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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3화 (13/189)

초재생 (3)

벨르바고라의 몸체가 허물어지며 지면을 강타했다.

그 충격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중심을 되찾았다.

나는 그야말로 지옥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온 기분을 느끼며 쓰러진 놈을 바라봤다.

눈을 똑바로 뜬 채 즉사해 미동도 하지 않는 게, 마치 거대한 껍데기를 두고 영혼만 그대로 소멸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이건 진짜 아슬아슬했어······.'

좀 과장해서 사람과 개미에 빗대어도 될 정도의 크기 차이였다.

만약 놈이 혀만 한 번 할짝거렸어도 난 어디론가 튕겨나가 꼴사납게 죽었을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끝내 무사히 접촉에 성공했을 때는 희열이 차올라서 별 헛소리까지 튀어나왔다.

뒈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에서도 그런 여유라니, 제왕의 혼 때문에 내 정신은 어딘가 살짝 맛이 가버린 게 틀림없었다.

"으아······ 어······."

맥빠진 신음에 나는 두 사람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칸이 보였다.

아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서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야 피어에서 벗어난 모습이었다.

분위기가 정적에 휩싸였기에 나는 아무런 말이나 내뱉었다.

"이런 곳에 있을 만한 몬스터는 아니군."

"······."

딱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피어의 충격이 컸는지 칸이 거의 탈진 상태였기에,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바위에 앉아 벨르바고라의 시체를 구경하고 있는데 아셸이 뜬금없는 말을 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이라 평소에는 감정을 읽기 힘든 아셸이었으나, 이번에는 어딘가 시무룩한 기색이 섞여있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호위를 제대로 못했다고 이러나?'

이번 건 완전히 상정 밖의 재해였다.

그녀의 능력을 한참 벗어난 일이었으니 탓하는 마음이 있을 리 없었다.

군주가 직접 나서야나 처리할 수 있는 괴물을 그녀가 무슨 수로 상대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주어진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 본인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런 성격이기는 했지.

매사에 진중하며 스스로에게 한없이 엄격한, 그런 고지식함을 그대로 그려낸 듯한 인물이 바로 아셸이었다.

'아······ 아니면 그건가?'

어쩌면 벨르바고라의 앞에서 조금의 저항조차 하지 못한 게 충격이 컸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입을 열었다.

"일부 몬스터나 종족 중에는 피어를 내뿜는 것들이 드물게 있다."

아셸이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하는 반응. 역시 잘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피어는 지니고 있는 몬스터 자체가 드물고 명확한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능력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레벨이면 피어를 내뿜는 다른 몬스터를 만난 적이 있더라도 웬만해선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을 터.

그러니 이번의 생소한 경험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어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공포를 특히 크게 유발시키는 능력이다. 보통은 싸울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패닉에 빠지지."

"······아."

그제야 아셸은 놀란 듯 벨르바고라의 시체를 돌아봤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군."

"예."

"저 미물은 마경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강력한 놈이었다. 네 정신이 나약한 탓이 아니었으니 신경 쓸 것 없다."

위로의 뜻으로 한 말에 아셸은 왜인지 조금 당황한 눈빛이었다.

대답 없이 고개를 꾸벅인 그녀가 다시 입을 다물고 침묵 상태로 돌아갔다. 하여튼 말 섞기 힘들구만.

이윽고 칸도 얼추 정신을 차렸다.

"상태가 좋지 않다면 더 쉬어라."

"아, 아닙니다.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칸은 진이 다 빠진 기색이긴 했으나 몸을 움직일 만큼은 회복한 듯 싶었다.

90레벨 몬스터의 피어에 그대로 노출됐으니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용했다.

아마 이번 산행은 그의 모험가 인생에 짧지만 여러모로 가장 기억에 남는 모험담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정말 저런 게 도시로 내려왔으면 폐허가 됐겠군..."

여전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듯 칸이 벨르바고라의 시체를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왜인지 과하게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방금 어째 벨르바고라 쳐다볼 때랑 비슷한 눈빛이지 않았나?

'나까지 괴물 취급이냐.'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눈으로는 내가 놈을 툭 건드리기만 해서 죽여버린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아셸도 아닌 척 하지만 은근히 시체를 힐끔거리며 살펴보고 있고.

어쨌든 위기도 무사히 넘겼으니 본 목적을 마저 완수할 때였다.

"이동하지."

주위에는 어느새 무성한 흑목들이 숲을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다.

신비가 숨겨진 곳이 가까웠다.

***

칸이 말했던 대로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숲 한가운데 홀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거대한 바위.

뚱뚱한 위아래에 비해 중간 부분만 잘록하게 들어간 형태는 누가 봐도 모래시계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도착했네.'

모래시계 바위를 찾았으니, 이제 남은 건 입구를 찾는 일뿐이다.

바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절벽이 있었다. 아까 올라왔던 것보다는 낮은 절벽이었다.

'대충 저쯤이었던 것 같은······ 아닌가? 저쪽인가?'

주변을 살피며 방향을 가늠해봤다.

하지만 기억도 애매하고 실제로 보니 헷갈려서 그냥 좀 고생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충분히 편하게 왔다.

나는 절벽 아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절벽면을 유심히 살폈다.

두 사람은 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없이 내 뒤만 졸졸 쫓았다.

