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키마스 공방 (3)
군주성으로 돌아와서 바쁘게 앞으로의 계획을 검토하던 중.
나는 집사장 플로토에게서 보고를 들었다.
"벌써 정리가 끝났나?"
바로 오늘 아침에 시킨 일인데 빨리도 끝났군.
나는 그가 넘긴 종이 몇 장을 훑어봤다.
밸리아 상단에서 지금껏 저질러온 구린 짓들, 그러니까 위법행위의 대략적인 목록이었다.
크게는 상단 차원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자잘하게는 상단주나 가신들 개인의 행실까지.
그래도 선은 또 나름 아슬아슬하게 잘 탔는지 상단의 존속이 위험할 정도의 큰 건덕지는 없는 듯했으나, 이 정도면 충분했다.
사실 애초에 조사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칼데릭에서는 군주가 곧 법이다.
밸리아가 법을 어겼든 말든 그저 내가 원하면 당장 상단을 공중분해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플로토가 군주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내게 할 때도, 웃기게도 군주가 지니는 권한이 아니라 몇 가지 제약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다. 대군주가 제정한 대헌령, 또 군주령 간의 비간섭 철칙과, 타국으로의 독자적인 군사권 발휘 불가 등의.
군주령의 기본 구조를 파괴할 정도의 독재만 아니라면 정말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럼에도 굳이 이런 조사를 행한 이유는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밸리아가 빌런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건 게임을 플레이했으니 알고 있지만, 나만 아는 일일 뿐이다.
아무 명분도 없이 내 꼴리는 대로 상단 하나를 짓밟아버리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집사장."
"예, 7군주님."
"상단주 밸리아와 알키마스의 공방주인 스칼릿을 성으로 데려와라. 공방주 쪽은 예의를 지켜서 정중히."
"즉시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플로토는 조금의 놀라움이나 의문스런 기색도 표하지 않았다. 그저 대답과 함께 신속히 떠나갔다.
일련의 명령들로 내 의도가 어떤지는 그도 당연히 파악했을 것이었다.
나는 다시 지도로 눈을 돌렸다. 하던 일을 마저 하며 여유롭게 두 사람을 기다리기로 했다.
조만간 또 보자고 했었는데, 바로 다시 보게 되겠네.
***
알키마스 공방의 대객실.
싸늘한 분위기 속에 상단주 밸리아가 차를 음미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역시 포션의 장인들이 모인 곳이라 그런지 차 맛도 훌륭하오. 비법을 배우고 싶을 정도군."
마주 앉은 자리의 스칼릿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넉살은 적당히 그쯤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상단주."
"허, 넉살이라니. 나야말로 진심 어린 칭찬을 그렇게 곡해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죠. 바쁘신 상단주의 귀한 시간을 뺏기도 죄송스러우니."
밸리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겠소? 늘 해왔던 제안을 반복할 뿐이고, 공방주는 언제나 그랬듯 그것을 거절하겠지."
스칼릿이 덤덤히 대꾸했다.
"상단의 자본력으로 알키마스 비전 포션을 대량생산하겠다는, 공방의 기술만 쏙 뽑아먹겠다는 뻔한 수작 말이죠."
"누누이 말하지만 공방주는 상단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너무 가득 차있는 듯하오."
"그 선입견을 만들어준 게 대체 누구였을까요. 재료 유통을 막고, 공방의 거래처들을 하나둘 회유하고, 바로 몇 년 전까지 온갖 치졸한 짓거리들을 동원해 공방을 압박한 게?"
밸리아의 옆에 앉은 안대의 사내, 바크가 킥킥 웃었다.
"공방주, 말 조심하시오. 우리도 충분히 예의를 지키고 있지 않소. 그런 누명을 증거도 없이 뒤집어씌우면 억울하지."
"······하."
"원로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공방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 가주님의 고집을 충성스런 가신들이 꺾어줘야 하지 않겠소?"
스칼릿의 근처에 서있던 한 늙은 원로가 코웃음을 쳤다.
"공방의 미래를 위하기에 더욱이 받아들이면 아니 될 제안이지."
"하하,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 상단은 포션 제작에 필요한 모든 자원과 자금을 공방에 전격적으로 지원한다. 이 제안의 대체 어디가 어떻게 나쁘다는 거요? 수익의 정산은 받지도 않고, 공방의 운영에도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는데?"
"그 대가가 공방과 가주님의 비전이지 않소. 인근의 플리케 시에 운영 중인 공방도 있겠다, 몇 년만 지나면 그쪽에서 우리 기술은 거의 흡수하고 상단의 비호 아래 공방의 거래처를 하나씩 좀먹겠지. 우리는 결국 천천히 몰락하거나, 아니면 반강제로 공방의 운영권을 상단에 넘기고 포션을 찍어내는 기계가 되겠군. 아니면 혹시 이보다 더 치밀하고 악랄한 수라도 있소이까?"
원로의 신랄한 말에 밸리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한마음으로 충성스런 가신들이라 부럽소, 공방주."
스칼릿은 인상을 구겼다.
