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25화 (25/189)

테이르 바몬 (1)

선혈이 쏟아지며 오크킹의 머리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머리를 잃고 쓰러지는 몸을 보며 나는 그제야 장막을 거두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던 아셸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면목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됐다."

좀 놀라긴 했지만 덕분에 부동 장막의 방어력은 확실하게 확인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우두머리를 잃은 오크들이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거리는 게 보였다.

굳이 아셸에게 정리하라고 할 것도 없이 놈들은 곧 도망치듯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덤볐다간 싹 몰살당할 상대를 구분하는 지성 정도는 오크들에게도 있을 것이었다.

"휴우······."

옆쪽에 서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모험가들이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로딘도 몸을 추스렀는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내려가지."

이번 신비 찾기도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다.

***

산맥을 내려와 도시로 돌아온 뒤, 모험단에 나머지 의뢰금을 지급했다.

그들은 오히려 은혜를 입은 마당에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억지로 주었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공자님. 부디 나아가시는 앞길에 영광만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정말로 진심 어린 존경이 깃든 눈빛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귀한 포션을 사용해 목숨을 구해준 데다가 이런 거액의 의뢰금까지 퍼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 덕분에 중요한 방어 계열의 신비를 성공적으로 얻었기에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몇백 골드 정도야 정말로 푼돈에 불과했다.

군주성에서 챙겨나온 자금이 지금 내 품 안에 있는 것만 백금화 수십 닢은 족히 됐으니까.

우리는 하루 뒤에 곧바로 도시를 떠났다.

따분한 마차 여행이 다시 시작되고, 다음으로 향할 목적지는 신퇴가 다스리는 1군주령.

그곳에서 얻을 신비에 대해 떠올리며 나는 마차 밖 풍경을 멍하니 구경했다.

그러다 버릇적으로 반대편에 앉은 아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에 어째서인지 미약하게 그늘이 진 듯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

내 말에 아셸이 이쪽을 쳐다봤다.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있었나?"

"아닙니다. 그저······."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조금 더 어두운 기색이 되서 말했다.

"론 님께선 저를 호위로 임명하셨습니다. 하나 제가 호위로서 책무를 계속해서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

"이전에 오크들의 왕을 상대할 때도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또 그 이야기인가?

전에 벨르바고라와 마주쳤을 때도 잠시 나눴던 이야기다.

잡몹들을 처리하거나, 벽을 부수거나, 실제로 그녀는 나에게 없으면 안 될 정도로 굉장히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정말로 강력한 놈들에게는 맞서지 못하니 그게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에 대해서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고지식한 성격은 정말로 어지간했다.

'진짜 성격 귀찮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껍기도 했다.

마치 벽을 상대하던 것 같던 처음의 아셸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꺼내며 나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마음의 거리가 그만큼 좁혀졌다는 뜻 아니겠는가. 아님 말고.

나는 할 말을 고르다가 곧 입을 열었다.

"처음에 너와 만났을 때 말했었지, 너의 능력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고."

"예."

"그건 지금의 네 능력이 아닌 잠재력에 대해 이야기한 것에 가까웠다. 나는 현재의 네 한계를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일과 없는 일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경청하는 아셸에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루터스 산맥의 뱀, 그리고 던전에서 만났던 골렘, 모두 네가 전력을 다해도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지. 그렇기에 나는 아직 네게 실망한 적이 없다. 너는 아직 훨씬 강해질 수 있으니 자책이 아닌 성장을 갈망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나?"

"······."

"물론 오크를 놓쳤던 건 실책이 맞다. 앞으로는 방심하지 말도록."

그녀는 내가 한 말을 곱씹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도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했다.

***

꽤 긴 시간이 흘러 5군주령의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인 빌페크에 도착했다.

마차를 타고 대로를 지나고 있는데 문득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여기 도시에 그 식당이 있었던가?'

게임을 플레이할 때 빌페크 시에는 설정상 굉장히 유명한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식당 이름이 골드 치킨이었나.

그냥 있는 맥거핀 설정은 아니고 신메뉴로 고민하는 셰프에게 재료를 구해주는 서브 퀘스트도 존재했다.

