로디 나무의 가지가 향하는 쪽으로 이동했더니 이 야광수가 나온 거다. 아무래도 던전으로 향하는 이정표인 것 같은데, 뭐라도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말해봐라."
레일로가 멍청한 표정으로 서있다가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그보다 이게 왜 던전으로 향하는 이정표라는 겁니까?"
"밤 시간대에 달리 눈에 띄는 게 이것 말고 또 뭐가 있겠나?"
다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퍼뜩 놀라는 그녀였다.
"과연, 그런 거군요! 좀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지 그랬습니까."
"······정말 던전 탐사를 여러 번 해본 게 맞나?"
"저야 몸 쓰는 걸 더 잘하고, 이런 머리 쓰는 건 다른 동료들이 잘했어서 말입니다."
"동료들은 지금 어디에 있고?"
"유물 하나 찾아서 한탕 크게 해먹은 다음에 전부 은퇴했습니다. 저야 모험가가 천직이라 계속 활동하고 있지만."
그런 사연이.
아무튼 레일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듯했다.
별로 기대는 안 하지만 아셸에게도 물었다.
"뭘 좀 알겠나?"
아셸이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아닙니다."
그러나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젓는다.
사람 열받게 하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가 말을 하다가 끊어버리는 건데.
"괜찮으니 말해봐라."
내가 재촉하자 그녀가 마지못해서 다시 말했다.
"유적이라는 건 대부분 지하에 위치해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고대부터 현대까지 긴 시간 이래, 지하보다는 지상에 있는 유적들이 더 눈에 띄니 더 많이 발굴됐으니까. 단순한 이유였다.
"그러니 이 나무 바로 아래에 유적이 숨겨져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지극히 단순한 의견이었다.
근데 뭐지? 왠지 좀 설득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에이, 그건 좀.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 무식하게 숨겨놨겠습니까?"
레일로가 껴들어서 말했다.
내 이성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지만 직감은 아셸의 의견 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아셸에게 명령했다.
"나무 바로 앞쪽을 깊게 파보도록. 멈추라고 할 때까지."
"예."
그리고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멀뚱히 서있는 레일로에게도 아셸이 물러나라고 손짓을 했다.
옆으로 온 레일로가 황당하다는 듯 날 쳐다봤다.
"진짜 하시겠다고요?"
"달리 떠오르는 것도 없으니까."
"아니, 얼마나 깊게 파시려는 건진 모르겠는데 대체 어느 세월에······."
콰아이앙!
귀를 강타하는 폭발음에 레일로가 깜짝 놀라서 다시 앞쪽을 돌아봤다.
아셸이 주먹으로 강타할 때마다 지면이 터져나가며 순식간에 땅이 파이고 있었다.
레일로가 입을 쩍 벌리고서 그 터무니없는 광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땅을 파고 있던 아셸이 돌연 구덩이 위로 훌쩍 뛰어올라서 말했다.
"무언가 석벽 같은 게 나왔는데, 안쪽에 공간이 있습니다."
"······석벽?"
나는 구덩이로 가까이 다가가서 발광석을 대고 아래쪽을 살펴봤다. 깊게도 팠네.
어두워서 잘 안 보이진 않았지만 아셸의 말대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석벽이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이게 진짜였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던전을 만든 놈은 이걸 진짜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만든 건가?
내가 찾아놓고도 테이르는 이걸 대체 어떻게 찾았나 신기할 정도였다.
"······?"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뭔가 좀 앞뒤가 안 맞지 않나?
지금 아셸이 판 구덩이의 깊이는 어림잡아도 몇 미터는 훌쩍 넘었다.
그러니까 테이르는 아셸처럼 혼자 이 정도 깊이를 파내서 저걸 발견했다는 건데······ 말이 되나?
"······."
무언가가 어긋난 것 같은 묘한 이질감을 느껴졌지만, 일단 들어가봐야겠지.
나는 레일로에게 말했다.
"다녀올 테니 기다려라."
"······아, 네."
그녀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셸의 괴력을 봐서 그런지 말투가 조금 공손해진 느낌이었다.
나는 구덩이 아래로 그대로 뛰어내렸다.
꽤 높은 높이였지만 문제는 없었다.
부동 장막을 공중에서 사용하면 내 몸이 허공에 그대로 고정된다는 사실은 진작 확인했다.
한마디로 떨어지는 도중에 사용하면 낙하하던 힘이 사라지기에 착지에도 활용할 수 있었다.
터억.
착지하기 직전에 부동 장막을 사용하여 나는 안정적으로 석벽 위에 내려섰다.
아셸이 서있는 곳에 석벽에 뚫린 구멍이 있었다.
발광석을 가까이 대니 그녀의 말대로 안쪽에 공간이 있는 게 보였다.
"들어가지."
"예."
내 말에 아셸이 먼저 석벽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바닥의 높이를 확인한 뒤 이어서 나도 뛰어내렸다. 그리고······.
"······."
나는 조금 벙쪄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둘러봤다.
석벽 안쪽에는 놀랍게도 굉장히 넓은 공간이 펼쳐져있었다. 전혀 짐작하지 못한 스케일이었다.
