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키마스 공방 (4)
바크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피가 쏟아져나오는 가슴팍을 붙잡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밸리아가 겨우 침착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무례를 사죄드릴 테니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아킨 경."
숙이지 않았다간 누구 하나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아무리 북부 전체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대상인 밸리아라도 군주성의 권력 앞에선 아무 의미도 없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바크를 단번에 베어버린 기사는 철혈 기사단의 부단장인 아킨 크라델.
이만한 거물이 직접 모습을 비췄을 때부터 보통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은 직감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군주의 명령이라니, 어째서······.'
어째서 새로이 즉위한 7군주가 자신과 스칼릿 공방주를 찾는단 말인가? 심지어 바로 어제 도시에 도착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이해할 수 없는 건 부단장의 태도였다.
누가 봐도 그는 이쪽엔 고압적인 반면 스칼릿에게는 예의를 차리고 있었으니까.
밸리아는 혼란스러운 한편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불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검을 거둔 부단장이 쓰러진 바크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스칼릿의 옆으로 다가가서 섰다.
"그럼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마치 호위를 하는 모양새에 스칼릿도 당황해서 테인과 원로들을 돌아봤다.
"저, 가주를 어째서 데려가시는······."
원로 하나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가 화들짝 놀라 도로 다물었다.
바로 방금 바크가 항의 한마디 했다가 저런 꼴을 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단장은 이번엔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었다.
"염려치 마시오. 공방주를 예를 다해 모셔오라고 군주님께서 직접 언질을 내리셨다 하니, 필시 나쁜 일은 아닐 것이오."
"······."
그에 원로들은 잠자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7군주가 어째서 가주를 찾는다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도 없었으니까.
"누, 누님."
테인이 팔을 잡고 비척이며 일어났다.
스칼릿이 그걸 보고 부단장에게 말을 하려는데, 다른 원로가 나서서 말했다.
"가주, 걱정 마시고 일단 다녀오시오. 테인 공자의 팔은 바로 치료할 테니······."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릿의 양옆에 기사들이 붙고, 그리고 밸리아에게도 기사들이 다가갔다.
밸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바크를 돌아봤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를 향해 말했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거라."
그렇게 두 사람은 기사들에게 이끌려 곧장 군주성으로 이동했다.
***
군주성의 정문을 지나 내성으로 들어간 스칼릿은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성 곳곳에서 경계를 서는 기사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베일 듯한 삼엄함이 느껴졌고, 또한 생소했다.
외부인에 불과한 그녀가 이렇게 군주성 내부까지 들어가볼 일이 지금껏 있었을 리가 없었으니까.
중앙의 거대한 건물에 다다르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년의 집사가 있었다.
그가 스칼릿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집사장인 플로토라고 합니다. 군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바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곤 시선을 돌려 밸리아도 한 번 힐끗 바라보고는, 그대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넓고 긴 복도와 계단을 지나쳐 도착한 곳은 건물의 가장 높은 층.
꼭대기 층의 중앙홀에 도착하자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는 한 남자와, 그 뒤에 서있는 여기사의 모습이 비추었다.
"······?"
그 광경을 본 스칼릿의 얼굴에 순간 의문과 당혹스러움이 깃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낯이 익었으니까.
아침에 공방을 방문해 스칼릿 포션을 구매했던, 백금화 3닢을 푼돈 쓰듯 지불한 정체 모를 손님.
한데 그들이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군주님."
플로토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에 스칼릿도 멍해진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불현듯 테인과 나눴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스쳤다. 새로이 즉위한 7군주에 대해 농처럼 나눴던 대화.
"분부하신 대로 스칼릿 공방주와 밸리아 상단주를 데려왔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놓고, 천천히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가 스칼릿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금방 다시 만났군, 공방주."
그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한 스칼릿은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7군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가 이번엔 그녀의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밸리아는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7군주님을 뵙게 되어 평생의 영광······."
"내가 널 부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말을 끊고 울려퍼진 음성.
그 무심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밸리아는 심장이 꽁꽁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 역시 이제 어느 정도 눈치챘다. 7군주가 어째서 자신과 스칼릿을 불러온 것인지.
이쪽과 달리 그녀를 정중하게 대하던 기사들, 그리고 이미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인 듯한 지금의 반응······.
밸리아는 평생에 다시없을 위기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무엇이 최선의 대답인지.
곧 밸리아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군주님."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밸리아는 바닥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뒤 7군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을?"
"알키마스 공방의 비전들과 노동력을 탐내어 공방에 갖가지 더러운 공작들을 부렸습니다. 재료의 유통을 막거나, 공방의 거래처들을 하나둘 회유하거나, 오늘과 같이 공방주와 원로들을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밸리아는 물 흐르듯 자신의 죄를 술술 고백했다.