무엇보다 이 식당이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는 이름대로 치킨을 파는 식당이었기 때문이다.

이 중세풍의 판타지 세계의 관념상 튀긴 닭이라는 요리는 상당히 생소하기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한번 들러볼까.'

좀 마음이 동했다.

도시의 고급 여관에 숙소를 잡고서 나는 바로스에게 말했다.

"이 도시에 골드 치킨이라는 레스토랑이 있는지 알아봐라."

5년 전 시점이니까 어쩌면 아직 개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바로스가 식당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얼마 전에 개점하여 도시에서 조금씩 유명해지고 있는 레스토랑인데, 닭을 튀긴 요리를 메인으로 판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바로 여관을 나섰다.

레스토랑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자 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적당히 소란스러운 분위기.

홀을 돌아다니던 종업원이 우릴 보고 밝게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세 분이서 식사를 하려고 오신 건가요?"

창가의 자리를 안내받아 내가 먼저 앉아 아셸과 바로스가 반대편에 앉았다.

이 자리 배치도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슬슬 익숙해졌다.

군주성을 떠나 처음 도착한 도시의 여관에서 식사를 했을 땐 바로스가 감히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없다느니, 옆에 서서 시중을 들겠다느니 귀찮게 굴었었지.

그는 이 여정의 모든 잡무를 맡고 있는 훌륭한 인재였지만, 하나 좀 그런 게 있다면 충성심이 너무 과하다는 것이었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밀며 물었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혹시 저희 레스토랑에 대해 잘 모르신다면 설명을······."

"아니, 괜찮다. 치킨 두 마리로 시키지."

"옙, 알겠습니다. 요리에 조금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중세풍 세계엔, 특히 이런 대도시에는 이런 레스토랑처럼 묘하게 현대적인 구석들도 많이 섞여있었다.

애초에 현대인들의 손에서 만들어진 게임 세계이니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거였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건 그 게임 세계에 들어온 내 처지지.'

아셸은 본래 말이 없고, 바로스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가 없는 상대였기에 음식을 기다리며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어째서 이 세계에 들어왔을까?

그 답을 찾는 일은 현재로서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는 실제로 신이 존재했다.

세인테아의 용사에게 성검을 내려준 라사 세계관의 유일신.

어쩌면, 신이라면 내게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

뭐가 됐든 당장은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했기에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다.

계속해서 살아남다 보면 언젠간 용사도 만나볼 수 있겠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였다.

왜인지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며 한 손님이 들어왔다.

어디 가문의 영애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복장의 여인과 호위 기사였는데, 그녀가 홀을 슥 둘러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배인! 빨리 손님 안 받아?!"

안쪽에 있던 지배인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곤 화들짝 놀라더니, 서둘러 다가갔다.

"어서오십시오, 덴브리 영애님. 저희 가게에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쯧, 더럽게 굼떠가지고는."

여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요새 이 레스토랑의 요리가 그렇게 유명하대서 나들이 나온 김에 손수 맛 좀 보러 왔더니, 내부는 구질구질하니 촌스럽네."

"하하······ 죄송합니다. 고귀하신 영애님을 맞이하기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뭔 당연한 말을 지껄이고 있어? 빨리 제일 좋은 자리로 안내나 해."

······저 망나니는 뭐야?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가게 내부의 분위기가 조용해져있었다.

다른 손님들이 전부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도시에서 꽤나 유명인이었던 모양이다. 덴브리 영애?

'뭐 여기 시장의 딸이라도 되나?'

칼데릭은 전형적인 왕정제인 세인테아처럼 귀족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군주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절대 중앙집권의 구조인데 그를 견제할 귀족 계급 자체가 애초에 의미가 없기도 했다.

다만, 일정 지역마다 도시나 요새를 관리하는 시장이나 사령관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세인테아의 귀족가처럼 가문을 이루고 직위를 세습한다.

형식적인 귀족 계급은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들이 바로 칼데릭의 귀족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 주문해주신 대로 곧 요리를 내오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여인이 다시 한 번 주위를 슥 둘러봤다.

황급히 눈을 내리까는 다른 손님들을 보며 그녀가 조소를 지으며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툭툭 두드렸다.

