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26화 (26/189)

테이르 바몬 (2)

내 말에 기사의 동작이 그대로 멈췄다.

금방이라도 식은땀이 흘러내릴 것 같은 표정으로 나와 아셸을 번갈아보다가, 슬쩍 여인을 다시 바라봤다.

"뭐 해! 저 잡놈이 나더러 천박하다고 했다고! 빨리 죽여버리라니까!"

빽빽대며 소리치는 그녀는 상황 파악이고 자시고 반쯤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마치 떼를 쓰는 애새끼나 다름없는 모습.

'어지간하네, 진짜.'

나는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빈말로 들렸다면 검을 뽑아라. 아니면 그 시끄러운 걸 데리고 어서 꺼지고."

기사는 나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결국 검자루에서 손을 뗐다.

직접 아셸과 힘을 겨루고서 실력의 차이는 확실히 깨달은 듯했다.

대신에 입을 열고서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오. 이분께서는 이 도시의 시장님의······."

나는 대꾸하지 대신 아셸에게 손짓을 했다.

그녀가 검자루로 손을 가져가자 기사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

그 모습에 난리치던 여인이 분을 못 이기는 듯 부들부들 떨다가, 기사의 뺨을 후려쳤다.

몇 번이고 거세게 뺨을 때리는 손을 기사는 묵묵히 맞기만 했다.

그렇게 화풀이를 한 여인이 다시 시선을 홱 돌려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너, 진짜로 죽여버릴 거야.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이 도시의 시장이야. 이 도시 전체가 우리 가문의 것이라고."

"······."

"그 천한 혓바닥을 될 대로 놀린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줄게. 내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면서 빌지 않고는 다시는 두 다리로 못 걷게 만들어버릴 거라고."

그러고는 몸을 확 돌려 가게 밖으로 성큼성큼 나간다.

호위 기사도 그녀를 뒤쫓아서 나가고 가게는 조용해졌다. 주위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몰렸다.

'와······.'

저건 진짜 대단하네.

한편으로는 감탄하며 나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바로스도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말씀만 내려주시면 제가 직접 이 도시의 시장을 만나보겠습니다. 저 건방진 계집을······."

"됐다."

엔록도 아니고 다른 군주령에서는 웬만해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내 행방이 다른 군주들한테 드러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쓸데없이 내게 관심을 가지는 놈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근데 이렇게 됐으니 별 수 있나?

끼어들 때부터 일이 귀찮아질 거라는 건 알았다.

저 대단한 망나니를 키워낸 시장이 누군지 내일 직접 얼굴이나 봐볼까 생각하며, 이내 신경을 꺼버렸다.

"괜찮습니까?"

아셸이 쓰러진 종업원을 일으켜주었다.

지켜보고만 있던 지배인과 다른 종업원들이 뒤늦게 미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들에게 넘기고 자리로 돌아온 아셸이 조금 멋쩍은 기색으로 고개를 숙이고서 앉았다.

그때 어정쩡하게 서있던 남자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셸이 나서기 전에 먼저 앞서 끼어들었다가 손목이 잘릴 뻔한 남자였다.

"이야, 감사합니다. 공자님하고 경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하마터면 평생 외수로 살 뻔했네요."

넉살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그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장을 보면 평범한 나그네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그래도 그 미친년의 만행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나선 이였기에 성격은 꽤나 선해 보였다. 나서지 않은 사람을 탓하는 건 아니지만.

'······?'

근데, 잠깐만······.

순간 희미하게 느껴진 익숙함에 나는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봤다.

마치 아셸을 처음 발견했을 때와 같은 그 느낌이다.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남자도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마주봤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예?"

그가 순간 당황한 듯하다가 곧 다시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리안이라고 합니다, 공자님."

리안.

그제야 내 기억 속에서 한 NPC 캐릭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금발의 녹색의 눈동자를 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과 똑같은 생김새의 젊은 남자.

'허.'

나는 속으로 놀라며, 한편으로는 이 기묘하기 그지없는 우연의 만남에 신기함을 느끼며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방금 말한 가명이 아닌 숨기고 있는 진짜 본명을.

'테이르 바몬.'

중립국 어스힐의 버림받은 막내 왕자.

그는 라사 세계관에서 주연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연 중에선 가장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와 관련된 어스힐 중립국의 에피소드는 게임의 메인 스토리 중 내가 꽤나 좋아하는 스토리였으니까.

그래, 지금은 5년 전 시점이니까 아직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칼데릭을 떠돌고 있었나······.

"저······ 요리 나왔습니다."

그때 종업원이 완성된 요리를 직접 들고 쭈뼛쭈뼛 테이블로 다가왔다.

먹음직스럽게 튀겨진 치킨 조각들이 바구니 같은 것에 한가득 담겨서 나왔다.

나는 치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리안이 앉아있던 테이블을 바라봤다가,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물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함께 식사하겠나?"

"······예?"

이건 또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자리에 앉은 아셸과 바로스도 내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은지 의문에 찬 눈으로 날 쳐다봤다.

하지만 맥락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우연히 마주한 이 인연에서 어쩌면 얻을 수 있는 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케인스 가문은 빌페크 시의 시장직을 9대째 연임하고 있는 5군주령의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시장인 콜튼 케인스는 오랜만에 저택을 찾은 귀빈과 함께 조금 늦은 저녁 만찬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즉위하신 7군주께서 곧바로 상단 하나를 뭉개버리셨다는 소문이 있던데······."

