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24화 (24/189)

부동 장막 (4)

모험단은 입구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지금이라도 튀어야 되는 거 아냐?"

단원인 루드가 말했다.

현재 그들 사이엔 미약한 불안감이 피어오른 상태였다.

지금 두 사람이 들어간 정체 모를 통로.

이건 아무리 봐도 던전처럼 보였는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에 끼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던전은 오랜 고대의 유적들이 잠들어있는 보물 창고였다.

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모험가들이 일확천금의 기회를 꿈꾸게 만드는 탐욕스런 덫이기도 했다.

설마 했는데 뭘 찾고 있다는 게 던전이었을 줄이야.

문제는 의뢰주인 론의 호위인 여인이 상상했던 것 이상의 엄청난 실력자였다는 것이었다.

검기를 거대하게 쏘아내어 오크들을 모조리 토막내버렸던 일격. 그들은 그런 진풍경을 평생에 처음 봤다.

던전에서 나와 입막음을 하겠다고 이쪽을 모조리 죽이려 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었다.

귀족들 중에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미친 자들도 많았으니까.

돈에 눈이 멀어 불분명한 의뢰를 너무 섣불리 받았나 싶은 후회도 조금 들었다.

'그 도련님이 그런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엔이 나서서 말했다.

"야, 튀기는 미쳤다고 튀어? 아직 나머지 의뢰금은 받지도 못했는데 뭔 개소리야."

"그 여자 보통 실력자가 아닌 거 봤잖아? 입막음 하겠답시고 우릴 죽이려고 들면······."

"그럴 생각이었으면 들어가기도 전에 진작 죽였겠지, 이렇게 멀쩡히 남겨두고 들어갔겠어?"

"돌아갈 길을 모르니까 마저 안내시킨 다음에 죽이려는 걸 수도 있잖······ 악!"

"병신이 하여튼 겁은 더럽게 많아가지곤."

시엔이 활대로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루드의 등짝을 후려쳤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약의 가정일 뿐이다.

아니라면 의뢰를 마치기도 전에 의뢰인을 버려두고 가는 쓰레기 짓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70골드도 못 받고.

일단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하는데, 퀴익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주위에서 오크들이 다시금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아오, 저 오크 새끼들이 또."

이 협곡 인근에 자리를 잡은 부족이라도 있나?

질린다는 듯 전투를 준비하려던 로딘과 단원들의 표정이 서서히 멍하게 변했다.

시야에 보이는 오크들의 모습이 끊이지가 않고 계속해서 늘어났기 때문이다.

몇 마리에서 열 마리, 열 마리에서 몇십 마리, 그리고 몇십 마리에서······.

"······."

일대를 가득히 채운 오크 무리들.

수풀 사이에, 절벽 위쪽에, 그 와중에도 오크들은 끊이지 않고 나타나서 이젠 완전히 녹색의 파도처럼 보였다.

"미, 미친."

대체 지금 무슨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무기를 들 생각도 못한 채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기이하게도 그 수많은 오크들 사이엔 질서정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치 잘 정돈된 대군처럼, 자신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명령을 기다리듯.

크르륵.

고요함 속에서 낮고 선명한 소리가 울렸다.

공포를 절로 자극하는 그 흉포한 울음소리에 로딘과 단원들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녹색 파도의 한쪽이 갈라지듯 길이 열리는가 싶더니, 그 사이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다른 오크들의 배는 되는 덩치의, 그리고 전신이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뒤덮인 거대한 오크.

놈을 바라보며 로딘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왕이다."

왕.

연합이란 게 불가능한 몬스터들을 한 데 뭉치고 통솔할 수 있는 존재.

그들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많은 오크들이 한 곳에 뭉쳐있을 수 있는 건지.

이 티렐 산맥의 오크들 사이에 어느새인가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킬 최악의 돌연변이가 태어났던 것이었다.

시뻘건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오크킹의 눈동자가 그들에게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찢어 죽이려 달려들 살의가 충만한 모양새였다.

저 괴물을 상대할 방법 따윈 없다.

그 사실은 싸워보지 않아도 모두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주위를 오크들이 모두 둘러싸고 있었기에 도망칠 곳이라고는 하나뿐이었다.

로딘이 옆에 있는 던전의 입구를 바라보며 쥐어짜듯 간신히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르마, 마법······."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아르마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뭐라도 놈을 잠깐이라도 주춤하게 할 마법을 날린 다음에 안쪽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서 온 마력을 끌어올렸다.

주위에 넘실거리며 뭉쳐진 마력이 곧 불꽃으로 피어올랐다.

크허헝!

오크킹이 육중한 발구름과 함께 그들을 향해서 돌진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 정도의 크기는 될 거대한 불덩이가 허공을 가르고 놈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퍼어어엉!

"······안으로 도망쳐!"

모두가 몸을 돌려 던전의 입구를 향해서 달렸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르마가 날린 화염구는 오크킹에게 타격을 주기는 커녕 잠깐의 저지조차 하지 못했다.

불꽃과 연기를 가르고 튀어나온 놈이 모두가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순식간에 지척까지 도달했다.

오크킹이 가장 먼저 노린 대상은 마법을 날린 아르마였다.

