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28화 (28/189)

초감각 (1)

머릿속이 하얗게 물든다.

콜튼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옆에서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 미동도 없이 엎드려있는 라이카.

방금 그가 대체 뭐라고 한 거지?

'······군주?'

대체 누가? 저 남자가?

잘못 들은 거리라 믿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명백히 그것을 부정했다.

의자에 앉은 7군주가 다리를 꼬고서 홀에 있는 사람들을 슥 둘러봤다.

그를 데리고 와서 당당하게 서있던 기사들도 얼어붙은 채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이윽고 콜튼도 서서히 사색이 되었다.

숨 막히는 고요함 속에서,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받아들이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근에 칼데릭 전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7군주좌의 새로운 주인.

······그 7군주가 눈앞에 있는 바로 저 남자였던 것이다.

바로스가 조심스레 7군주의 눈치를 보고서 물었다.

"한데, 행정관께선 어째서 빌페크의 시장과 이 자리에 함께 있으신 겁니까?"

마치 너의 결백을 증명하라는 듯 압력이 가득한 어투였다.

그러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목이 떨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라이카는 전신을 휘감아오는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관련된 행정 문제로 5군주령의 도시들을 차례로 들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시장과 함께 있던 건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인데······ 딸을 모욕한 이들을 저택으로 불러오겠다고 하기에 상황을 지켜보고자 호기심에 그를 따라서 나왔습니다. 군주님께서 이 도시에 계실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실제로도 라이카는 정말로 억울했다. 그 역시 상황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빌페크에서 잠시 휴양을 즐기고 있던 그에게 있어 이 상황은 날벼락이었다. 아니, 날벼락도 아닌 재앙이었다.

단지 7군주의 얼굴을 알기에 보자마자 그나마 생존 본능으로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 뿐이다.

뜬금없이 7군주가 군주성을 떠나 이 도시에 있었을 줄을, 그리고 덴브리의 영애와 시비가 붙었다는 상대가 그였을 줄을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그 의문을 7군주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라이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바짝 엎드리는 것.

바로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찌 됐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며 유희로 즐기려 했다는 게 아닙니까."

"그, 그것이······."

라이카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이게······ 어······?"

한편 여전히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덴브리가 콜튼을 돌아봤다.

바로스가 시선이 이번엔 그런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군주께서 자비롭게도 그냥 넘어가셨기에 덴브리의 망발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미 한 번의 관용을 베풀어주셨는데도 감히 기사들을 시켜 이곳까지 불러왔단 말인가?

"시장, 계속 그렇게 서있을 것이오?"

퍼뜩 정신을 차린 콜튼이 덴브리의 어깨를 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20년이 넘도록 별 탈 없었던 시장 인생에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억지로 함께 무릎을 꿇린 덴브리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태어나서 한 번도 무릎이라는 걸 꿇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하지만 완전히 혼이 빠져나간 콜튼의 표정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죄송······ 합니다, 7군주님."

7군주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할 말을 해보라고 했을 텐데, 무릎을 꿇고 뭘 하는 건지."

"죄송합니다. 감히 위대하신 분을 몰라뵙고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시장."

7군주의 목소리가 한층 서늘해졌다.

"부른 용건을 말하라고 했다. 계속 앵무새처럼 그러고 있을 건가?"

콜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 말할 있겠는가? 감히 딸아이를 능멸한 건방진 놈에게 죗값을 치루게 할 생각이었다고.

이미 다 알면서 제 입으로 내뱉도록 물어보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죽는다.'

정말로 죽는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가문이 멸문할 수도 있었다. 7군주가 그렇게 하려 한다 해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후에 소식을 들은 5군주는? 멋대로 자신의 군주령에서 난리를 치고 시장을 죽였다고 격노할까?

아니, 사정을 들으면 그렇구나 하며 신경도 쓰지 않겠지.

칼데릭에서 군주란 그런 존재였다.

같은 군주 외에는 누구도 감히 눈높이를 같이 할 수 없는, 기어오르려 들었다가는 얼마나 높은 직위를 지녔든 벌레처럼 짓밟혀 죽는.

콜튼은 대답하는 대신 바닥에 머리를 쾅 처박았다.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모두 딸아이를 잘못 키운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 죗값은 부디 저만으로······!"

쾅쾅쾅!

미친 사람처럼 이마가 다 깨져서 피가 흘러도 연신 머리를 처박는 콜튼의 모습을 보며, 옆에 있던 덴브리도 덜덜 떨었다.

빌페크에서 황제와 다름없던 아버지가 이러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둥벌거숭이처럼 살아온 그녀라도 군주라는 존재의 위상이 칼데릭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모르진 않았다.

"시장, 멈추시오. 감히 군주님 앞에서······."

미간을 좁힌 채 말하던 바로스가 바로 말을 끊고 뒤로 물러났다.

7군주가 이제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짓을 했기 때문이다.

"시장."

"······."

"세 번째 말하는 것이다. 날 왜 이곳에 불렀는지 이유를 설명해."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듯, 7군주의 목소리는 무심하면서도 공포스러웠다.

