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22화 (22/189)

부동 장막 (2)

돈으로 밀어붙여 체결된 계약 아래, 의뢰할 일에 대해 모험단과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딘이 당황한 투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티렐 산맥의 봉우리들을 죄다 뒤질 생각이시라는 겁니까?"

"그래."

내가 말하고도 굉장히 터무니없게 들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초재생과 달리 부동 장막이 숨겨진 장소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지형적 특성이라고는 그게 전부였으니까.

산맥에 있는 봉우리들의 정상부 어딘가······ 그리고 아마도 협곡 같은 지형이었다는 것.

직접 가서 살피다 보면 감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그거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 신비를 찾기 위해서는 초재생 때보다 훨씬 더 노가다를 할 각오를 다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하나 다행인 건 그래도 티렐 산맥이 루터스 산맥보다는 작은 산맥이라는 것일까.

"티렐 산맥의 봉우리에 있는 협곡들을 전부 돌아다닌다고 가정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로딘이 침음을 흘리다가 답했다.

"너무 막연해서 영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최소한 보름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보름이라.

사실 그 말대로 너무 막연한 일이었기에 결국은 직접 해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로딘이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한데 나으리께선 누구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다짜고짜 거금을 내며 산맥의 길잡이를 요청하는 의뢰인.

정체가 궁금한 건 당연할 것이기에 적당히 대답했다.

"인근의 다른 도시의 가문에서 나온 사람이다. 출신을 자세히 밝히기는 곤란하고."

"······그럼 티렐 산맥에는 어떤 이유로 오르시려는 겁니까?"

"찾고 있는 게 있거든."

"무엇을 말입니까?"

"그것도 말하기는 좀 어렵겠군."

"아, 예······."

잠깐 자리에 정적이 감돌았다.

길잡이라는 게 설마 이런 의뢰일 줄은 몰랐는지 로딘과 단원들의 표정은 꽤나 심란해 보였다.

나는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금화를 대여섯 닢씩 탁자에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 수북히 쌓이는 금화에 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선금으로 지금 바로 30골드를 주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대가는 차고 넘치지 않나."

"······."

"그래도 의뢰를 맡을 수 없다면 별 수 없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하겠나?"

고민하던 로딘이 단원들과 시선을 주고받는 듯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산맥에 오를 건 두 분이 전부입니까?"

로딘이 나와 내 뒤에 서있는 아셸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과 단원들을 차례대로 간단히 소개했다.

"푸른 여우 모험단의 단장인 로딘입니다. 그리고 이쪽부터 차례대로 아르마, 루드, 벡스터, 시엔······."

검과 방패, 그리고 창으로 무장한 사내 둘, 활을 들고 있는 여인과,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아 마법사로 보이는 여인, 그리고 로딘까지 해서 총 다섯 명.

시엔이라 불린 활을 메고 있는 여인이 헤실헤실 웃으며 탁자에 쌓인 금화를 바라보고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희만큼 티렐 산맥의 지리에 밝은 모험가가 근방에 또 없긴 하죠. 정말 제대로 찾아오신 거예요, 공자님."

"저저 미친년, 또 황금에 눈 돌아간 거 봐라······."

옆에 앉은 루드라는 사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가 그대로 등짝을 후려맞았다.

나도 간단히 이름만 밝혔다.

"론이다. 이쪽은 호위인 아셸."

"예, 아무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로딘의 푸른 여우 모험단은 결국 의뢰를 받아들였다.

***

나야 바로 출발해도 상관없었지만 그들도 준비가 필요했기에 하루의 여유를 더 가졌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모험단과 도시의 동쪽 성문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바로스까지 굳이 있을 필요는 없었기에 그는 여관 숙소에서 자리를 지키고 아셸만 나와 동행했다.

"그럼 가지."

"······."

여관 방에서 나온 나를 아셸이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내가 챙겨서 나온 활과 화살들을 쳐다보는 거겠지.

그녀의 눈빛에선 저걸 대체 왜 챙겨가나 싶은 의문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지만, 무시했다.

이번에도 벨르바고라처럼 또 어떤 상상도 못한 위험을 맞닥뜨릴 줄 누가 알겠는가?

아주 자그마한 안일함도 언제든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준비할 수 있는 건 모두 준비하는 게 이 험악한 세계에서의 생존을 위한 올바른 자세였다.

"오셨습니까."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험단과 만나 곧바로 티렐 산맥으로 향했다.

티렐 산맥.

이 산맥의 특징을 하나 꼽자면 오크들이 굉장이 많다는 점이었다.

오크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몬스터지만, 티렐 산맥에는 특히 많이 서식했다.

하지만 높아봐야 20레벨대에 불과한 놈들이니 안전을 걱정할 건 없었다.

