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키마스 공방 (1)
대도시는 혼잡함과 다채로움의 상징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탄 마차가 나아가고 있는 대로에는 오로지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행로 양옆에 검을 치겨든 채 간격을 두고 정렬해있는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 그리고 지켜보는 시민들.
스쳐가는 얼굴들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엿보였지만 대체로 긴장과 두려움이었다.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나는 스스로 굉장한 폭군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군주 자리가 쭉 비어있던 탓인가.'
몇 년 만에 새로운 지배자를 맞이하게 된 상황이니 불안할 만도 하겠다 싶었다.
군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절대자이고, 그런 군좌에 미친놈이 앉으면 그야말로 산지옥이나 다름없게 되니까.
대표적인 예로 폭왕의 6군주령이나 흑해 여제의 8군주령이 그러했다.
하지만 이들의 걱정은 전부 쓸데없는 것이었다.
내 목숨줄 챙기기도 바쁜데 군주성에 눌러앉아 여유롭게 황제 놀음이나 할 시간이 있겠나?
나는 이 땅을 직접 간섭해서 다스릴 생각 따윈 없었다. 지금껏 돌아가던 대로 알아서 돌아가게 놔둘 요량이었다.
'해결할 것만 해결하면 말이지.'
이곳 버크혼 시에 위치한 알키마스 공방.
그곳의 주인인 연금술사 스칼릿.
그녀가 바로 다시 히든 피스를 찾아 군주성을 떠나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정확히는 내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인 인재였다. 아셸처럼.
최우선 문제는 스펙업이지만, 지나는 경로에 있어 챙길 수 있는 인재들도 틈틈히 챙길 생각이었다.
'지금 시기면······ 아마 밸리아 상단 때문에 애먹고 있을 때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는 이내 도시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성에 도착했다.
군사들의 행렬은 더럽게 길어서 도시 입구에서부터 군주성 정문까지 쭉 이어져있었다. 이 무슨 쓸데없는 인력 낭비일까.
정문을 통과한 뒤 마차에서 내렸다.
가장 앞에서 날 맞이한 두 사람은 고급스런 의복을 입고 있는 엘프와, 한눈에 봐도 집사로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엘프가 공손하게 인사를 해왔다.
"엔록의 새로운 주인께 인사 올립니다. 7군주령의 군주 대행을 맡고 있던 바슬란이라고 합니다."
대행? 그런 것도 있었나.
군주 자리를 마냥 비워두고만 있었을 리도 없으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가 성 안내를 하며 이것저것 설명하겠구나 싶었는데 이어진 말은 의외였다.
"대군주성으로 복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7군주님을 뵙고 인사드리고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복귀?"
"예, 저는 본래 대군주성 소속의 행정관입니다. 대군주님의 명을 받고 이곳에 파견되어 섭정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런 거냐.
군주 자리를 대신 맡을 정도면 어지간히도 고위 관리였던 모양이다.
옆에 있던 노인도 나서서 자신을 소개했다.
"성의 집사장인 플로토라고 합니다."
진짜 안내인은 이쪽이었다.
대행은 곧바로 성을 떠나갔고, 나는 플로토의 안내에 따라 성의 중앙홀로 들어섰다.
내부는 딱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였다.
판타지 세계의 성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풍경. 넓고, 화려하고, 장엄하다.
"연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군주님."
그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풀어져서 놀고 먹을 시간 따윈 없었다. 하지만······.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어차피 당장 성을 떠날 것도 아니고, 이미 다 준비해둔 것 같은데 파해버리면 하인들만 개고생 시킨 게 된다.
그리고 성의 신하들의 얼굴도 한 번은 살펴봐야 하니 연회도 어느 정도는 할 일의 연장이었다.
······솔직히 다 핑계고 나도 사람인지라 잠깐 정도는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도 했으니까.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오늘 하루는 편히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
버크혼 시의 내곽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
엔록의 북부 변경부터 시작해 버크혼까지의 상로를 완전히 틀어잡아 독점하고 있는, 밸리아 대상단의 건물이었다.
상단주실에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새 7군주에 대한 정보는 어떻소, 형님?"
안대를 낀 사내의 말에 중후한 풍채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바로 상단의 주인인 대상인 밸리아였다.
"별 수확은 없다. 그나마 듣기로는 완전히 출신 분명의 외부자라더군. 그리고 인간이고. 행차에서 얼굴을 봤느냐?"
"멀리서 살짝 보긴 봤소. 꽤나 창백하게 생겨먹었던 것 같은데."
"바크, 듣는 귀가 없어도 항상 입을 조심하라고 했다."
"거 참, 아무리 그래도 둘밖에 없는데 좀 편하게 말해도 되잖소."
안대 사내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뭐, 어쨌든 우리한테는 좋은 상황이 된 게 아니오? 그 끈질긴 연금쟁이 놈들도 이제 바람막이가 사라진 셈이니. 큭큭."
알키마스 공방.
버크혼 시에 자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연금술사 집단.
그 비전을 빼내기 위해 오래 전부터 많은 공작을 벌여왔었지만, 7군좌의 공백과 함께 한동안 무산이 됐었다.
요 몇 년간 새로 파견된 군주 대행은 철저히 원칙에 따라서만 도시를 관리했으니까.
당연히 뇌물 따윈 통하지 않았고, 군주 대행이 엔록의 섭정을 행하는 동안은 공방에 뻗치던 암수도 전부 거두고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군주의 등장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그들은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자.
