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29화 (29/189)

초감각 (2)

날이 밝고 우리는 빌페크 시를 떠났다.

5군주령과 4군주령의 북서부 경계에 있는 이름 없는 숲으로.

'이번에도 던전인가.'

마차에서 생각에 잠긴 채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이번에도 신비가 숨겨져있는 장소는 아마 던전일 것이었다. 테이르가 그리 말했으니까.

유적과 던전의 차이는 위험 요소가 있냐 없냐의 차이였다.

얌전히 보물만 숨겨져있으면 유적이고, 가디언이나 함정 같은 위험도 있으면 던전이었다. 저번 부동 장막을 찾을 때처럼.

이번에 찾아야 할 던전은 내게 있어 아예 정보가 없는 장소였기에 위험이 미지수이기도 했다.

'테이르도 결국 던전을 돌파하고 신비를 찾았다는 소리니까, 그리 위험한 던전은 아닐 것 같지만······.'

전에 봤을 때 테이르는 고작 20레벨대에 불과했으니 던전의 수준도 그 정도일 확률이 높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결국은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확실한 건 없었지만 말이다.

'그보다 아직 찾지도 못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네.'

위험도는 둘째치고, 일단 암호를 해석해서 던전을 찾는 것부터가 문제인데 말이다.

시간이 흘러 5군주령의 북서부 변경에 위치한 오론 시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꽤 이른 낮에 도착했기에 숙소를 잡고 바로 모험가 길드로 이동했다. 길잡이 고용을 위해서.

숲에서 가장 큰 나무라고 표현했으면 그만큼 눈에 띌 정도로 크다는 소리니까,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 않을까 싶었다.

길드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홀은 넘쳐나는 모험가들로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들을 한번 슥 둘러본 다음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조건에 맞는 가장 실력 좋은 길잡이를 10골드에 고용하겠다."

뚝.

거짓말처럼 소란이 멎고 시선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향했다.

모두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나는 다시 말했다.

"10골드에 길잡이를 고용하겠다. 북서부 경계의 숲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를 알고 있는 자가 있나?"

어째 길잡이를 고용할 때마다 돈지랄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뭐, 돈이야 넘치도록 있고 제일 효과적인 방법인데 아무렴 어떤가.

모험가들이 서로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말소리가 하나둘씩 흘러나왔다.

"······멘그로디 나무 말하는 거 아냐?"

"맞는 것 같은데. 북서부 숲에서 가장 큰 나무가 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어."

반응들을 보니 알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나무였던 모양.

잘 된 일이었다. 적어도 나무를 찾는 데는 애먹지 않겠네.

"······절 고용해주십시오! 멘그로디 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제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곧 한 모험가가 손을 들고 외쳤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모험가들도 하나둘씩 끼어들었다.

"지랄하고 있네, 이 도시 모험가들 중에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제가 저 녀석보다는 실력이 훨씬 뛰어납니다! 최대한 신속하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안내해드릴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고용 경매장이라도 열린 분위기가 되서 카운터의 직원들이 당황한 게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속으로 약간의 미안함을 전했다. 이거 너무 개판을 벌였나.

그때 위쪽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다들 닥쳐! 가장 실력 좋은 모험가를 고용하겠다고 하셨잖냐!"

마치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에 난리를 피우던 모험가들의 입이 일제히 다물어졌다.

나는 위층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누군가 난간을 훌쩍 뛰어내려 밑으로 내려왔다.

【Lv. 41】

허리춤에 여러 자루의 숏소드를 메고 있는, 드러난 맨살 이곳저곳에 상처 자국이 가득한 수인족 여인.

"나으리, 제가 여기선 가장 실력이 뛰어나니 절 고용하시죠."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험가 중에서 40레벨이 넘는 수준의 인재는 상당히 드무니까. 특급의 모험가인가?