그제야 콜튼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이 괴물에게는 어떠한 감흥도 줄 수 없음을. 최선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하고, 그나마 편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뿐임을.

"······딸아이를, 모욕한 이가 있다고 들어서 데려와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7군주가 말했다.

"자세한 상황은 제대로 전해들었나?"

"······예."

"말해봐라."

"딸아이의 드레스에 종업원이 마실 것을 쏟았고, 그래서 딸아이가 종업원을 교육하는 중······."

"교육이라. 고작 옷에 얼룩이 진 것 따위로 그리 사정없이 폭력을 휘두른 게 교육이란 말이지."

"······."

"심지어 말리는 사람의 손목까지 베어버리려 들더군. 그게 교육이라면, 지금 상황에선 내가 무엇을 해야 적절한 교육이라고 생각하나? 변경 도시의 시장이 기사들을 시켜 반강제로 군주를 끌어온 이 경우에 말이야."

콜튼이 몸을 움찔 떨었다.

7군주의 시선이 덴브리에게로 향했다.

"가랑이 사이를 기지 않고는 두 다리로 못 걷게 만들겠다고 했던가. 평생에 처음 들어본 말이라 재밌긴 했어."

엎드려있는 콜튼과 라이카의 안색이 더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그런 말까지 지껄였단 말인가?

덴브리가 공포를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군주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7군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군주의 영역에서 소란을 피우기 싫어 넘어간 일을 여기까지 잘도 키웠군."

"정말, 정말로 죽을 죄를······."

"생각에 변함은 없다. 이런 우습지도 않은 일에 소란을 키우기도 귀찮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콜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자기 군주령에서 벌어진 일이니 나중에 5군주가 알아서 처리하든가 하겠지."

······그 역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 소식이 5군주의 귓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7군주가 5군주와의 사이가 어떤지 그런 건 관계없었다.

감히 시장 따위가 군주를 조금이라도 모욕했다는 것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당장 7군주가 손을 쓰지 않아도 5군주가 직접 대가를 물어올 건 정해진 미래였다.

7군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은 전부 끝났다는 듯 홀의 입구로 몸을 돌렸다.

바로스가 슥 주위를 둘러보자, 주위에 멍하니 서있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7군주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 같잖은 권력으로 남을 짓밟으며 살았으면 언젠가 이리 짓밟힐 각오도 했어야지. 안 그런가?"

7군주의 말에 콜튼이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7군주와 다른 두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홀에서 출구로 멀어져갔다.

***

저택을 빠져나오는 것으로 나는 시장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꺼버렸다.

그들에게 뭘 처벌을 내리거나 할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니라, 고작 이딴 일에 내 손에 피를 묻히기도 찝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뭘 할 것도 없이, 어차피 이번 일이 5군주의 귀에 들어가면 시장과 덴브리는······ 뭐가 됐든 아주 안 좋게 되겠지. 내가 굳이 그녀에게 말을 전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시간 동안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이번 일의 응보라면 응보겠다.

"음······."

어느새 깊은 밤이 다 된 시간.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테이르에게 받았던 지도를 다시 살펴봤다.

그리고 5군주령 지도와 비교해서 맞춰보며 지도의 위치를 좀 더 자세히 특정해봤다. 바로스의 도움을 받아서.

"5군주령과 4군주령의 북서부 경계에 있는 숲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곳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경로에서 살짝 돌아가기는 하지만 신비를 얻을 수만 있다면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테이르의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이 문자는 뭐지.'

지도의 한편에 써있는 알 수 없는 괴상한 문자들. 암호인가?

이것도 뭔가 목적지와 관련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아, 테이르는 알고 있었을 수 있으니 한번 물어봤어야 됐는데. 지도에 정신이 팔려서 미처 신경을 못 썼다.

문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바로스가 다시 말했다.

"숲, 가장 거대한 나무, 황혼마저 완전히 가라앉은 때 생명 없는 가지가 모험자들을 인도하리라, 라고 써져있습니다."

"······?!"

나는 속으로 놀라며 그를 돌아봤다.

"이걸 읽을 수 있나?"

"예. 고대에 사용했던 암호 문자 중 하나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대답이 돌아왔다.

"예전에 모험가로 활동하며 유적 탐사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어 고대의 문자에 대해선 조금 압니다. 부족한 재주입니다."

"······그렇군."

얘는 진짜 못하는 게 없네.

칼데릭의 지리에 밝은 이유가 저런 과거가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가장 거대한 나무?'

잠시 생각에 잠겨서 문장의 의미를 해석해봤다.

가장 거대한 나무는 숲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라는 거겠고, 황혼이 완전히 가라앉은 때면 밤을 말하는 건가?

근데 마지막의 생명 없는 가지는 뭐야.

"생명 없는 가지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송구하지만 그것까진 잘······."

바로스에게 다시 물었지만 의미에 대해선 그도 감이 오지 않는 듯했다.

아셸에게 시선을 돌리자 조금 멍하니 서있던 그녀가 급히 생각하는 척을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직접 가서 봐야 알려나.'

그럼 일단 그럼 당장의 목표는 정해졌다.

지도에 표시된 숲으로 이동해서 가장 거대한 나무를 찾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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