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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0화 (10/189)

아셸 그론힐트 (2)

훈련을 마친 뒤에는 자유 휴식이었지만, 아셸은 땀을 씻어내고 옷만 갈아입은 채 곧바로 어딘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케일런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자가 바로 그 7군주였던 건가.'

아까 훈련 중 묘한 시선을 보내왔던 남자.

근래 성에서 새로이 즉위한 7군주에 대한 소문이 무성히 들끓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길었던 방랑을 마치고 대군주성의 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셸은 칼데릭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부하들에게는 악독하기 그지없던 부단장 캄슨이 그렇게나 바짝 얼었던 걸 보니, 군주라는 존재의 위상이 조금은 실감이 되었다.

그런 자가 자신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부르는 것인지 그녀로서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설마 무언가를 눈치챈 건가, 마음 한편에 미약한 불안감을 느낄 뿐.

"지금부터 뵙게 될 분이 7군주좌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걸 깊이 명심하길 바랍니다. 부디 언행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

케일런에게 마지막 주의를 들은 뒤,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서 도착한 넓은 방에는 그가 앉아있었다.

철컥.

문이 닫히고 홀로 7군주를 마주하게 된 아셸은 일단 예를 차려 인사했다.

"7군주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백린 제5기사단 소속의 견습기사, 아셸이라고 합니다."

형형한 황금색의 눈동자가 빤히 이쪽을 응시한다.

"앉아라."

7군주가 반대편 자리로 손을 뻗었다.

아셸은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방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7군주는 아무런 말도 없이 차를 음미하기만 했고,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던 아셸은 찻잔만 빤히 내려다봤다.

머지 않아 예상 못한 말이 대화의 시작을 끊었다.

"힘을 감추고 있는 건가?"

"······."

"그만한 실력으로 견습기사로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어째서 힘을 감추고 있는 건지 궁금하군."

적잖은 당혹감과 함께 아셸의 머리에 떠오른 건 두 가지 의문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것을 묻는 것인지.

만일 아까 훈련을 보고 지켜보고 있던 때부터 눈치챈 거라면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그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대체 무엇을 인지하고 그 사실을 눈치챘단 말인가? 마력? 아니면 다른 이질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부정이었다.

아셸은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며 7군주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부정할 생각이라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본론?

바로 이때까지도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앞선 이야기 따위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백월족."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들었는데 생존자가 있었을 줄이야. 대군주성으로 온 이유가 무엇이지?"

한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든 아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본 실력을 감춘 것을 눈치챈 것까지는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백월족이라는 사실은 대체 어떻게 알아차렸단 말인가?

그것은 더 이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또한 앞으로도 알 수 없어야 할······ 그녀가 품고 있는 가장 깊은 비밀이었다.

그런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버린 눈앞의 존재에게 적의를 쏘아낸 건 반사적이며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관둬라. 네 힘으로는 무리니."

귓가에 들려온 무심한 음성에 아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7군주의 시선은 한없이 깊고 고요했다.

그 정적인 위압감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며, 그녀는 천천히 적의를 거두었다.

"······."

그래······ 무리다.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존재는 칼데릭의 군주.

전 대륙에서도 정상급의 강자. 세인테아의 그 괴물 같은 오성보다도 강하다고 알려진 존재.

감추고 있는 힘을 단번에 간파당했다는 사실만 봐도 격의 차이는 아득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습이든 탈출이든 무엇을 시도한들 부질없을 것이 명백했다.

그 사실에 무력함을 느끼며 아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흘러나온 피에서 비린 맛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 절망과 허탈함을 딛고 이곳까지 왔는데, 뭘 해보기도 전부터 이런 꼴이란 말인가?

"내게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분함에 떨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자 7군주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군. 나는 널 겁박하려는 것이 아니다."

"······."

"정체를 들킨 게 무엇이 그리 두려운 거지? 이곳은 세인테아가 아니라 칼데릭이다. 종족 차등이 없는 이 땅에서 백월족이라고 다를 게 있을 것 같나."

그 말에 아셸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말로는 얼마든 쉽게 떠들 수 있다.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일족도 고향도 모두 잃은 비애를, 홀로 살아남아 세상에 내던져진 고독과 불안을,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압박을.

이곳은 세인테아가 아닌 칼데릭.

