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6화 (16/189)

알키마스 공방 (2)

포션 상점.

플라스크에 담겨 코르크 마개로 밀봉된 가지각색의 물약들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연구실 같은 분위기도 느껴졌다.

밖으로 급하게 빠져나갔던 점원이 두 명의 인물과 함께 돌아온 건 얼마 뒤였다.

푸석푸석한 머리칼에 칙칙한 로브를 입고 있는 여인과, 호위로 보이는 사내였다.

여인 쪽이 누구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스칼릿.'

딱히 그녀를 만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무려 백금화 3닢의 상품을 구매하겠다는 손님이니 주인이 직접 나서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Lv.41】

그리고 남자 쪽은······ 동생이겠지?

스칼릿에게 동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스칼릿과 다르게 연금술이 아니라 검술 쪽의 길을 걸어 공방의 무력에 보탬하고 있는 설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저 정도 레벨이면 상당한 실력자였다.

나를 발견한 스칼릿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대뜸 인사를 건네왔다.

"공방주인 스칼릿 아티마예요."

초췌한 눈에 피곤에 찌든 목소리였다.

게임에서도 연금술 연구에 반쯤 미쳐있던 설정의 인물로 기억하기에 의외는 아니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귀하께선 정말로 스칼릿을 구매할 의향이 있으신 건가요?"

포션의 이름이라는 건 알지만 어째 괜히 이상하게 들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액은 모두 선불인가?"

"아니요, 가격의 절반만 선지불해주시면 됩니다. 그보다 포션의 효능 설명을 해드리려고 왔는데..."

이것저것 묻지도 않고 구매하려는 내 태도가 이상했는지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서 오신 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꼭 말해야 되나?"

"그런 건 아니지만 신원이 확실한 편이 마음 편해서 좋으니까요. 일단 제 비전의 정수가 담긴 물건인지라."

그렇긴 하겠네.

위험한 조직과 연관됐거나, 아니면 다른 공방에서 왔다거나, 대충 이런 경우들을 염려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백금화 3닢의 거금을 선뜻 지불하겠다는 자가 보통의 손님일 리는 없으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물건을 찾을 때 이야기하지."

"알겠습니다. 차라도 대접해드릴 테니 잠시 앉았다 가시죠."

별로 개의치 않고 화제를 넘긴 그녀가 공방 본 건물의 객실로 날 안내했다.

구경만 할 생각으로 온 건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나는 차를 마시며 포션에 대한 설명을 스칼릿에게 들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힐링 포션이라 재생 효과가 매우 뛰어납니다. 절단된 부위도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았으면 이어붙이는 게 가능할 정도죠. 또 내장의 손상도 마시는 것으로 어느 정도까진 수복할 수 있어요. 물론 직접 부으면 효과가 훨씬 뛰어나고요."

"잘린 부위를 아예 새로 재생시키는 건 불가능한가?"

내 질문에 스칼릿이 조금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런 건 엘릭서쯤은 되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엘릭서는 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영약들을 통틀어 칭하는 명칭이다. 한마디로 헛소리 말라는 뜻이었다.

"부러진 뼈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데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지?"

이건 내 초재생과 최상급 포션의 효과를 비교하고 싶어서 한 질문이었다.

스칼릿이 대답했다.

"부위와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골절상은 손가락의 경우 보통 1분 내로 완치됩니다. 팔이나 다리는 적어도 몇 분이 소요되고요. 물론 뼈가 뒤틀리지 않게 제대로 맞춘 상태에서 사용하셔야 돼요."

역시 내 초재생 쪽이 훨씬 뛰어났다.

"그 밖의 부수적인 효과들로는······."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잠깐 딴생각에 잠겼다.

스칼릿은 뛰어난 연금술사다.

지금 실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게임 스토리에서 그녀는 자신의 비전으로 엘릭서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버금갈 정도의 영약을 만들어냈었으니까.

당장은 그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어쨌든 미래에는 그만큼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인재란 뜻이었다. 연을 이어둬서 나쁠 게 전혀 없는.

게임에서 스칼릿의 첫 등장은 무너져가는 알키마스 공방과 함께였다.

공방의 포션 제작 능력과 스칼릿의 비전을 탐한 밸리아 상단이 여러 더러운 술수를 부렸기 때문이다.

'엔록의 북부 상로는 전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고 했던가.'

집사장인 플로토에게 물어서 보다 자세한 정황도 전부 전해들었다.

아무리 알키마스가 수도의 유서 깊은 공방이라 해도, 자본이나 인맥 등 여러 면에서 밸리아 상단엔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는 미래대로라면 이 뒤로 알키마스는 상단에 반쯤 흡수되어 완전히 발목을 묶이게 된다.