우월감에 찬 얼굴을 보니 대놓고 그런 반응들을 즐기는 기색이었다.

'꼴보기 싫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녀에게서 관심을 껐다.

진상한테 신경 쓸 것 없이 조용히 이세계의 치킨 맛이나 보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쨍그랑!

그렇게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다시금 소란이 일었다.

이번에도 근원지는 그녀가 있는 쪽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마실 걸 나르던 종업원이 잔을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근데 하필 그게 진상 여인의 근처였다.

입고 있던 드레스에 음료가 튄 건지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내려다봤다.

그리곤 곧 짜증과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이 되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하는 종업원의 얼굴을 우악스레 후려쳤다.

"악······!"

"이 빌어먹을 년이, 미쳤어? 니깟 게 감히 내 드레스를 더럽혀?!"

뺨 한 대로 만족이 안 됐는지 아예 머리채를 붙잡고 쓰러뜨려서 사정없이 발로 짓밟기 시작한다.

그걸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란에 도로 나온 지배인도 안절부절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

진짜 미친년이 따로없다 생각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앞자리에 앉은 아셸의 표정이 점점 굳는 게 보였다.

기본적으로 선한 성향을 지닌 그녀는 저런 불의를 좀처럼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저 일방적인 폭력이 눈에 거슬리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전에 말했었지, 네 생각과 의사를 표현하라고."

아셸이 움찔 놀라며 이쪽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저 종업원을 도와주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라."

내 대답에 아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저, 영애님."

다른 곳에서 먼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석 자리에 앉아있던 한 젊은 남자였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가 쓰러진 종업원의 앞을 슬쩍 가로막고서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히 끼어들어 송구스럽습니다만, 이쯤에서 용서해주시면 이 종업원도 영애님의 관용에 크게 감복할 겁니다. 그러니······."

"넌 뭐야? 안 꺼져?"

여인이 남자를 밀치고 아예 테이블 위에 있던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그걸로 종업원의 머리를 내려치려는 듯.

그에 남자가 깜짝 놀라서 다급히 팔목을 붙잡았다.

터억.

동시에 그녀의 옆에 서있던 호위 기사도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얼마나 세게 쥔 건지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허?"

자신의 팔목을 붙잡은 손을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던 여인이, 곧 서늘한 시선을 남자에게로 옮겼다.

"내 팔을 잡았어? 감히?"

"저, 일단 고정하시고·····."

"제롤드, 이놈 손목 잘라버려."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사는 정말로 명령을 수행하려는 듯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검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이었다.

덥썩!

어느새 기사에게 다가간 아셸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팔을 붙잡힌 기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셸을 돌아봤다.

그리곤 뿌리치려는 듯 힘을 주는 듯이 보였으나······ 그게 될 리가 없었다.

팔이 전혀 미동도 하지 않자 기사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되었다.

"이건 또 뭐야? 이 천한 것들이 미쳤다고 자꾸 끼어들어?"

"······."

"넌 뭐 하고 있는데, 제롤드! 이 정신 나간 년부터 베어버려!"

그러나 기사의 팔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피가 쏠려 완전히 붉게 된 그의 얼굴을 보고 여인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당황하는 듯 싶다가, 시선을 돌려 내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야, 거기 검은 머리! 이거 네 호위 기사잖아! 빨리 안 말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검은 머리가 지금 날 부른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가 않는데, 바로스의 표정이 오히려 험악해졌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가 당장이라도 정령을 소환해 공격을 날릴 것 같았기에 나는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짓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천박하군."

"······뭐? 뭐? 천박?"

"꽁지에 불 붙은 망아지마냥 날뛰는 꼴이 참 천박하다는 거다. 그만 소란 피우고 꺼져라."

그제야 아셸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기사가 팔을 쥐고서 뒤로 물러났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여인이 비명을 한 번 지르더니 날 죽일 듯 노려보며 소리쳤다.

"죽여! 병신처럼 가만히 있지 말고 저놈 당장 죽여버리라고!"

그에 기사가 머뭇거리다가 결국 검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아셸에게 말했다.

"검을 뽑으면 둘 다 베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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