콜튼이 넌지시 묻자 중년의 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단이 수작을 부리고 있던 공방의 주인이 군주님과 어떤 연관이 있었던 모양이야. 자세한 사정은 나도 잘 모르네. 뭐가 됐든 상단은 군주성에 완전히 찍혔지만."

"······오싹하군.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 분이신던가? 듣기로는 아예 외부자인 인간이라고 하시던데."

"일개 행정관에 불과한 내가 뭘 알겠나. 나라고 해서 자네보다 뭘 특별히 잘 아는 게 있지도 않네."

그는 업무차 잠시 이곳에 들른 7군주성 소속의 행정관, 라이카였다.

또한 보이듯 콜튼 시장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친우 사이기도 했다.

"상단 일 빼고는 달리 나서서 뭘 하신 적은 없었네. 내가 성을 떠나기 전까지는 무슨 지도를 하루종일 보고 계셨다고 하더군."

"응? 지도라니, 웬······."

"요즘 세인테아와 중립국들 쪽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으니 그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지. 이것저것 다 말하기는 조심스러우니 너무 묻지는 말게."

현재 자리에 그들밖에 없더라도 군주에 대한 건 가벼운 잡담처럼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은 이내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때 식당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콜튼은 씩씩거리며 식당으로 들어오는 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찍 돌아왔구나, 얘야. 야시장을 구경하고 오겠다더니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아들만 셋에 아내가 마지막으로 낳고 세상을 떠난 막내딸은 그에게 있어 귀중한 보물과 다름없었다.

딸, 덴브리가 라이카에게 먼저 인사부터 건넸다.

"두 분의 식사를 방해해서 죄송해요."

라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불쾌했으나 콜튼이 막내딸을 끔찍이 아낀다는 걸 알기에 적당히 넘어갔다.

그녀가 콜튼에게 말했다.

"제가 방금 밖에서 무슨 모욕을 겪고 왔는지 아세요, 아버지?"

"······음?"

"주제도 모르는 천것이 나한테 감히 천박하다는 말을 지껄였다고요! 이 머저리는 검도 못 뽑고 그걸 가만히 보고나 있고!"

콜튼이 표정을 굳히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라이카도 흥미진진하게 변한 표정으로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덴브리 영애가 상종 못할 망나니인 건 이 도시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사실이었다. 한데 그런 그녀가 누군가에게 망신을 당하고 돌아왔다니?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보거라."

그에 덴브리는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을 주르륵 설명했다.

드레스에 마실 걸 쏟은 종업원, 그 종업원을 교육하고 있는데 한 호위 기사가 끼어든 것, 그 기사의 주인이 퍼부은 폭언까지.

설명이 이어질수록 라이카는 조금 황당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고작 그까짓 일로 그런 심한 폭력을 행했다는 걸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콜튼의 표정은 더욱 심각하게 굳은 채였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건 그녀의 행실이 아닌 그녀가 당한 모욕이었으니까.

"그 놈팽이가 누구인지는 아느냐?"

"몰라요. 끽해봐야 어디 구질구질한 가문의 놈이겠죠."

"음······."

"너무 치욕스러워서 죽을 것 같아요, 아버지. 그놈한테 바닥에 머리를 조아려 사과받지 않고서야 살 수가 없어요."

콜튼이 옆에 서있는 호위 기사 제롤드에게 물었다.

"그 기사의 실력이 어떻더냐? 솔직하게 말해서."

"······저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자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콜튼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턱을 쓰다듬었다.

제롤드는 충분히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였다. 그렇기에 막내딸의 호위로 붙여준 것이었고.

그런 그보다 훨씬 뛰어난 기사를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자라면 당연히 평범한 신분은 아닐 것이었다.

이 인근 가문의 귀족은 아닐 테고, 다른 군주령이나 어디 먼 도시에서 온 귀족인가?

"알겠다. 기다리고 있거라."

콜튼의 말에 덴브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느 가문의 놈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도시 안에서는 바로 그가 왕이나 다름없었다.

한데 감히 딸을 모욕한 것도 모자라 베어버리라고 명령까지 했단 말인가?

"어쩔 생각인가?"

"어쩌긴, 내 앞으로 데려와야지."

라이카의 물음에 콜튼은 간단히 대답했다.

일단 저택으로 데려와 직접 얼굴을 보고서 어느 가문의 놈팽인지부터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완만하게 해결해야겠다 싶은 상대면 그리 하고, 아니면 제가 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그자들의 인상 착의가 어땠느냐?"

"흑발의 사내와 호위 기사 쪽은 백발의 여인이었습니다."

콜튼은 곧바로 기사들을 불러 그 두 사람을 찾아서 데려오도록 명령했다.

한편 옆에서 듣고 있던 라이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발의 남자와 백발의 여기사? 그거 어째······.

'내가 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곧 터무니없는 상상으로 치부하고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꽤 신기한 우연이다 싶었다.

말이 되는 소리여야지, 군주성에 계실 7군주께서 뜬금없이 이곳 5군주령에 왜 계신단 말인가.

어쨌든 라이카는 꽤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하며 기사들이 어서 그 겁없는 자들을 데리고 오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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