이미 그가 주요 가신들의 회유를 시도한 전적이 여러 번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넘어간 이는 한 명도 없었지만.
"가문의 안위에 일평생을 바쳐온 자랑스런 분들이죠. 아무래도 늘 그랬듯, 의견이 조율될 일은 없을 것 같네요."
"그렇군. 늘 그랬듯."
"다음으로는 협박이 나올 차례인가요? 이제야 본론이라면 본론이군요."
"공방주."
밸리아가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애써 담담한 척 할 것 없소. 잘 알고 있지 않소? 상황이 바뀌었다는 걸."
"······."
"새로운 7군주께서 바로 어제 도시에 도착하셨고, 군주 대행은 더 이상 없소이다. 위대하신 군주께서 이런 사소한 다툼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가지실 것 같소? 아니, 만에 하나라도 가지신다 한들 과연 누구의 편을 들어주실까? 혹시 가문에 가보로 숨겨둔 엘릭서라도 있는 것이오? 그걸 바치면 공방의 편을 들어주실 수도 있겠군."
바크가 끼어들어서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공방주의 미색이 뛰어나니 다른 쪽을 기대해봐도 되겠소. 군주께서 인간 남성이시라는 소문도 있으니."
"······말, 가려서 하시오."
지금껏 스칼릿의 뒤에 서서 입을 다물고 있던 테인이 씹어뱉듯 말했다.
대놓고 가주를 모욕하는 발언에 다른 원로들의 표정도 험악하게 변했다.
그러나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한 술 더 떠서 말하는 바크였다.
"아니면 혹시나 하는 이야기인데, 형님의 아들과 혼약이라도 맺어보는 건 어떻소? 공방주도 혼기가 가득 차다 못해 이미 지난 나이 아니오. 이런 칙칙한 곳에서 연금술에만 묻혀 살 게 아니라 여인의 즐거움도 알아야지. 서로 좋은 짝이라 생각되는데."
"이······!"
막 폭발하려는 테인을 스칼릿이 손을 들고 저지했다.
"설마 그깟 저열한 도발이나 하자고 온 건가요. 그나마의 점잖은 행세도 갖다 버리셨군요."
밸리아가 조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이 아마 마지막 경고가 될 것이오. 공방의 미래를 위해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기대하겠소, 스칼릿 공방주."
"······."
"그럼 이만 가보겠소이다. 배웅은 됐소."
그렇게 걸음을 옮겨 방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원로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다짜고짜 찾아와 할 말만 하고 갔지만 상단주의 엄포에 틀린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의 상황은 공방에 너무도 불리하게 돌아갔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상단이 어떤 더러운 술수를 부릴지 알 수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원로들 모두가 상단이 공방에 어디까지 저열하고 치졸한 짓거리를 했는지 치가 떨리도록 겪어왔으니까.
"후우······."
스칼릿이 머리가 쑤신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저녁에 다시 모여서 회의를 여는 게 어떻겠소이까, 가주."
"예, 그래야겠네요. 그럼 일단은······."
스칼릿과 원로들이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테인은 그 대화를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슬며시 방 바깥으로 나섰다.
***
"상단주."
공방의 중앙홀을 지나 출입구로 향하고 있던 밸리아와 바크는 뒤를 돌아봤다.
그들을 불러세운 사람은 다름아닌 테인이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남았는가?"
테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가, 바크를 빤히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바크,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그 뜬금없는 말에 바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헛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지금 결투라고 한 거냐? 나랑?"
밸리아가 나서서 말했다.
"밑도 끝도 없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테인 아티마, 이건 공방주의 뜻인가?"
"아니, 내 단독적인 행동이오."
"갑자기 결투를 신청하는 이유는?"
"그가 누님을 모욕했으니까. 설마 외눈 참살자 바크가 나 같은 젊은 검사가 두려워 거절하진 않겠지."
바크가 하룻강아지를 바라보듯 같잖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한편으론 재밌다는 듯 테인을 바라봤다.
서로 간 사소한 마찰이 있을 때 결투를 통해 해결하는 건 이 세계에서는 흔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것도 얼추 비슷한 상대끼리지, 바크는 상단 제일의 전력이자 외눈 참살자라는 이명으로 그 명성이 자자한 전사였다.
'여기서 바크를 꺾어 무력을 과시하면 상단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테인은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행동이었다.
그 역시 나이에 비해 뛰어난 무인이었고, 최근에 큰 진전도 있었기에 나름의 자신이 있었으니까. 한마디로 젊은 치기였다.
바크가 밸리아를 슬쩍 쳐다봤다.
밸리아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뭐, 좋다. 원한다면 잠깐 어울려주마."
바크가 히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중앙홀은 넓어서 두 사람이 검을 맞대기엔 차고 넘칠 정도로 넓었다.
"테인 아티마, 근래 수도에서도 명성이 제법 있다지? 저번 다트마드 시의 검술 대회에서도 무려 본선에 올랐다던가. 젊고 재능 넘치는 무인이 도전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지."
테인이 먼저 검을 뽑아들고 바크도 느리게 검을 뽑아들었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검을 든 반대손을 까닥거렸다.