바로 옆쪽에 있던 로딘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으나 그대로 들이받혀 절벽 면으로 튕겨나가 처박혔다.

"······아."

방어 마법을 펼칠 틈도 없었다.

이어서 몸을 터뜨려버릴 듯 휘둘러오는 거대한 주먹을 보며 그녀는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던전의 입구 안에서부터 날아든 거대한 검기가 오크킹을 베어버렸다.

······크어어!

놈이 고통에 찬 괴성을 터뜨리며 피가 흘러나오는 팔을 붙잡고 뒤로 물러섰다.

아르마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다른 단원들도 검기가 날아든 입구를 바라봤다.

안쪽에서 론과 아셸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

'······이게 다 뭔 꼴이야?'

가벼운 걸음으로 던전에서 나온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협곡을 뒤덮고 있는 수많은 오크들.

던전에 들어간 지 반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바깥에선 개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건······ 오크킹인가.'

아셸이 날린 검기에 팔을 베여 울부짖고 있는 거대한 오크를 바라보며, 곧 상황을 이해했다.

【Lv. 72】

놈의 레벨은 72.

아무리 왕이라도 굉장히 높은 편에 속하는 레벨이었다.

정말로 드물게 발생하는 오크킹을 또 이렇게 마주치다니, 이번 신비 찾기는 끝까지 다사다난인가.

하지만 아셸이 문제 없이 상대할 수 있을 수준이었기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처리해라."

"예."

내 말에 아셸이 곧바로 오크킹을 향해서 다가갔다.

어쩐지 던전에서 석상 가디언을 상대하지 못한 걸 만회라도 하겠다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시선을 돌려 옆쪽의 벽면에 처박힌 로딘을 바라봤다.

울컥거리며 온몸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는 게 간신히 숨만 붙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단장!"

넋을 놓고 있던 단원들이 뒤늦게 이쪽을 향해서 달려왔다.

벽면에 박힌 로딘을 빼내고서 바닥에 눕혔다.

아르마가 황급히 만신창이가 된 몸에 손을 뻗었다. 초록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치료 마법을 퍼붓는 듯했으나 로딘의 초점은 이제 곧 죽을 사람처럼 서서히 풀리기만 할 뿐이었다.

"아, 안돼······! 안돼!"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마법을 퍼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함부로 호의를 베풀지 않고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서 죽는 사람들까지 무시하며 살 생각은 없었다.

"비켜봐라."

나는 스칼릿 비전 포션을 꺼내들고서 로딘의 상태를 살폈다.

가슴이 움푹 파인 게 여기가 치명상인 모양이었다. 거기에 대고 포션을 들이부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상처가 천천히 재생되더니 안쪽에 뼈에서도 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뼈가 부러졌으면 제대로 맞추고 사용했어야 된다 했는데, 이렇게 막 해도 되나?

잠시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곧 로딘의 안색이 편해지더니 호흡이 정상적으로 고르게 돌아왔다.

그 광경을 다른 단원들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다급히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정말로 감사······!"

"됐으니 상태를 더 살펴봐라."

할 일을 마친 나는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쪽에서 아셸과 오크킹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콰콰콰쾅!

······너무 빨라서 오고가는 공방을 보기도 힘든 전투였다.

내가 그걸 보며 할 수 있는 표현은, 그저 아셸과 오크킹이 격돌할 때마다 주변의 지면이 뒤집어지고 나무들이 죄다 쓸려나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꽤 멀리 떨어져있는 여기까지 풍압이 밀려올 정도.

처음으로 아셸이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보니 새삼 그녀도 괴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벨르바고라에, 80레벨이 훌쩍 넘는 가디언에, 만난 놈들이 놈들이다 보니 여태 제대로 활약을 못했을 뿐이지.

폭풍처럼 몰아치는 아셸의 검에 오크킹은 맥을 추리지 못하고 피를 쏟아내기만 했다.

사실 아셸이 정말로 전력을 내면 지금쯤 놈은 벌써 죽었을 것이다.

70, 80레벨대에서 9레벨의 차이는 그만큼 거대한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종족 특질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전력이 아닌 상태.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지는 듯했지만 이제 곧 끝나겠지 싶어 나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싸움을 응시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크어어어!

마치 마지막 격돌을 준비하듯 쩌렁쩌렁한 포효를 터뜨린 오크킹이, 갑작스레 방향을 선회하더니 이쪽을 향해 돌진했다.

그에 아셸도 당황해서 한 박자 늦게 놈의 뒤로 붙었으나······ 놈은 이미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

'이런 미······.'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온 놈을 보며 바로 신비를 사용했다.

부동 장막.

나와 놈 사이를 두고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막이 펼쳐졌다.

놈의 주먹이 앞에서 우뚝 멈추었고, 그 충격에 내가 서있는 옆쪽의 바닥이 터지듯 폭발했다.

"······."

거대한 바위도 단숨에 산산조각냈을 놈의 공격은 내게 조금의 충격도 주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선 채 무심한 눈으로, 속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당황하고 있는 오크킹을 바라봤다.

그게 놈의 마지막이었다.

촤아아악!

순식간에 뒤따라온 아셸의 검이 오크킹의 목을 베어버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