"아니, 레일로 씨······ 지명 의뢰 받을 것도 넘쳐나면서 이런 의뢰까지 가져가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한 모험가가 불만 어린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녀가 홱 시선을 돌려 노려보자 곧바로 깨갱하며 수그러들었다.

"뭐, 병신들아. 불만이면 나보다 실력이 좋던가. 그딴 실력들로 길 안내 한 번 하고 10골드나 받겠다고? 양심이 다 뒈졌냐?"

그에 더 나서서 불만을 내뱉는 모험가들은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한숨을 내쉬며 포기한 듯 돌아설 뿐.

거친 언사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받는 의뢰금이야 다 실력이랑 비례하는 거지.

내게로 다시 시선을 돌린 그녀가 조금 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특급 모험가인 레일로입니다. 이 오론 시에서 저보다 실력이 뛰어난 모험가는 없으니 고용해도 후회는 없으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돈을 꺼내들었다.

"선금은 일단 절반이면 되겠지?"

금화 다섯 닢을 건네받은 레일로가 씩 웃었다.

"화끈하시네요. 출발은 언제 하실 생각입니까?"

"가능하면 지금 바로."

"좋습니다. 그럼 바로 가시죠."

그렇게 꽤 실력이 좋은 길잡이를 빠르게 고용했다.

***

숲은 도시에서 꽤나 거리가 떨어져있었기에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레일로 한 명만 태우면 됐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이야, 겉보기엔 평범하던데 이거 상당히 고급 마차네요? 흔들림이 이 정도로 적은 마차는 처음 타봅니다."

반대편 자리에 앉은 레일로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했다.

옆자리에는 아셸이 언제나처럼 묵묵히 앉아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항상 무표정인 아셸이었지만 계속 보다 보니 저것도 약간의 미약한 차이가 있다는 게 구분이 됐다.

지금은 시끄럽게 구는 레일로가 거슬리는지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인 게 느껴졌다.

"아, 너무 소란을 피웠네요. 죄송합니다."

그녀도 눈치는 있는지 곧 얌전해져서 창밖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시 뒤에 내게 물었다.

"한데 멘그로디 나무는 왜 찾으시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걸 이제야 묻는 건가.

의뢰인의 누구인지, 또 의뢰의 목적은 뭔지, 그런 걸 확인할 거면 보통 의뢰를 받기 전에 확인하는 게 보통일 것이었다.

아니면 어떤 위험한 일에 휘말릴 줄 알고 아무 의뢰나 덥썩덥썩 받겠나.

이 레일로라는 모험가는 그만큼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레벨을 보면 그럴 만했지만.

나는 적당히 둘러대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생각해보니 이번에는 굳이 숨길 이유가 있나?

어쩌면 던전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딴 마음을 품어봤자 아셸이 있고.

"던전을 탐험해본 적이 있나?"

내 뜬금없는 물음에 레일로가 대답했다.

"몇 번 있죠. 그건 왜 물으십니까?"

"멘그로디 나무로 향하는 것도 던전을 찾기 위함이니까."

"아······ 역시 그러셨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대충 감이 오긴 했습니다. 좀 뜬금없는 장소로 길 안내를 의뢰하는 나으리들이면 유적을 찾는 게 대부분이죠."

이런 종류의 의뢰도 꽤 많이 맡아본 듯한 어투였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 멘그로디라는 나무와 관련해서 생명 없는 가지라 불리는 무언가가 있나?"

"······생명 없는 가지요? 글쎄요, 그런 건 처음 들어봅니다만."

레일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흥미롭다는 기색이 되었다.

"근데 그게 던전으로 향하는 암호인 모양이군요? 암호가 있는 던전이 찾는 재미가 쏠쏠하긴 하죠."

그렇게 말하고는 생명 없는 가지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휙휙 머리를 털어버렸다.

"아무튼 던전 찾기라면야 일이 훨씬 재밌어지네요. 나무까지 안내한 다음에 저도 계속 껴서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의뢰금을 더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상관없지만 던전을 찾으면 내부 탐사까지 함께할 생각은 없다."