오직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에 합당한 영화를 쥘 수 있는 힘과 기회의 땅.

머리로는, 이성으로는 아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족이 멸망한 그날부터 마음 한편에 깊이 각인된 경계심은 그녀를 무엇도 쉬이 믿을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한데, 당신 따위가 대체 무엇을 안다고······.

"하지만 이해한다."

아셸은 흠칫했다.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네가 마음 깊숙이 품고 있을 한과 비애를, 그 불안과 고독을. 지금 나에게 보이는 과한 경계심은 모두 거기서부터 비롯된 것이겠지. 안 그런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 자는?

아셸은 조금 멍한 표정으로 7군주를 바라봤다.

다시 그의 입이 열렸다.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

라사의 세계관에는 다양한 종족이 존재한다.

마족은 논외로 두고 가장 그 개체수와 세력이 우세한 인간, 엘프, 수인부터 시작해 그 밖의 많은 약소, 희소 종족들까지.

백월족은 그 개체수가 무척이나 적은 희소 종족이었다.

외형은 인간과 별다를 게 없으나, 마력을 그들만의 고유한 성질로 변환시킬 수 있는 특질을 지닌 종족.

세가 약한 종족들은 세간에 섞이지 않고 야생의 땅에서 부족 단위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백월족 또한 세인테아 극서부에 위치한 알텐 대산맥에서 그들만의 터전을 이루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존재였다.

하지만 몰락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현시점으로부터 바로 몇 년 전, 백월족은 어떠한 이유로 세인테아에 의해 단 한 명의 생존자만을 남기고 완전히 멸족당했다.

지금 내 눈앞에 앉아있는 아셸이 바로 그 유일한 생존자였다.

'살아남은 다른 동족을 찾기 위해 긴 시간을 방랑했다고 했지.'

하지만 아셸은 찾지 못했다.

몇 년의 긴 세월간 갖은 위험을 감수하고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했음에도, 결국 단 한 명도.

기나긴 방랑 끝에 그녀가 정착한 장소는 바로 이곳 칼데릭이었다.

끝내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 말고 또 살아남은 동족이 분명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칼데릭은 무엇보다도 능력을 중시하는 땅.

만약 이곳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 자리를 잡는다면, 그리고 백월족 전사로서 전 대륙에 널리 명성을 떨칠 수 있다면.

어쩌면 살아남은 동족이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른다.

만약 끝내 찾아오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힘과 권력을 쌓아 세인테아에 복수할 최소한의 기회라도 노릴 수 있을지 모른다.

······아셸은 그런 생각으로 이곳 칼데릭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힘과 정체를 숨기고 견습기사로 있는 이유는, 아직 칼데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심스레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거였겠지.

백월족은 평소엔 인간과 구분할 수 없지만, 고유 특질로 본신의 힘을 내면 전신의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종족이었으니까.

결국 가까운 미래에 그녀는 스스로를 완전히 드러내고 대군주성의 흑린이 된다. 하지만······.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지금은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내 편으로 끌어들인다.

나는 이어서 입을 뗐다.

"네가 칼데릭으로 온 목적은 대충 짐작이 된다."

"······."

"명성을 퍼뜨려 살아있는 동족을 찾아오게 만들기 위함이거나, 세인테아에 복수를 위함이거나, 혹은 둘 다거나······ 표정을 보아하니 정답인 모양이군."

아셸의 얼굴은 이제 경악으로 만연했다.

속마음을 완벽히 간파당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슬슬 이야기의 본 목적을 꺼낼 때가 되었다.

"네 목적이 그렇다면, 내 호위 기사가 될 것을 제안하마."

아셸이 한순간 벙찐 기색이 됐다.

갑자기 이건 또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겠지.

"그게 무슨······."

"나는 지금부터 많은 일들을 할 것이다. 그러니 호위가 되어 곁을 따라다녀라. 칼데릭 7군주의 검으로서, 최측근으로서, 그리고 백월족의 전사로서 대륙에 네 명성을 널리 퍼뜨릴 좋은 기회가 되겠지."

"······!"

"스스로의 힘에만 기대기보다는, 내 이름을 빌리는 것이 목적을 이루기에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야말로 완벽한 구실이었다.

내 제안은 대륙에 최대한 널리 명성을 퍼뜨리겠다는 목표를 이루기에 굉장히 효과적일 방법일 테니까.

