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21화 (21/189)

부동 장막 (1)

군주성에서 지낸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언제까지고 시간만 잡아먹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아쉽게나마 계획 수립을 마치고 그만 떠날 준비를 했다.

"아마 다음 군주 회의가 가까워질 즈음에나 돌아올 것이다."

내가 없어도 군주령이야 돌아가던 대로 알아서 잘 돌아갈 테니 신경 쓸 건 없었다.

군주들 중에는 아예 영지는 버려놓다시피하고 바깥만 돌아다니는 군주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광랑이라든가.

플로토가 언제나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말씀하신 대로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셸을 제외한 수행원은 한 명만 붙여서 가기로 했다.

칼데릭의 지리에 빠삭하면서 이것저것 잡다한 일을 맡을 사람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군주령들을 돌아다녀야 하니 인원을 우르르 끌고 다니는 건 안 되고, 번거롭게 몇 명 더 붙이는 건 의미도 없기에 한 명이면 충분하겠다 싶었다.

【Lv. 46】

"일등 집사인 바로스라고 합니다."

안경을 쓴 차가운 인상의 남성 엘프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종족이나 성별은 상관없으니 최대한 적합한 자를 준비하라는 명령에 플로토가 데려온 이였다.

레벨도 40이 훌쩍 넘어 상당히 높은 편.

"칼데릭 전역을 돌아다닐 예정인데, 헤매지 않고 방향을 잡을 수 있나?"

"예, 군주님."

"바로 떠날 채비를 하도록."

인원 구성은 끝이었고, 짐을 챙기는 것도 플로토가 알아서 마쳤다.

"마차는 평범하게 너무 눈에 띄지 않는 걸로 준비해라."

대군주성에서 이곳으로 올 때 탔던 것처럼 거대하고 문양 가득한 화려한 마차를 타고 다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듯했다.

내 위치와 루트가 다른 군주들한테 고스란히 노출될 수도 있었으니까.

때문에 다른 군주령들을 다니면서 웬만하면 내 신분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 행방을 안다고 해서 딱히 이상한 짓을 할 군주는 없겠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모든 준비를 끝낸 뒤, 나와 아셸은 건물 입구에 서있는 마차에 오르며 플로토의 배웅을 받았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군주님."

성문에서 경례를 하고 있는 기사들을 지나쳐 마차가 힘차게 군주성의 정문을 빠져나갔다.

***

첫 번째로 목표로 할 신비는 방어 계열의 신비인 '부동 장막'이었다.

명칭이 다소 특이한 이 신비는 적어도 방어적인 능력만큼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뛰어난 신비였다.

'게임에서의 스킬 등급도 제왕의 혼과 같은 9성이었을 정도니까.'

물론 그만큼의 치명적인 패널티도 하나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 있어선 무엇보다도 뛰어난 방어 능력을 얻는 게 중요했기에 패널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즉살이야 최고의 공격 능력이었지만 직접 닿아야먄 발동이 되기에 방어적인 능력은 전혀 없다.

한 20레벨의 주먹질에 한 대만 맞아도 그대로 머리통이 터져나갈 위태로운 처치부터 어떻게든 개선하고 봐야 하는 것이었다.

'티렐 산맥.'

부동 장막이 숨겨진 장소는 5군주령 살로갈의 북부 변경에 있는 티렐 산맥의 어딘가다.

초재생보다는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았는데, 부동 장막은 게임에서 본래 내가 찾아서 습득한 신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동 장막을 얻는 걸 녹화한 다른 유저의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기에 그걸 본 것뿐이지.

'망가진 던전 같은 장소였었나.'

찾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찾아내서 얻을 생각이다.

5군주 광랑에게 양해를 구해 인력을 대동원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여러모로 꺼려지는 방법이었다.

광랑 자체가 대화가 잘 통할 만한 인물도 아니고,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면 그걸 뭐라 설명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재생을 얻으면서 더욱 확신을 얻었다.

신비를 얻는 데에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는 게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걸.

신비의 문양에 손을 대기만 해도 신비는 그 사람에게 흡수된다.

누군가 먼저 신비를 발견해서 나한테 보고가 올라오기도 전에 냉큼 먹어버리면 그걸 도로 뱉어내게 할 방법은 없었다. 완전히 죽 쒀서 개 주는 꼴이나 다름없는 거였다.

'초재생을 찾을 때처럼 길잡이 정도만 고용해서 찾는 게 최선이겠지.'

현재 마차는 숲길을 지나고 있었다.

칼데릭은 중앙의 대군주령을 아홉 군주령이 원형으로 둘러싼 형태의 땅이다.

5군주령으로 향하기 위해 선택한 길은 6군주령의 외곽을 비스듬하게 지나쳐서 가는 것이었다. 가장 빠른 직선 경로였다.

가는 길이야 지금 마차를 몰고 있는 바로스가 알아서 잘 찾아갈 테고.

"······?"

나는 반대편의 아셸을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있던 그녀가 창밖으로 슬쩍 시선을 던졌기 때문이다.

뭔가 일이 있나 싶을 때,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천천히 멈춰섰다.

- 하하! 겁도 없이 호위병 하나 달지 않고 이런 숲속을 지나고 있느냐!

마차 밖에서 울리듯 들려오는 걸걸한 음성.

나는 설마 싶었다.

'도적인가?'

이 중세풍의 판타지 세계에선 길을 가다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게 도적이고 몬스터였다.

대군주성에서 엔록으로 향할 때야 호위 기사들이 한가득 붙었으니 도적 무리를 마주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생각하지 않았던 상황은 아니지만 벌써 실제로 맞닥뜨린 모양이었다.