몇십 분쯤 지났을까, 벽면 한쪽에 내 키높이만큼 세로로 갈라져 있는 미세한 틈을 발견할 수 있었다.

틈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냉기에 나는 반쯤 확신하고서 말했다.

"아셸."

"예."

"이 틈을 적당히 넓게 부숴라."

아셸은 내가 가리킨 틈을 바라보고는 별말 없이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슬쩍 뒤로 물러섰다.

콰아앙!

그녀가 벽면에 손바닥을 붙인 채 기운을 터뜨리자 벽이 우르르 무너졌다.

틈 안쪽은 동굴처럼 텅 비어있어서 한두 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입구가 만들어졌다. 역시 여기가 맞군.

숨겨진 통로의 등장에 아셸과 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나는 두 사람을 입구에 남겨둔 채 안쪽으로 홀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공기가 서늘하다.

통로는 완만하게 경사진 내리막으로 이어져있었는데, 좀 내려가자 더 이상 바깥의 빛이 들어오지 않아 금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타이밍에 챙겨왔던 발광석을 품에서 꺼내들었다.

꽁꽁 싸매둔 보자기를 풀자 밝은 백색광이 퍼지며 순식간에 내부가 밝아졌다.

"······어우."

동시에 굴 벽면 곳곳에 붙어있던 벌레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바퀴벌레나 지네 같은 것들이 꽤나 한가득.

한 차례 작게 혀를 차고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갈수록 내리막의 경사가 서서히 기울어졌기에 걸음을 떼는 것이 좀 더 신중해졌다.

끝내 손으로 바닥을 짚지 않고는 내려갈 수 없는 지경이 됐을 땐 슬슬 식은땀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까딱 미끄러지면 엿 되겠는데.'

여기 경사가 원래 이 모양이었었나? 얼마나 더 깊이 들어가야 나오는 거야?

나는 들고 있던 발광석을 입에 물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나마 바닥이 거칠고 울퉁불퉁해서 발을 디딜 공간이 많은 건 다행이었다.

여기서 더 가팔라지지만 않는다면야, 멍청하게 발이라도 헛디디지 않는 이상 넘어질 일은 없······.

투둑.

"아."

순간 바닥을 짚은 발이 미끄러지며 몸의 중심이 무너졌다.

이 씨발, 뭔 플래그도 아니고 생각하자마자······.

필사적으로 바닥을 손으로 짚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손바닥만 거하게 갈리며 내 몸은 비탈 아래 어둠으로 바퀴처럼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쿠웅!

머리와 팔에 아찔한 충격이 울리고 나서야 추락이 멈추었다.

나는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꿈틀거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욱씬거리고 입 안에 비린 맛이 느껴졌다.

"윽······."

볼을 타고 무언가 줄줄 흘러내린다.

설마 하며 닦았더니 손이 시뻘건 색으로 적셔졌다. 피였다.

인상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턱에 맺힌 핏물도 닦아내고 왼팔을 내려다봤다.

마찬가지로 피칠갑이 되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너덜너덜한 게, 부러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돌겠네, 진짜."

이렇게까지 심하게 다쳐본 적은 처음이었기에 순간 당혹스러움이 몰려왔으나, 이내 차갑게 가라앉았다.

팔을 찌르는 격통이 더럽게 아팠지만 이성은 언제나처럼 흐트러지지 않았다.

잠시 거칠어진 숨을 고른 뒤,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내리막이 끝나고 옆쪽으로 자그마한 통로가 꺾여서 이어진 것이 보였다. 모퉁이 벽에 부딪혀서 멈춘 거였나.

몸이 만신창이가 된 것치고는 한참 부족한 보상이긴 했으나, 어쨌든 비탈을 순식간에 내려오긴 했다.

나는 멀쩡한 팔로 발광석을 주워든 뒤 통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와중에 발목도 접질렀는지 오른쪽 발을 디딜 때마다 찌릿한 고통이 올라왔으나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아갈수록 통로가 점점 넓어지더니 안쪽에서부터 희미한 녹색 빛이 새어나왔다.

"오."

마침내 끝에 도달하자 펼쳐진 풍경에 짧은 감탄을 뱉었다.

넓고 휑한 공동, 그 정중앙의 바닥에 새겨져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녹색 문양.

나는 고통도 잊고 환하게 웃으며 문양을 향해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저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경계는 없었다.

드디어 찾았다. 초재생 신비.

'생각보다 꽤 크네.'

신비의 문양은 마법진처럼 원형에 가까웠는데, 직경이 몇 미터는 될 정도로 컸다.

바로 앞까지 접근한 나는 잠시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일단 찾기는 찾았는데, 어떻게 해야 이 신비를 얻을 수 있는 건지 몰랐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는 일단 발견한 다음 가까이 접근만 하면 알아서 신비를 획득했다고 메시지가 떴었으니까.

'그냥 건드리면 되려나?'

달리 방법도 없었기에 한쪽 무릎을 꿇고 문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화아악!

그러자 문양의 빛이 한순간 환하게 터졌다.

나는 당황해서 손을 뗄 뻔했다가 멈췄다.

빛이 맞닿은 손을 타고 올라 내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내 빛이 전부 흡수되고 문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공동이 어둠에 가라앉았다.

"······."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바닥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왼팔을 내려다봤다.

부러진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며 재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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