아셸이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이내 이해할 수 없다는, 재차 경계심이 깃든 얼굴로 내게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그래, 당연히 그렇게 묻겠지.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녀로서는 내 제안이 이유 없는 일방적인 호의로 느껴질 것이다.

군주씩이나 되는 존재가 정말로 호위가 필요해서 이러는 건 아니라고 여길 테니까.

물론 난 진심으로 호위가, 그녀의 무력이 필요한 것뿐이었지만 그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굳이 말하자면 이미 앞서 이야기한 것들이지. 내가 네 처지를 이해하기에. 그리고 우연히 네 능력이 눈에 띄었기에. 그래서 자연스레 관심이 끌렸을 뿐."

"······."

아셸은 여전히 불신이 섞인 기색이었다.

역시 이런 애매한 대답으로는 납득시킬 수 없나.

합당한 이유.

그에 대해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한 시간 동안 열심히 고민했지만 결국 달리 마땅한 핑계를 찾지 못했다.

그녀의 일족인 백월족과 어떠한 인연이 있어서······ 라는 전형적인 시나리오도 생각해봤지만, 썩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산맥 깊은 곳에서 지들끼리 잘 살던 소수 종족과 인간인 내가 엮일 일부터가 뭐가 있겠는가.

또 어떻게든 이야기를 짜낸다 해도 괜히 어설프게 거짓말을 하는 건 당장이든 나중이든 들킬 위험이 컸다.

내가 백월족에 대해 뭘 엄청나게 잘 아는 것도 아니었기에.

때문에 끝내 나온 결론은 믿음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냥 적당히 둘러대는 것이었다.

당장은 아셸이 어떻게든 내 제안을 수락하게만 만들면 충분했으니까.

애초에 첫 대면부터 상대의 사정과 비밀을 죄다 까발려놓고서 신뢰를 얻겠다는 건 오만이었다.

그녀와의 우호적인 관계는 일단 호위로 끌어들인 다음에 천천히 쌓아도 됐다.

"대답이 되지 않은 모양이군. 하지만 이유 같은 게 중요한가?"

나는 다시 한 번 핵심을 강조했다.

"나는 네가 호위 기사가 되길 원하고, 너는 그로써 목적을 보다 수월하게 이룰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단지 그뿐이다."

이유야 뭐가 됐든 내 제안은 아셸에게 있어 더없이 좋은 기회다.

지금의 그녀에게 이 이상의, 무려 군주의 위명을 빌릴 수 있는 것 이상의 좋은 방안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아셸의 미간이 좁아졌다. 고민이 깊어진 기색이었다.

더 이상의 말은 사족일 것 같았기에 나는 대답을 기다리며 조용히 찻물을 홀짝였다.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를 수하로 삼기를 원하시면 뜻대로 하시면 될 텐데, 어째서 이런 제안을 하고 수락을 구하시는 겁니까?"

군주라면 견습기사 하나를 데려가는 것쯤이야 얼마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러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네 의사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비밀을 빌미로 널 겁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달리 세워둔 더 좋은 계획이 있다면 제안을 거절하면 된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솔직히 거절하면 곤란하다.

조금은 그녀를 압박할 의도로 '비밀'과 '더 좋은 계획'이라는 말을 은근히 끼워넣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여쭙겠습니다만, 제가 백월족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능력의 일부다."

나는 의문을 간결하게 일축해버렸다.

마법에 신비에 온갖 능력이 존재하는 세계이니 어물쩡 넘기면 그만이었다.

조금 불만 섞인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아셸이, 끝내 결심한 듯 말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7군주님의 호위 기사가 되겠습니다."

······됐다!

나는 속으로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아셸이라고 했던가. 성은 있나?"

"······그론힐트."

아셸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자신의 완전한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셸 그론힐트입니다."

아셸 그론힐트.

백월족의 유일한 생존자.

게임에선 플레이어의 강력한 조력자 역할을 했던 선역. 그리고 군주들만큼이나 강해질 잠재력이 있는 인물.

당장 그녀는 나를 완전히 믿지 않고 경계하겠지만, 앞으로 쭉 붙어다니게 될 테니 신뢰를 쌓을 시간은 많다.

어쨌든 이로써 든든한 호위는 구했다.

슬슬 7군주령으로 향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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