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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20화 (20/189)

떠나기 전

그러고 보니 나는 살면서 책이라는 걸 많이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럴 시간에 라사에 로그인해서 업적 하나를 더 깨고 템 하나를 더 강화했지.

만약 그렇게 게임에만 미쳐서 살지 않았다면 내게 이런 엿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생각이 잠시 딴 곳으로 샜는데, 어쨌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때문이었다.

"흐음."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어버렸다.

책상 한쪽엔 낡은 고서 같은 것들이 한무더기로 쌓여있었는데, 전부 뱀파이어에 관련된 책이었다.

현재 군주성에서의 내 하루 일과는 지도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의 반복이었다.

대군주성에서 내 머릿속에 있는 정보들을 전부 옮기기 위해 펜만 놀렸던 것과는 정반대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건 다름이 아니라 뱀파이어에 관련된 정보를 좀 살펴볼까 싶어 그러는 것이었는데······.

'이놈들도 희소 종족이라 썩 정보가 많지는 않네.'

아셸의 백월족처럼 약소, 희소 종족들은 대자연 깊숙한 곳 어딘가에 자기들끼리 박혀 사는 게 대부분이다.

게다가 뱀파이어라면 이 세계의 수많은 종족들 중 이미지가 거의 손에 꼽을 정도로 나쁜 종족.

때문에 오래 전부터 세상에서 거의 배척되다시피 한 놈들이라 더더욱 정보를 찾기가 힘들었다.

게임 내에서도 뱀파이어와 관련된 스토리는 얼마 되지도 않았었다.

'신비도 신비지만, 혈술을 사용할 수만 있으면 즉살과 시너지가 엄청날 텐데······.'

내가 뱀파이어에 대해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 이유는 놈들의 종족 특질인 '혈술' 때문이었다.

개체에 따라 고유 능력은 다 따로 있지만, 혈액을 염동력 부리듯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모든 뱀파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혈술의 공통 능력이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 즉살의 효율을 최대로 이끌어내기엔 혈술을 얻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 방법이 없지는 않다.

문제는 그걸 실행하기 위해선 뱀파이어들이 숨어있는 터전 중 하나인 '엘로드 숲'으로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자살 행위지.'

이 세계에선 뱀파이어가 다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귀는 아니다.

뱀파이어도 그들 사이에서 부족이 나뉘는데, 다른 종족의 피를 안 빨아먹고 지들끼리 잘 사는 부족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놈들 때문에 온건한 부족들까지 똑같이 박해받고 배척받으면서 사는 것뿐이지.

때문에 억울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온건 부족들도 다른 종족들에 대한 적의가 상당히 심하다.

엘로드 숲도 온건 뱀파이어 부족이 모여서 사는 곳이었지만, 인간인 내가 찾아갔다간 바로 공격부터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쉽지가 않아, 쉽지가.'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가 않다.

다른 신비들을 얻는 순서는 솔직히 대략 다 정해놨었다.

그런데 갑자기 즉살의 새로운 활용법을 발견하고 혈술이 고려 대상에 들어가니, 중간에 엘로드 숲을 껴서 들러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게 고민인 것이었다.

거기에 나하고 아셸 단둘이서만 갔다간 아무리 생각해도 묫자리가 될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고 군주령 병력을 동원하면 일이 너무 커지고.'

그건 그냥 전쟁을 하자는 것밖에 안됐다.

아무리 온건 부족이라도 일단 뱀파이어 자체가 꽤나 호전적인 종족이고, 다른 종족에 대한 적의도 많다.

내가 군사를 이끌고 엘로드 숲으로 가면 무슨 협박을 받든 그들은 끝까지 저항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혈술 하나 얻자고 한 부족을 없애버린 대학살자가 되는 거지.'

그리고 엘로드 숲은 다른 군주령에 위치해있으니 군사를 끌고 가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일 것이었다.

애초에 아셸 같은 호위를 구한 이유가 우르르 병력을 이끌고 다른 군주령들을 돌아다닐 수가 없으니 그런 건데.

나는 의자에 몸을 파묻고 늘어지는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혈술 없이 즉살을 더 원거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초재생을 얻기 위해 올랐던 루터스 산맥에서도 벨르바고라를 만나 죽을 뻔했었다.

다른 신비들을 찾으면서 칼데릭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그런 예기치 못한 위험은 얼마든지 또 맞닥뜨릴 수 있었다. 아셸도 감당할 수 없는.

그때에 대비해서 조금이라도 더 즉살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마련해놔서 나쁠 건 없으니까.

'원거리 공격.'

일단 그냥 상처를 내서 피를 뿌리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건 고작해야 몇 미터 날아갈 뿐이니 원거리 공격이라 하기도 애매했다.

온갖 괴물들이 넘쳐나는 이 세계에서 적이 날 공격하려고 몇 미터 반경에 들어왔으면 뭘 해보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을 확률이 훨씬 높지 않을까.

다른 방법으로는 무언가에 피를 묻혀 날리는 방법도 있었다.

예를 들어 화살촉에 피를 묻혀서 화살을 쏜다든가.