- 거기, 마차에 타고 있는 것들도 어서 내려라! 가진 걸 다 내놓고 꺼지······ 흐악!

그리고 비명이 이어졌다.

무언가 갈기갈기 찢기는 소리와 끔찍한 비명이 연신 울리더니 곧 바깥이 조용해졌다.

슬쩍 창을 열고 밖으로 머리를 내미니 널부러진 시체들과, 그 사이에서 안경에 튄 핏물을 닦아내고 있는 바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주위엔 바람 같은 것이 형체를 갖추고 일렁이다가 사라지고 있었는데······ 저거 정령인가?

나와 눈을 마주친 바로스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쓰레기들 때문에 잠시 이동이 멈췄습니다."

"······그래."

바로스가 도로 마부석에 오르고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잡도적들 처리에는 아셸이 나설 일도 없을 듯했다.

***

그 후로도 간간히 도적 떼와 몬스터들을 마주치며 이동은 계속되었다.

긴 시간이 흘러 마침내 목적지인 5군주령 살로갈에 도착했다.

북부 변경의 대도시인 코르웨헨 시.

고급 여관에서 하루 묵으며 피로를 씻어낸 뒤, 다음날 곧바로 찾아간 곳은 도시의 모험가 길드였다.

"그래서 말이야,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가 괴물 새끼의 뿔을 붙잡고 그대로······."

"실리아, 오늘 밤에야말로 단둘이 한 잔 어때? 응? 저번 의뢰에서 크게 한탕 벌어서 비싼 술도 사줄 수 있다고."

길드 건물 내부는 뭐라고 할까, 정말로 딱 상상했던 정도의 분위기였다.

벽면에 붙은 의뢰서들을 신중히 훑고 있는 사람, 허세를 떨며 무용담을 자랑하는 사람, 그리고 카운터의 직원에게 껄떡대는 사람······.

그 광경을 잠시 훑어보다가 카운터로 다가가자 업무를 보고 있던 수인족 여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공자님. 신청하고 싶으신 의뢰가 있으신가요?"

내 복장을 보고 의뢰를 신청하러 온 쪽이라고 판단한 건지 그녀가 그렇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되물었다.

"이 도시에서 티렐 산맥의 지리에 가장 밝은 모험가가 누구지?"

그녀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티렐 산맥의 지리에 밝은 모험가를 찾으시는군요. 길잡이를 원하시는 건가요?"

"그래."

"혹시 개인이 아니라 모험단도 상관이 없으신가요?"

"상관없다."

"그렇다면 푸른 여우 모험단을 추천드리겠습니다. 단장인 로딘 씨는 특급의 모험가로 이곳 코르웨헨에서 명성이 상당하신 분이죠. 지금 바로 저기 앉아계시는 분들인데, 만나보시겠어요?"

여인이 가리킨 곳, 2층의 난간 자리에 여러 명의 남녀가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서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의 의문에 찬 시선을 보냈다.

검, 창, 활 등으로 각자 다양한 무장을 하고 있는 다섯 명의 모험가 남녀.

【Lv. 36】

그중에 가장 레벨이 높은, 탁자 옆에 거대한 검을 세워두고 있는 사내에게 직원 여인이 말을 걸었다.

"로딘 씨, 의뢰 요청이에요. 여기 공자님께서 티렐 산맥의 지리에 밝은 길잡이를 구하신다고 하셔서요."

"······엉? 의뢰?"

그가 나와 여인을 번갈아보며 턱수염을 긁적이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첼시, 우리 이미 사흘 뒤에 폴립 시로 향하는 상행 호위 의뢰를 맡기로 했는데. 몰랐어?"

"······예? 그랬어요?"

"그래. 죄송하지만 의뢰는 맡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으리. 다른 모험가를 찾아보시지요."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는지 여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 자들이 길드에서 티렐 산맥의 지리에는 가장 밝나?"

"예, 그렇긴 한데······ 죄송합니다, 공자님. 이미 맡으신 의뢰가 있다니 다른 분들을 소개해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레벨들을 보니 실력은 확실해 보이고, 이왕이면 최고의 인력을 데려가고 싶었다.

"의뢰비라면 더 얹어줄 테니, 그쪽의 의뢰는 취소하고 내 의뢰를 맡을 생각은 없나?"

내 말에 로딘이라는 사내는 조금 헛웃음을 짓더니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으리. 맡은 의뢰를 취소하려면 이미 받은 선금의 몇 배를 위약금으로 물어줘야 해서요."

모험가 측에서 멋대로 의뢰를 취소해버리면 의뢰인 쪽에도 피해가 갈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위약금이 얼마나 되지?"

"받은 선금이 5골드이니 2배인 10골드를 물어줘야겠지요."

"그걸 내가 대신 모두 물어주고 20골드에 자네들을 고용하지. 이러면 어떻나?"

내 조건이 꽤 파격적으로 들렸는지 로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러나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위약금도 위약금이지만 의뢰주와의 신용이라는 게 있습니다. 다른 의뢰를 맡겠다고 먼저 맡은 의뢰를 멋대로 깨버리면 그쪽에서 저희 모험단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의뢰금을 2배인 40골드로 올리지."

로딘의 동공이 흔들렸다.

"죄송하지만 정말로 안 됩니다, 나으리. 의뢰주와의······."

"3배, 60골드."

"······신용······ 이라는 게 있는데······."

"5배, 100골드. 이게 마지막이다."

로딘의 말이 뚝 끊겼다.

다른 단원들도 꿀꺽 침을 삼키며 로딘을 바라봤다.

드르륵.

의자를 끌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허리를 숙였다.

"환영합니다, 의뢰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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