눈치와 금전적인 감각만으로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시작해 지금의 대상단을 일궈낸 그였다.
이곳에서 살아나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최선이었다. 어차피 군주는 모든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옆에 선 스칼릿이 조금 어이없다는 듯 그런 그를 내려다봤다.
7군주가 이번엔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다는군, 공방주."
"아, 예······."
"상단에 무엇을 원하나?"
스칼릿과 밸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밸리아가 더없이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공방주, 용서해주십시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정식으로 사죄하고 그에 대해 바라시는 대로 전부 철저히 배상하겠습니다. 그리고 더는 탐욕에 눈이 멀어 공방에 더러운 공작을 부리지 않겠다고 맹약하겠습니다."
스칼릿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까지 높여서 애원하는 그를 바라봤다.
그리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어요."
그녀 역시 지금 상황이 갑작스럽고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달리 대답할 말이 뭐가 있을까.
상단주가 치가 떨리도록 경멸스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목을 내놓으라고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가 싱겁게 끝나버리고, 7군주가 밸리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다시 널 부를 일이 없어야 할 거다."
"······."
"그만 가봐라."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난 밸리아가 고개를 숙이고는, 진이 다 빠진 얼굴로 플로토를 따라서 홀 밖으로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스칼릿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7군주가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
"어째서 내가 공방을 돕는 것인지 궁금하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골을 싸맸던 상단 문제가 군주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솔직히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더없이 고마운 일이었지만, 스칼릿은 그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도움을 베푸는 것인지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연금술사로서의 네 자질이 눈에 띄었으니까."
"······?"
"비전으로 제작한 포션이 상당히 훌륭하더군. 나는 네가 연구에 더욱 매진해 그 자질을 지금보다 더욱 꽃피우길 바란다. 그렇기에 주위에 거슬리는 문제를 해결해준 거다."
그에 스칼릿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군주님의 말씀은······ 제게 별 바라시는 것도 없이 그저 능력을 높이 샀기에 호의를 베풀어주셨다는 건가요?"
"그래."
"······."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빚으로 생각해라. 언젠가 내게 있어 네 능력이 필요할 때가 올 수도 있겠지. 그때를 위한 도움이라고 여겨도 된다."
스칼릿에게 있어선 그 말이 훨씬 이상하게 들렸다.
무려 군주가 자신과 같은 일개 연금술사의 도움이 필요할 일이 생길 수가 있을까.
"더 궁금한 게 없다면 이만 가보도록."
축객령에 스칼릿은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정말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뜻하신 대로 군주님께서 만약이라도 제 능력이 필요하실 때가 온다면······ 기꺼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스칼릿은 인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플로토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생각했다. 새로운 7군주는 정말로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
두 사람을 돌려보낸 나는 마시고 있던 차를 마저 마셨다.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르네.'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고 보는 밸리아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바로 그렇게 저자세로 나와서 고해성사를 하니 기껏 상단에 대해 조사해놨던 것도 필요없어졌다. 대화도 몇 분 안 걸렸고.
어쨌든 이걸로 공방에 대한 문제는 끝났다.
내가 공방과 연관되었다는 걸 밸리아도 알았으니 이제 미쳤다고 더 야욕을 드러내진 못할 테고, 스칼릿과도 연을 쌓았다.
물론 내게 있어 당장 그녀의 능력이 필요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둘씩 게임에서 선역으로 등장했던 NPC들과 연을 맺어두면 언젠가 뜻하지 않은 때에 큰 도움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
'그럼 이제 남은 건······.'
나는 책상에 내려놓은 지도를 다시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다음 군주회의까지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도 않다.
떠나는 건 빠를수록 좋으니 바로 다음 신비를 찾아서 군주성을 떠나야 되는데······.
'루트가 조금 고민된단 말이지.'
지금 내게 있어 최우선 목표는 칼데릭의 영역 내에 위치한 신비들부터 전부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이왕이면 가장 필요한 건 방어 계열의 능력이었다.
때문에 '부동 장막'을 가장 우선적으로 얻는 건 확정인데, 그 다음 경로를 아직 확실하게 정하지 못했다. 칼데릭 전체를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니 신중할 필요가 있긴 했지만.
"군주님."
그렇게 다시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집사장인 플로토가 돌아와서 나를 불렀다.
공방이나 상단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남았나 싶었는데 튀어나온 건 뜬금없는 말이었다.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4군주님께서 지금 성에 방문하셨습니다. 잠시 군주님을 뵙고자 찾아오셨다고 하십니다."
나는 마시고 있던 차를 뿜을 뻔한 걸 간신히 참고 천천히 찻잔을 내려놨다.
······지금 누가 찾아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