그리고 본래라면 스토리 진행에 따라 플레이어의 활약으로 무사히 정체성을 되찾게 되지만······.

'지금은 그냥 내가 해결하면 그만이지.'

그것은 현재의 내 권력으로는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다.

상세 사용법과 주의사항까지 듣고 나서야 포션에 대한 설명은 끝났다.

대화를 매듭지으며 스칼릿에게 물었다.

"제작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적어도 한 달은 소요됩니다. 그런데······."

스칼릿이 망설이는가 싶더니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미 완성된 스칼릿이 한 병 있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품의 포션은 미리 만들어두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녀가 담담히 사정을 설명했다.

"바로 얼마 전에 다트마드 시의 시장에게 주문 제작을 받았다가, 직전에 거래가 무산됐거든요."

"어째서?"

"비리가 걸려서 직위 박탈에 재산까지 군주성에 싹 몰수당했다더군요. 하필 거래 중에 터져서 받았던 선금도 자금 조사 과정에서 회수당하고, 재고만 생겨 곤란하던 참이었죠."

저런.

"그래서 당장이라도 완성된 포션을 드릴 수는 있지만, 미리 만들어둔 걸 원하지 않으시면 새로 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포션의 효능이 떨어지나?"

"몇 년이라도 지난 게 아닌 이상에야 효능의 저하는 조금도 없다고 장담드릴 수 있어요. 저와 제 공방의 명예를 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걸로 받겠다."

내가 너무 순순히 수락하자 오히려 스칼릿이 놀란 기색이었다.

"저야 감사하지만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꺼내면서 내 의사를 묻지 않았나.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정말 어떻게든 재고를 처리할 생각이었으면 굳이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달 뒤에 새로 제작한 완성품이라 속이고 건네줬으면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거래는 자리에서 바로 이루어졌다.

잠시 뒤 스칼릿이 포션을 가져왔다. 포션은 병째로 고급스런 목함에 밀봉되어 있었다.

나는 백금화 3닢을 지불하고 포션을 챙긴 뒤,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공방을 나섰다.

"그런데 물건을 받으면 어디서 오신 분인지 알려주겠다 말씀하셨는데."

아, 그랬었지.

나는 스칼릿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조만간 또 만날 테니 미뤄두지."

내 말에 스칼릿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를 떠나 대로를 걸으며 포션을 다시 상자에서 꺼내 살펴봤다.

유리병 속에서 찰랑거리는 붉은빛의 액체.

어차피 이제 나는 포션이 필요없는 몸이기에 쓸 일은 없는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어마무시한 거금을 지불해가며 이걸 구매한 건 그저 호기심이었다. 어차피 돈 따위야 썩어넘치도록 있었으니까.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아셸이 쓰게 될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비상약으로 사둔 셈 치면 됐다.

'효과를 한번 직접 보고 싶긴 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다급한 비명이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누가 제발 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니 꼬질꼬질한 두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힘겹게 부축하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는데, 칼에라도 찔렸는지 배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둘을 보며 무시하거나 혀를 찰 뿐이었다.

"저건 또 뭔 난리야? 시끄럽게."

"아침부터 신나게 치고받았나 보네, 뒷골목 기생충 새끼들이."

······아, 그런 건가?

사람들이 무심하게 내뱉는 말을 들으며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부축하는 쪽도 성한 몸은 아니었기에 힘이 부쳤는지 곧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면서도 남은 힘으로 목소리를 쥐어짜내 도움을 요청했다.

"제 동생이에요! 포션이 있는 분이 있다면 제발 베풀어주세요! 도와주시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을 테니, 제발······!"

누군가 비웃듯이 말했다.

"저 애새끼가 미쳤나? 다 뒈져가는 거지 새끼한테 귀한 포션을 쓰는 병신이 어딨다고."

간절한 외침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아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드물게도 무표정이 깨져있었다. 안타깝다는 듯이 소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셸도 동생이 있었지.'

세인테아의 침공, 오성 중 일인인 창성에 의해 바로 눈앞에서 죽어나간 동생이 말이다. 그런 설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그녀에게 있어선 더욱 안타깝게 비치는 광경일 것이었다.

아셸이 내 손에 들린 포션을 힐끔 바라봤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움찔했다.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우물거리는가 싶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만 깨물었다.

'더럽게 답답하네.'

나는 작게 혀를 차고서 소년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셸과는 상관없이 어차피 도와줄 생각이었다. 이게 아무리 귀한 포션인들 사람 목숨보다 귀하겠나?

가까이 다가가자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러대던 녀석이 이쪽을 쳐다봤다.

