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왕 아스트라
4군주 망자왕, 아스트라.
사령술사이자 언데드 리치인 놈은 이명 그대로 죽은 자들의 왕이라는 호칭에 완벽히 부합하는 존재였다.
'근데 왜······.'
그놈이 갑자기 왜 날 찾아왔다는 건데?
"지금 군주성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그리고 짧은 고뇌에 잠겼다.
다음 회의까지는 다른 군주들과의 만남은 피하고 싶었는데, 왜 벌써부터 이런 이벤트가 발생하는 거냐······.
'이걸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군주가 직접 본신을 이끌고 행차했다.
날 보자고 찾아왔다니까 당연히 같은 군주가 와야 격이 맞는 거긴 하지만, 그런 만큼 나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야 내 본진이고 거절한다고 놈이 깽판을 부릴 순 없겠지만, 그렇게 개무시를 해버리면 확실히 비호감을 사겠지. 안 그래도 뇌후랑도 이미 사이가 좀 뒤틀렸는데.
놈은 폭왕과 정반대로 다른 군주들과도 모두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군주였기에 그건 웬만하면 피해야 할 일이었다.
사실 군주와의 만남이 뭐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이제 나도 같은 군주인데 상대가 뭐 함부로 공격하기야 하겠나.
다만, 내가 너무 약하니까 뭐가 됐든 강자들과의 접촉이 아직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뿐이지.
'이유도 없이 찾아왔을 리는 없으니······.'
그래도 망자왕이면 군주들 중에 그나마 정상적인 편에 속하는 군주이긴 하다.
결정을 내린 나는 플로토에게 말했다.
"여기로 안내해라."
내가 직접 나가서 맞이해야 되나 싶었지만 저쪽에서도 다짜고짜 찾아온 거니 굳이 그렇게 할 것까진 없다 싶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간 플로토가 누군가와 함께 돌아온 건 잠시 뒤였다.
금테가 둘러진 검은 로브. 그리고 후드 사이로 보이는······ 해골.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서 귀기 어린 푸른 안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존재가 홀 안으로 들어서자 한적했던 분위기가 음산함으로 대신 가득 채워지는 듯했다.
나는 여전히 앉아있는 채로 홀 입구에서 걸음을 멈춘 그와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Lv.95】
······이 해골이 바로 4군주 망자왕.
게임에서 봤던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망자왕은 한 손에 키만큼 오는 거대한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저것 역시 게임에서도 놈이 들고 있던 스태프였다.
"반갑네, 7군주."
목으로 내는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러고 보니 해골인데 성대도 없는 놈이 말은 어떻게 하는 걸까. 저것도 다 마법인가?
"기별도 없이 이리 갑작스레 찾아와서 미안하군. 잠깐 대화를 나누고자 온 것인데, 앉아도 되겠는가?"
나는 반대편 자리로 손짓을 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다가온 망자왕이 의자에 앉았다. 자리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가까이 마주하고 앉으니 그를 두르고 있는 기운이 훨씬 선명하게 느껴졌다.
광랑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게 온몸을 짓누를 듯한 압력이었다면, 망자왕에게서 느껴지는 건 으스스함이었다. 마치 죽음이라는 게 그대로 형체를 갖추고 현신한 듯한······.
'제왕의 혼을 실수로 빠뜨렸던 게 진짜 신의 한 수였네.'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이 절대적인 정신 방벽 스킬에 감사함을 느꼈다.
"용건은?"
나는 무심함을 가장한 채 그렇게 물었다. 초면이기에 달리 나눌 말도 없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망자왕이 회의에서 봤던 흑해 여제보단 덜 징그럽긴 했지만, 해골 역시 길게 마주보고 있기 부담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푸른 안광을 빛내며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망자왕이 곧 웃음소리가 섞인 듯한 목소리를 뱉었다.
"대군주가 새 군주를 회의에서 바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놀랐었네. 지난 회의에 참석을 못했던 게 참으로 아쉬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놈은 찾아온 용건이 아닌 계속 쓸데없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7군주 그대는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군."
"······."
"참모장과 만났던 일이나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나, 여러 이야기를 들어서 개인적으로 그대에 대해 관심이 많아. 칼데릭의 군좌에 인간이 앉은 것도 거의 반백 년······."
"망자왕."
그의 말을 끊었다.
"나는 쓸데없는 선문답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 망자왕은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바로 용건을 말하지. 7군주 그대가 죽인 권성의 시체, 그것을 원해서 온 것이네."
그 말에 나는 깜빡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맞다, 그거······.'
호송선을 탈출하기 전에 데이폰이 권성의 시체를 챙기지 않았었던가? 원할 만한 자가 있다고.
이미 죽은 시체를 원할 놈이라면 망자왕밖에 없을 거라곤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그랬던 모양이다.
'하긴, 권성 정도 되는 강자의 시체면 탐을 낼 만하긴 하겠네.'
죽은 자를 되살려내 지배하는 사령 마법.