생각해보면 이게 그나마 가장 최선인 것 같기는 했다.

근데 당연히 나는 활을 쏠 줄 몰랐다.

'모르면 배우면 되긴 하지.'

어차피 내가 신비를 찾으며 맞닥뜨릴 확률이 높은 위험은 벨르바고라 같은 거대한 몬스터들이었다.

그런 더럽게 큰 놈들이야 어설픈 활솜씨로도 얼마든지 맞힐 수 있을 터.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지만 대충 쏘는 법만이라도 배워둬서 나쁠 건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초재생의 신비 때문에 체력도 넘쳐나니 쉴 필요도 없이 얼마든지 연습할 수 있겠지.

'그럼 좀 배워둘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주성의 다른 기사들한테 활을 가르쳐달라고 하긴 좀 그렇고.

적임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

"활······ 말씀이십니까?"

문 앞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아셸은 방에서 나와 뜬금없는 말을 내뱉은 7군주에게 되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쏠 줄 모르나?"

"······아뇨, 압니다."

"그럼 바로 연무장으로 가지."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태연하게 말하는 7군주를 바라봤다.

이 종잡을 수 없는 군주는 루터스 산맥에서도 그러더니 또 이상한 기행을 하려 들고 있었다.

활이라니······ 갑자기 자신한테 활을 쏘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건 대체 무슨 요구란 말인가?

그 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들어났는지 7군주가 말했다.

"갑자기 흥미가 생겼을 뿐이다."

그에 아셸도 뭐라 더 묻지 못하고 7군주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지하에 위치한 넓은 개인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활과 화살, 과녁의 준비는 집사장 플로토가 모두 마쳤다.

7군주와 아셸은 각자 활을 하나씩 든 채 과녁에서 거리를 두고서 나란히 섰다.

"먼저 쏴보도록."

7군주의 말에 아셸이 바로 시위에 화살을 걸고 과녁을 향해 쐈다.

피잉!

기세 좋게 날아간 화살이 정확이 과녁의 정중앙에 명중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나를 가르쳐라."

"······."

아셸은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물었다.

"아예 쏘는 법을 모르십니까?"

"그래."

"······그럼 일단 자세부터."

그녀는 일단 시위에 화살을 걸고 당겨보라고 말했다.

그에 7군주가 시위에 화살을 걸고 살짝만 당겼다. 엉성하기 그지없는 폼이었다.

"오른쪽 어깨를 너무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화살을 쥔 손은······."

아셸의 요구에 따라 그가 조금씩 자세를 바꿨다.

"······목표를 조준하는 건 제가 방금 말한 대로 해서, 이제 쏴보십시오."

7군주가 시위를 놓았다.

엉성하게 날아간 화살이 과녁을 맞히긴 커녕 근처에 닿지도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셸이 그것을 보며 말했다.

"쏘는 순간에 자세가 흐트러지셨습니다."

"다시 해보지."

그렇게 7군주가 계속 화살을 쏘고, 아셸은 옆에서 지켜보며 무엇이 잘못됐는지 짚어주었다.

약 반 시간이 흘렀다.

7군주는 여전히 서른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과녁에 화살을 한 발도 맞히지 못했다.

"······."

아셸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바닥과 벽에 수북히 박힌 화살들을 훑어보다가, 7군주에게로 도로 시선을 돌렸다.

피잉!

날아간 화살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과녁 옆쪽의 벽면에 명중했다.

"쥐는 걸 또 잘못하셨습니다."

벌써 열 번 가까이 지적한 부분을 7군주는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센스가 아예 없는 사람처럼.

7군주가 활을 내리고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화났나?"

"······아닙니다."

"목소리가 좀 굳었는데. 화난 게 맞군."

"나지 않았습니다."

7군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한번 직접 자세를 교정해주는 게 어떠냐."

직접 몸에 손을 대서 자세를 잡아달라는 뜻이었다.

아셸은 잠시 머뭇거리다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군주의 몸에 손을 대는 게 이제 와서 대수일까. 루터스 산맥에서는 업기까지 했는데.

"어깨를 이대로 고정하시고······."

7군주의 몸 이곳저곳에 손을 대며 아셸은 새삼 느꼈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렇지만, 정말이지 단련이라고는 조금도 되지 않은 물렁한 육체였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처럼.

······머릿속에 산맥에서 괴물 뱀을 쓰러뜨리던 7군주의 모습이 문득 스쳤다.

그가 보여줬던 그 비상식적인 힘의 근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전에 뜻하지 않게 보게 됐던 4군주 망자왕에게선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스산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7군주는 반대로 무엇 하나 느껴지지 않기에, 아셸은 오히려 그 어떤 잣대로도 감히 그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형편없는 육체조차 그에겐 별 의미도 없는 껍데기가 아닐까······.

피잉!

자세를 교정한 대로 화살을 쏜 7군주가 드디어 처음으로 과녁에 명중시켰다.

그가 조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좀 감이 오는군."

그 말대로 이어서 몇 발을 더 쏜 7군주는 모두 화살을 과녁에 명중시키고, 그만 연습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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