산맥에 오르기 시작한 지도 몇 시간, 이제 초재생을 얻은 나는 더 이상 체력이 달릴 일 없이 얼마든지 모험단의 걸음에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오크 무리와도 마주쳤다.

퀴이익.

수풀에서 튀어나온 녹색 피부의 덩치 큰 괴물들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게임에서 봤던 생김새 그대로다.

총 여덟 마리. 손에 녹슨 철검이나 창 따위를 들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이 새끼들이 미쳐서 여기까지 내려와 사냥을 하고 있네?"

로딘과 단원들이 주저하지도 않고 앞으로 나서서 오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창칼을 든 이들이 앞에서 싸우고, 뒤에선 화살과 마법을 날리며 전투를 보조했다. 나와 아셸은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특히나 30레벨이 넘는 로딘이 있었기에 전투는 간단히 끝나버렸다.

잠시 자리를 잡고 쉬어가며 모험가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오크라는 게 생각보다 영리한 놈들이라 노련한 모험가들도 까딱 잘못했다간 몰이 사냥을 당해서 죽기도 합니다. 아까 만났던 그 오크들이 들고 있던 무기도 원래는 다 다른 모험가들의 무기를 뺏어서 사용하는 것이죠."

"그렇군."

물론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크도 부족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놈들이기에 몬스터치고 지능은 뛰어난 편에 속했다.

내가 대화를 잘 받아주자 모험가들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더 늘어놓았다.

"혹시 오크의 몬스터 웨이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선 아십니까?"

"드물게 돌연변이인 왕이 나타나면 발생하는 게 아닌가."

"예, 알고 계셨군요. 본래라면 포악한 성질 탓에 대단위로 뭉치지도 못하는 놈들이 왕이 탄생하면 그 아래 모조리 연합해서 완전히 끔찍한 재앙이 되어버리죠."

몬스터 웨이브.

그것은 명칭대로 거대한 몬스터 무리가 파도처럼 몰려오는 현상을 의미한다.

원인이야 여러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바로 몬스터들 사이에 아주 드물게 탄생하는 돌연변이인 '왕'의 존재였다.

왕이 탄생하는 몬스터로는 대표적으로 오크나 리자드맨 등이 있는데, 왕이 탄생하면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까지, 압도적인 몬스터 대군이 형성되어 인간들의 영역을 침공하기도 했다.

'오크킹이면 높게는 한 70레벨이 넘는 놈까지도 출현했던가.'

아무튼 그런 몬스터 웨이브들은 게임의 스토리에서도 종종 발생했던 주요 이벤트이긴 했다.

휴식을 마치고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

티렐 산맥을 뒤지기 시작한 지도 이제 일주일이 다 되었다.

모험단은 자신했던 대로 길을 헤매지 않고 목적지들로 훌륭히 안내했다.

하지만 벌써 여러 봉우리와 협곡들을 뒤졌지만 여전히 신비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나는 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계속해서 기억을 열심히 더듬었다.

'일단 협곡 지형이었던 건 확실한데.'

폭이 좁은 게 아니라 상당히 넓고 양옆의 절벽의 경사가 완만했던 편으로 기억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지나쳤던 협곡들 중에 기억과 매치되는 건 없었다.

그리고 대체 또 뭐가 있었더라······.

"협곡입니다."

앞쪽에 보이기 시작한 광경을 보며 로딘이 말했다.

이제 다섯 번째로 마주한 협곡이었다.

"······."

어? 잠깐만······.

어쩐지 흐릿한 기억과 대충 일치하는 것 같은 협곡의 형태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바쁘게 시선을 옮기며 협곡을 훑어보고 있는데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또 오크들이었다.

이번엔 몇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 단위로 튀어나온 오크 떼에 로딘과 단원들이 인상을 구겼다.

"······이번엔 좀 많은데?"

"많아봐야 오크 새끼들이지, 뭐. 큰 마법 하나 부탁한다, 아르마."

언제나처럼 로딘과 단원들이 전투를 준비했다. 그래도 이번엔 숫자가 좀 많아서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그래도 받은 의뢰금 값은 하겠다는 건지 항상 먼저 전투에 나서는 그들이었지만······.

"아셸."

"예."

"전부 처리해라."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이 상황에 오크 놈들은 굉장한 방해였다.

내 말에 아셸이 검을 뽑아들고 서서히 다가오는 오크 무리를 향해 휘둘렀다.

촤아악!

그녀의 검에서부터 뿜어져나온 푸르고 거대한 검기에 오크들의 몸이 일제히 양단되었다.

그 광경에 막 전투에 나서려고 하고 있던 로딘과 단원들은 순간 넋을 놓은 얼굴이 되었다.

"어, 어어······."