망자왕은 그런 사령 마법에 대해선 견줄 자가 없는 대륙 최강의 사령술사였다.
'게임에서 적으로 처음 등장했을 땐 끔찍했지.'
칼데릭의 군주들 중 군주령의 병력을 제외하고 홀로 독자적인 대군단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둘 있는데, 그게 바로 망자왕과 흑해 여제였다.
본신의 힘도 힘이지만, 망자왕이 거느리는 시체의 군세는 그야말로 일인 군단이라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근데 그것 때문에 찾아왔다는 게 무슨 말이야?'
시체는 데이폰이 가지고 있는데 그걸 왜 나한테 받으러 와?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어진 말에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권성은 그대가 죽였으니 시체의 소유권도 그대에게 있지. 내가 권성의 시체를 가져도 되겠는가?"
"······."
아, 그래. 소유권······.
그러고 보니 데이폰도 시체 가지고 소유권이니 뭐니 했었던가.
그러니까 망자왕은 지금 시체의 권한을 양도받고 싶어 날 직접 찾아왔다는 거였다.
'그딴 거 필요도 없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멋대로 사용했어도 신경도 안 썼을 것이다.
그래도 망자왕의 입장에서는 혹시나 내가 나중에 태클을 걸 수도 있으니 구태여 허락을 구하러 찾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
근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렇게 허락을 구하고 있으니······ 그냥 가지라고 하기는 괜히 아까워지는 게 사람의 심리였다.
내가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망자왕이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합당한 대가라.
머릿속에 여러가지가 스쳤다.
예를 들어 마법 아이템이라든가. 망자왕은 마법사니까 지금 나한테 가장 필요한 방어 계열의 아이템도 있지 않으려나?
'그런데 이건 말하기가 좀······.'
마치 내가 방어적인 능력이 부족해서 아이템이 필요하다고 대놓고 고백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생각해보니 마법의 '마'자도 모르는 내가 아이템을 제대로 다룰 수 있긴 한 건지도 몰랐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떠보듯 말했다.
"난 네게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자 망자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빚으로 남겨두는 건 어떤가. 후에 그대가 내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권성의 시체의 가치만큼의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지."
당장 뭘 요구하기도 애매하고,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더 찔러보지 말고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을 듯했다.
구두적인 약속이고 시체의 가치만큼의 도움이라는 기준도 불명확했지만, 군주끼리의 약속인데 뭐 알아서 양심껏 지키겠지. 안 지키면 별 수 없고.
"용건은 그걸로 끝인가?"
"그렇네. 담화를 즐길 생각은 없는 듯하니 바로 가보도록 하지."
망자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히 홀 밖으로 떠나갔다.
염러했던 것치고는 굉장히 싱겁게 끝난 대화에 나는 괜히 허탈함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하아······."
그때 뒤편에 서있던 아셸이 작게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나는 슬쩍 그녀의 표정을 봤다. 조금 창백하게 질려있는 게 망자왕과 대화하는 동안 계속 저랬던 모양이다.
나야 제왕의 혼 때문에 괜찮았지만 망자왕이 내뿜는 사기가 그녀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던 듯했다.
'어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저런 괴물들의 틈바구니에 껴있어야 되는 건가?
짧고 싱거웠던 망자왕과의 대화는 괜히 미래에 대한 막막함만 더 안겨주었다.
별 수 있나, 내가 선택한 길인 것을.
죽어라 구르면서 하루빨리 히든 피스들이나 모아야지.
***
군주성의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흑색 갑주를 입은 언데드 기사가 밖으로 나온 망자왕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금방 나오셨습니다.'
사령술사와 그 종속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심상의 대화와 공유가 가능하다.
어째서인지 드물게 즐거움을 띄고 있는 망자왕의 감정에 언데드 기사는 의문을 띠었다.
망자왕은 정신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새로운 7군주는······ 정말로 재미있는 자더군.'
언데드의 육신으로 불멸을 영위한 지도 수백 년.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었기에, 역설적으로 누구보다도 '죽음'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한데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것이 대체 얼마만이던가?
'······설마 죽음의 두려움을 느낄 줄이야.'
7군주에게서는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도, 육체적인 강함도, 무엇 하나 느낄 수 없기에 정말 능력 하나 없는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에겐 분명히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리치가 된 후로 이런 감정을 느끼게 했던 인물은 세인테아의 용사가 유일했고, 대군주에게서조차 아주 희미하게만 느꼈을 뿐이다.
권성의 시체를 얻고 새로운 7군주가 어떤 인물인지도 살펴볼 겸 직접 온 것이었는데, 이건 생각한 것 이상의 즐거운 유희가 되었다.
'후에 어떤 요구를 해올지 기대되는군.'
때문에 빚이라는 방식으로 연결 고리를 하나 만들어둔 것조차 기꺼웠다.
망자왕은 정말로 오랜 세월만에 느낀 죽음의 실감을 곱씹으며, 7군주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