아랫것들의 세력과 이권 경쟁은 그들에게 있어 벌레들의 다툼에 지나지 않아서 별 관심이 없다. 전 7군주가 그러했듯이.
새로운 7군주가 폭왕이나 흑해 여제 같은 미치광이만 아니라면야 상황은 다시 상단에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었다.
"내일 공방을 방문해야겠다."
"바로 압박에 나설 생각이오?"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해진 건 맞지만 아직 7군주가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모른다. 최대한 빠르게 그들 스스로 백기를 들게 만드는 게 최선이지."
"그건 그렇군. 공방주 년하고 원로 영감탱이들이 지금쯤 아주 똥줄이 타고 있겠어, 큭큭."
밸리아와 안대 사내가 마주 보고서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
연회를 즐긴 뒤 다음날.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해야 할 일들을 시작했다.
'많이도 가져왔네.'
통에 한가득 담겨 꿈틀거리는 애벌레들을 내려다봤다.
내 명령을 받고 집사장이 가져온 것이었다.
이 애벌레들은 즉살의 정밀한 탐구를 위해서 쓰일 실험 재료였다.
"시작해볼까."
나는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실험의 목적은 체외로 배출된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혈액까지 즉살의 효과가 유효한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방식은 단순했다.
애벌레에게 핏물을 떨어뜨리고 즉살을 발동한다. 그리고 성공할 때마다 발동 시간을 5초씩 지연시킨다.
그렇게 수십 마리의 애벌레를 희생시키고 나서야 실험을 마칠 수 있었다.
'대충 3분 정도인가.'
실험 결과, 즉살이 유효한 시간은 약 3분 정도였다.
몸 밖으로 흐른 지 3분 이상이 지난 피로는 즉살을 발동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뭐가 됐든 핵심은 혈액으로도 즉살을 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활용법을 고민하며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뱀파이어의 혈술이었다.
혈액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라면 즉살과의 시너지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질 테니까.
'문제는 그렇다고 내 종족을 바꿀 수도 없다는 거지.'
타고난 태생인 종족을 바꿀 방법은 보통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바꿀 수 있더라도 웬만하면 계속 인간이고 싶기도 했고.
뱀파이어가 아니더라도 혈술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
하나 떠오르는 게 있긴 했지만 그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할 방법이었다.
'일단 뒤로 미뤄두고.'
어쨌든 새로운 정보를 얻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았다.
예를 들어서 즉살이 통하는 대상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라거나. 언데드나 영체 등에도 과연 즉살이 통할까?
이것들도 기회가 되면 차차 확인을 해봐야 할 것이었다.
이제 다음으로 처리할 일은 알키마스 공방 문제.
나는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셸에게 말했다.
"잠시 외출해야겠다."
한번 공방에 직접 찾아가봐야겠다.
이 세계의 포션이란 게 얼마나 효능이 뛰어난지 궁금하기도 하고, 구경도 할 겸.
***
아리아는 알키마스 공방의 견습 연금술사였다.
그녀의 오전 업무는 상점 건물의 카운터를 맡는 것.
공방의 주 수입원은 버크혼을 포함한 인근 도시들의 시의회나, 모험가들이다.
시의회 쪽은 대체로 대량 구매를 하기에 직접 상점에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모험가들은 아직 활발히 활동할 시간대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찾아오는 손님이 별로 없었기에 아리아는 썩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함······ 흡."
쩍 하품을 하던 아리아의 눈에 상점으로 막 들어온 손님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손님은 젊은 남성과, 호위 기사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특히 남자 쪽의 용모가 굉장히 미려했다.
아리아는 아침부터 눈호강을 했다고 생각하며 밝게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열된 포션들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른 도시에서 온 도련님인가?'
본 적 없는 얼굴이기도 했고, 태도가 구매보다도 구경을 목적으로 온 것처럼 보였기에 아리아는 그렇게 짐작했다.
꽤 한참 포션들을 구경하던 남자가 카운터로 가까이 다가왔다.
"포션들은 진열된 게 전부인가?"
"아, 진열된 건 전부 중품 이하의 포션들입니다. 상품의 포션은 미리 만들어둘 수 없으니 전부 주문 제작으로만 받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다시 물어왔다.
"공방에서 가장 품질이 뛰어난 힐링 포션을 구매하고 싶은데."
그 말에 아리아는 속으로 슬쩍 웃었다.
아무래도 이 물정 모르는 도련님은 상품의, 그것도 알키마스제 포션이 얼마나 비싼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가장 품질이 뛰어난 최상품의 힐링 포션이라면 '스칼릿'이 있습니다만."
"공방주의 이름 아닌가?"
"예, 공방주님의 비전이 담긴 포션이니 이름도 그렇게 지어졌죠."
"얼마지?"
아리아는 조금 골려줄 생각으로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백금화 3닢입니다!"
금화로 따지면 무려 300닢.
웬만한 부호도 가벼운 마음으로 선뜻 구매할 수 없는 액수다.
아리아는 흠칫 기겁할 반응을 기대하며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구매하겠다."
"······예?"
"주문 제작이라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지? 금액은 선불로 모두 지불하면 되나?"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품에서 꺼내든 건 금화와 백금화가 뒤섞여 한가득 담긴 돈주머니였다.
아리아는 경악으로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자, 잠시만요! 바로 공방주님을 모셔오겠습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