다시 협곡이 조용해진 사이, 나는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며 기억을 끄집어냈다.

곧 퍼뜩 떠오른 무언가에 서둘러 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셸이 내 뒤를 따랐다.

'······그래.'

분명히 이쯤이었다.

나는 초재생을 찾을 때처럼 절벽면을 살피며 움직이다가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머리 위로 높이 보이는 볼록한 절벽면, 그리고 끄트머리에 홀로 서있는 나무.

부동 장막을 얻은 유저의 영상에 분명히 이런 구도의 시야가 있었다.

"아셸, 이 벽을 부숴봐라."

콰아앙!

아셸이 벽을 부수자 돌조각이 우르르 무너지더니 안쪽에 통로가 나타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낡은 돌계단.

그걸 보며 나는 환희에 찬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찾았다.'

이곳이 바로 부동 장막의 신비가 숨겨져있는 던전.

로딘과 다른 단원들도 다가와서 그 입구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아셸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 안쪽으로 향했다.

***

챙겨온 발광석을 들고 빛에 의존해 어두운 통로를 나아갔다.

일자로 이어진 낡고 넓은 복도의 양옆엔 거대한 석상들이 서있었고, 아셸이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그것들을 둘러봤다.

던전은 기본적으로 고대의 마법사들이 만든 인공적인 공간이었다.

함정이 있고 그것을 지키는 가디언들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왜냐면 분명 플레이 영상을 봤을 때도 이 던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미 망가져서 함정이나 가디언 따위는 없었으니까.

가장 안쪽에 숨겨져있는 부동 장막의 신비에 도달하기까지 아무런 위험은 없었다.

곧 복도의 끝에 도달하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음."

나는 잠시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안으로 향하는 문 바로 앞을 가로막고 복도 양옆에 늘어져있던 것과 같은 거대한 석상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저것도 별 거 아니지.'

어차피 움직이지도 않을 석상일 것이기에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셸이 전부 부숴버리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만인데······ 잠깐만.

【Lv. 85】

'······저놈 저거 왜 레벨이 보이냐?'

석상의 머리 위에 떠올라있는 레벨에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도로 걸음을 멈췄다.

돌연 석상의 눈에 푸른빛이 감돌더니 번쩍 뜨이더니, 놈이 들고 있던 창을 휘둘렀다.

콰콰콰쾅!

"······!"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간 푸른빛의 거대한 기운에 등골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이어서 석상에서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경고한다. 그 선을 넘으면 침입자로 간주하겠다. 자격이 없는 자들은 돌아가라.

······저게 뭐야, 미친?

'여기 가디언 같은 거 없는 던전 아니었어?'

당황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바닥이 패여 선 같은 자국이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걸 넘으면 공격하겠다는 건가?

벨르바고라를 마주쳤을 때처럼 또다시 예상 못한 상황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기껏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또 이딴 식이야, 또?

쿠구구구.

석상에서 뿜어져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는지 옆에 있는 아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레벨을 봐도 아셸보다 훨씬 높았기에 그녀가 저걸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골렘한테도 즉살이 통하나?'

저 가디언은 딱 봐도 마법으로 제작된 마법 골렘이었다.

따지자면 생물이라기보단 무생물에 가까운 놈인데, 과연 즉살이 통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시도라도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설마 유일무이한 10성급 스킬인데 골렘이라고 안 통하겠나?

나는 챙겨왔던 화살을 꺼내들고 손바닥을 긁어 피를 묻힌 뒤, 시위에 걸고서 놈을 조준했다.

***

아셸은 전방에서 거대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석상을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전력을 다하면 이길 수 있을까? 가늠해봤지만 자신은 없었다.

이 던전처럼 보이는 공간은 대체 뭘 하는 장소란 말인가? 저 괴물은 또 무엇이고?

스스로의 실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고 일족 사이에서도 항상 천재로 일컬어지던 그녀였지만, 어쩐지 7군주랑 다니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대들을 계속 마주치게 되었다.

"······?"

그녀는 퍼뜩 옆을 돌아봤다.

갑자기 7군주가 화살을 시위에 걸고 골렘을 조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잉!

7군주가 시위를 놓자 날아간 화살이 석상의 몸통을 때리고 맥없이 튕겨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그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머리를 맞혀보려 했는데, 아직 많이 부족하군."

······대체 지금 뭘 하는 거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장난이라도 치는 듯한 행동에 의문이 피어오를 때.

7군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꺼져라, 돌덩이. 길 막지 말고."

그리고 그와 동시였다.

······쿠우웅!

석상이 그대로 중심을 잃고 무너지며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그 광경을 보며 아셸의 두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7군주가 활을 도로 등에 메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지."

"······."

아셸은 가벼운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걸음을 옮겼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