"핸디캡이라도 줄까? 난 오른손잡이지만 왼손으로만 검을 휘두르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멋대로 하시오!"
테인은 그가 깜짝 놀라 바로 양손을 사용하게 할 요량으로 바로 전력으로 나섰다. 검날엔 푸른 검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카앙!
기세 좋게 휘둘러진 검이 맥없이 막혔다.
어느새 한 손은 뒷짐을 진 바크가 검격을 막은 것이었다. 그의 검날에서도 푸른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너무도 쉽게 막혀버린 일격.
조금도 밀리지 않고 미동도 없는 검에 테인은 조금 당황했으나, 이내 다시 공격을 이어갔다.
카앙! 캉! 카카캉!
허공에 교차하는 푸른 선. 연신 울려퍼지는 굉음.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는 쫓기도 힘들 정도의 공방이 번쩍이며 오고 간다.
테인의 검은 빠르고 정교했다. 그는 나이에 비하면 분명히 높은 수준의 검사였다.
그러나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들은 바크의 가볍게 휘젓는 검에 모조리 막히고 파훼되어버렸다.
"큭······!"
시간이 흐를수록 검을 휘두르는 테인의 얼굴에 어두움이 드리웠다.
설마 이 정도로 격차가 컸을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째앵!!
그리고 어느 순간, 비산하는 쇳조각.
갑작스레 가속한 바크의 손이 테인의 검을 산산히 부숴버린 것이었다.
"컥······!"
그대로 충격을 받은 테인이 고통에 찬 신음을 뱉어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바크가 씩 웃었다.
그때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래층의 소란에 스칼릿과 원로들이 바로 나온 것이었다.
"······테인!"
스칼릿이 다급한 얼굴로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리곤 밸리아를 죽일 듯 노려봤다.
"이게 지금 무슨······!"
"아아, 오해하지 마시오. 먼저 결투를 신청한 쪽은 순전히 공방주의 동생이니까."
테인이 스칼릿의 시선을 피하며 참혹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침음을 흘렸다.
"······동생의 무례는 대신 사과드리겠어요. 승패는 이미 난 듯하니 결투를 그만 중단해주세요."
그에 바크가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멋대로 먼저 덤볐으면 적어도 끝내는 건 내가 해야 이치에 맞지 않겠소?"
푸욱!
그가 바닥에 쓰러져있는 테인의 팔에 칼날을 꽂아넣었다.
"크아악······!"
그 광경에 스칼릿과 원로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공방주의 동생이 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하니 이번 기회에 배움의 기회를 줘야겠지."
"자, 잠깐······ 그만!"
"쯧쯧, 죽이겠다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놀라시나. 공방에 질 좋은 포션이 많으니 치료야 별 문제없을 텐데."
바크가 그렇게 말하며 팔에 박힌 칼날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테인이 견디지 못하고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만! 이제 그만하라고요!"
스칼릿이 완전히 평정을 잃은 채로 애원하듯 소리쳤다.
바크가 즐겁다는 듯 킬킬 웃었다.
"하하! 필사적이시구만. 어디 무릎이라도 꿇고 좀 더 간절히 애원해보시오, 공방주. 그럼 이쯤에서 관둘······."
그때였다.
덜컹!
갑작스레 홀의 입구가 열리며 일련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밸리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방금까지 여유롭게 웃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철혈 기사단?"
7군주성 직속의 철혈 기사단.
웬만큼 중대한 일이 아니고서야 움직이지 않는 군주성의 최정예 전력이 갑자기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밸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스칼릿과 원로들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고, 바크도 천천히 테인의 팔에 박힌 검을 뽑았다.
기사들의 선두에 있던 금발의 사내가 주위를 슥 둘러보고는 저벅저벅 홀의 중앙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밸리아 상단의 주인인 밸리아."
"······."
"지금 당장 나를 따라오도록. 거부 권한은 없다. 질문 또한 받지 않겠다."
그리고 이번엔 스칼릿에게로 고개를 돌려, 훨씬 정중한 투로 말한다.
"알키마스 공방의 주인인 스칼릿 님 되십니까?"
"...예, 그런데."
"귀하도 동행해주시길 바랍니다. 위대하신 분께서 찾으십니다."
"······!"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차올랐다.
군주성의 기사가 위대하신 분이라고 표현할 인물이라면, 단 한 명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가운데 바크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설마 군주성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오? 갑자기 형님을 왜 데려가는 건지 적어도 이유는······."
쩌어엉!
바크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경고도 없이 순식간에 검을 뽑아든 기사가 그에게 검격을 날렸기 때문이다.
바크도 다급히 검을 뽑고 방어했으나 그의 칼날이 산산히 부서졌다.
"커헉······!"
사선으로 갈라진 가슴팍에서 선혈을 쏟아내며 바크가 무릎을 꿇었다.
기사가 그런 그를 싸늘히 내려다보며 검을 거두었다.
"질문은 받지 않겠다 했을 텐데. 네가 감히 군주님의 천명에 의문을 품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