"이리 내려놔라. 치료해줄 테니."

나는 마개를 열고 다친 부위에 포션을 천천히 부었다.

형인 소년이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어느새 주위도 조용해져있었다.

곧 살이 순식간에 아무는가 싶더니 출혈이 멈추고, 깊어 보였던 자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병에 든 양의 10분의 1도 쓰지 않은 것 같은데, 스칼릿이 설명했던 대로 과연 대단한 효과였다.

"으, 으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동생이 눈을 깜박이며 떴다.

다급히 동생의 상태를 살피던 녀석이 그제야 울먹이며 외쳤다.

"가, 감사합니다! 나으리!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를 부르짖는 소년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아셸과 함께 다시 가던 길을 가며 말했다.

"아셸."

"예."

"내가 이깟 포션을 아까워하기라도 할 것 같았더냐. 아니면 저들의 목숨을 구할 가치도 없다고 여길 것 같았더냐."

"······."

"앞으로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라. 네 생각과 의사를 말하라는 거다. 내가 바라는 건 명령에만 따르는 인형이 아니니."

아셸이 이제껏 본 적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러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저들을 도와주셔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스스로도 그걸 아는지 아셸은 자기가 말하고서 작게 헛기침을 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조금은 멀었던 거리감이 좁혀진 기분이었다.

***

"대체 누구였을까요, 누님?"

사내, 테인의 말에 스칼릿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나도 모르지."

"솔직히 좀 우려스럽습니다. 그런 엄청난 거금을 앉은 자리에서 바로 지불한 사람인데..."

"뭐, 말하는 걸 보면 머지 않아 다시 찾아올 모양이니 그때 알게 되겠지."

물론 스칼릿도 그의 정체가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백금화 3닢을 계약서조차 쓰지 않고 푼돈처럼 취급하던 태도.

어지간한 대부호나 고위 귀족도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

사업 이야기를 꺼내기 전 밑밥으로 금적인 허세를 부리는 이들이 간혹 있긴 했으나, 그렇다고 무려 백금화 단위로 허세를 부리던 미친놈은 없었다. 그쯤 되면 애초에 허세라고 할 수도 없었다.

'흑발에, 금안의 인간 남성······.'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자일까?

어쩌면 칼데릭이 아닌 다른 진영의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도시에 도착한 7군주도 흑발의 인간 남자라는 소문이 있던데······."

순간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서로를 쳐다봤다.

이내 스칼릿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렴."

"하하, 역시 그렇죠?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해본 말이었습니다."

군주가 직접 공방을 방문하다니.

차라리 어디 중립국의 왕족이라는 게 훨씬 현실성 있을 것이었다.

생각의 흐름이 자연스레 7군주에게로 이어졌다.

스칼릿의 표정에 조금 그늘이 졌다.

새로운 7군주가 어떤 인물일지는 둘째치고, 밸리아 상단 쪽의 문제가 더 컸기 때문이다.

지금껏 상단 측에서 큰 수작을 부리지 못했던 이유는 군주 대행의 철저한 섭정 덕이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새 7군주의 즉위로 끝이었다.

상단 측에서 서서히 다시 공방에 이빨을 드러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군주성의 중재는 기대할 수 없겠지.'

군주가 일개 공방과 상단의 다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질 가능성.

그럴 일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군주가 무관심하다면야, 성의 고위 관리들이 편들어줄 쪽은 당연히 그들의 배를 더욱 크게 불려줄 수 있는 밸리아 상단이었다.

스칼릿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몇 년 전까지 상단에 시달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방의 주인이자 아티마 가문의 가주로서의 책임은 무겁고 막중했다.

"아무것도 신경 쓸 일 없이 연금술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푸념하듯 내뱉는 말에 테인도 착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역시 가문의 일원이기에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누님. 상단 쪽에서도 당장은 눈치 보기 바쁠 테니 바로 뭔 수작을 부리지는 못하지 않겠······."

그때였다.

똑똑.

"들어오세요."

한 가신이 어두운 표정으로 방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예요?"

"밸리아 상단주가 바크까지 대동하고 공방에 직접 방문했습니다."

"······!"

"서로의 의견 조율을 위해 지금 당장 정식으로 대담을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스칼릿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별도 없이 찾아와놓고 정식으로 대담은 무슨..."

"어찌할까요, 가주님?"

"원로님들 전부 불러모으세요. 또 무슨 헛소리를 할지 들어는 봐야겠죠."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었기에 무시할 수도 없었다.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스칼릿의 안면에는 더욱 깊은 수심이 드리운 채였다.

상단 쪽에서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빨리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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