또한 굉장히 인공적이었다.
마치 어느 비밀 조직의 지하 소굴처럼 반듯하게 깎인 벽면과 통로, 그리고 힘이 거의 다한 듯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발광석들.
'대체 뭐야, 여긴?'
아무리 봐도 보통 던전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던전이 맞긴 한가?
마음속에 피어오른 이질감이 점점 강해지는 걸 느끼며, 일단 앞으로 난 통로를 따라서 이동했다.
통로는 무척이나 길었다. 또 이리저리 구불구불 꺾이기도 했고, 여럿으로 나눠지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끝에 우리는 어떤 공동 같은 공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제단?'
처음 보자마자 떠오른 건 그 생각이었다.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붉은 석재로 된 구조물.
그 주위의 벽과 천장과 바닥엔 마법진과 괴상한 문자들이 한가득 새겨져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에는 금세 신경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 괴상한 구조물 한가운데의 마법진에 '무언가'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낡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일단은 사람의 형태로 보이는 무언가가.
그걸 발견한 순간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본능적으로 치솟아오름과 함께, 눈을 의심케 하는 숫자가 시야에 비쳤다.
【Lv. 97】
······저게 대체 뭐야, 씨발.
제대로 엿 됐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이곳은 결코 테이르가 신비를 찾았다는 던전 따위가 아니다.
옆에서 긴장한 얼굴로 검자루를 쥔 아셸에게 빠져나가자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번쩍!
보랏빛의 광선이 번쩍였다.
뭘 반응할 새도 없이 광선에 직격당한 아셸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
나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셸은 벽면에 처박혀서 미동도 없었다. 설마 죽었나 싶었지만, 레벨이 보이는 걸 보니 그냥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천천히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웃음소리.
"크흐······ 흐핫, 흐하하핫······!"
로브의 괴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웃음이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왔구나, 드디어 온 것이로구나! 결국 운명은 날 저버리지 않은 것이야!"
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입고 있던 로브가 부스러지며 흩날렸다.
그리고 드러난 녀석의 몸은······ 그저 기괴했다.
피부는 먹물처럼 검었고, 그 위로 선명히 솟아있는 핏줄은 새하얀 색이었으며, 눈은 핏빛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피잉!
곧바로 등에 메고 있던 활을 빼내서 화살에 피를 묻혀 겨냥하고 쐈다.
하지만 화살은 어느새 놈을 휘감은 방어막에 막혀서 맥없이 튕겨나갈 뿐이었다.
나는 큰 낭패감을 느끼며 활을 내리고서 입을 열었다.
"······넌 뭐냐."
한참을 웃던 괴인이 웃음을 그치고서 말했다.
"엔피루스 데이마, 영원을 꿈꾸는 마법사."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오, 이런. 내 이름이 잊혀졌을 정도면 바깥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건지 감도 안 잡히는군."
놈의 레벨은 97. 대군주 라샤테인과 비교해도 1레벨 차이밖에 나지 않는 괴물.
목숨이 지척에 달렸다.
아셸은 쓰러졌고, 즉살 능력은 놈에게 닿지가 않는다.
나는 평정을 유지하며 놈을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우리를 공격한 이유는 네 영역에 침범해서인가?"
"침범? 흐하핫! 그 반대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누군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나?! 이 작은 마법진 밖으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채, 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육신만 간신히 유지하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다만 놈이 고대의 마법사이며, 어떤 이유로 이곳에 굉장히 오랫동안 갇혀있던 신세라는 건 방금의 말들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이곳에 찾아온 나의 존재에 굉장히 기뻐하고 있다는 것까지.
푸욱!
"······?!"
다시금 빛이 번쩍였고, 배가 화끈했다.
이어서 몰려온 격통과 함께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나는 무릎을 풀썩 꿇었다.
"컥······."
완전히 통째로 뜯겨나가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옆구리를 내려다봤다.
공격에 아예 반응하지 못했기에 부동 장막을 발동할 틈도 없었다.
그때 의문에 찬 듯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어냐, 넌? 영혼의 격은 그리도 높으면서 왜 이런 공격 하나 막지 못하는 거지?"
꿀렁!
나한테서 흘러나온 피가 공중에 둥둥 뜨더니 놈에게로 이동했다.
이내 환희에 찬 목소리가 공동을 가득 메웠다.
"뭐, 아무렴 됐나. 너 정도로 격이 높은 존재의 피라면 내 육신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가 드디어 다시 세상에 나설 수 있단 말이다! 흐핫! 흐하하하하!"
귓가에 웅웅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놈은 내게서 뺏어간 피를 온몸으로 빨아들여 게걸스럽게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놈의 육신엔 활력이 도는 것처럼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고, 주위에 거대한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고통으로 정신이 아찔했지만 그 광경을 보며 나는 큭큭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피를 전부 마시고서 고양감에 찬 얼굴을 하고 있던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그리 웃긴 것이냐?"
간신히 입을 열고 목소리를 짜냈다.
"알아서 처먹어줘서······ 고맙다."
"뭐?"
"죽어."
풀썩.
괴인의 몸이 쓰러지며 공동을 채운 기운이 일시에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