그 말에 레일로가 킥킥 웃었다.

"제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 만큼 추가 수당이나 얹어주십쇼. 그리고 솔직히 별로 기대도 안 합니다. 백에 아흔아홉은 꽝인 게 유적 찾기인데요, 뭘."

그건 그렇지.

신비 찾기에 연신 성공해서 그런지 나도 좀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던전이라는 게 사실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

숲에 도착한 뒤에는 마차에서 내려 이동을 시작했다.

바로스는 마차를 지켜야 했기에 숲에 초입에 두고 나와 아셸만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레일로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웃기지 않습니까?"

"······?"

"던전이라는 게 고대의 마법사들이 자기들 유산을 남겨둔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근데 그럼 그냥 자기들 제자한테나 멀쩡히 넘겨서 계승하지, 던전 같은 걸 만들어서 찾아오는 불나방들을 죄다 죽이는 건 무슨 더러운 심보인지 원."

글쎄, 그럼 유지를 이을 제자가 없는 마법사들이 만든 게 아니려나.

아니면 괴팍한 마법사들이 그냥 심심해서 만들었거나.

애초에 게임의 설정일 뿐이니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뒷배경이야 적당히 붙이면 그만이고, 오히려 RPG에 던전이 없으면 그게 이상하잖아.

숲 안쪽으로 더욱 깊게 들어가자 슬슬 몬스터들이 출현했다.

덩치가 사람보다도 더 큰 거대 쥐가 앞길을 막아서고 나타났다. 자이언트 랫인가.

이 숲에선 어떤 종류의 몬스터들이 출현하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이름도 없는 평범한 숲에 어떤 몬스터들이 출현하는지까지 다 꿰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아으, 안 그래도 찌뿌둥했는데."

레일로가 목을 뚜둑거리며 자이언트 랫에게 다가갔다.

찌직!

놈이 듣기 거슬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덤벼들었다.

동시에 발을 박찬 레일로가 검을 뽑지도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펑.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멀찍이 튕겨나간 자이언트 랫은 머리가 그대로 박살나서 죽어버렸다.

조금 상쾌해진 얼굴로 주먹을 털어낸 레일로가 말했다.

"계속 가시죠."

그 뒤로 다른 몬스터는 거의 마주치지도 않았다. 마주친다고 해도 고작해야 자이언트 랫처럼 10레벨 정도의 잡몹들뿐.

'애초에 몬스터가 많이 서식하지 않는 모양이네.'

해가 저물 즈음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애초에 그리 큰 숲이 아니었기에 별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자, 이게 멘그로디 나무입니다."

나는 눈앞의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보며 조금 감탄했다.

숲에서 가장 큰 나무라니 클 줄은 알았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키는 수십 미터는 되겠고 둘레도 열 사람이 손에 손 잡고 서야 겨우 두를 정도로 넓었다.

잠시 나무의 겉면을 만져보다가 하늘에 저물고 있는 해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해가 지고 있긴 한데······.'

가장 거대한 나무, 황혼이 완전히 가라앉은 때, 생명 없는 가지.

이번 던전 찾기의 세 가지 키워드였다.

가장 거대한 나무는 완전히 확실치는 않지만 찾았고, 시간도 이제 곧 밤이고, 남은 건 '생명 없는 가지'뿐인데······.

'생명 없는 가지라는 게 대체 뭐냐고.'

시선을 올려 멘그로디 나무에서 어지럽게 뻗어있는 가지들을 바라봤다.

내가 그러고 있자 아셸과 레일로도 가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문득 아셸이 입을 열었다.

"저기, 저걸 보십시오."

그녀가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별 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저기에 뭐가 있다는 거······.

"······!"

나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성한 나뭇가지들 속에 섞여있는 나뭇가지 하나.

하지만 자세히 보니 달랐다. 왜냐면 그 나뭇가지에만 나뭇잎이 하나도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 없는 가지라는 게 설마?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