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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9화 (9/189)

아셸 그론힐트 (1)

70레벨.

이것저것 고려해보면 적어도 70레벨 이상의 호위가 필요했다.

군주들과 비교하면 초라한 레벨이지만 애초에 그들은 규격 외의 괴물들이고, 70레벨만 되어도 사실 굉장한 수준의 강자였다.

30레벨이 홀로 일반 병사 백 명도 거뜬히 학살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70레벨은 그런 30레벨이 얼마나 몰려들든 무더기로 학살할 수 있었다.

'호위 자체를 구하는 건 문제없겠지만······.'

당장 7군주령의 군주성으로만 가도 조건에 맞는 실력자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터.

다만 문제는 내가 그들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였다.

원하는 건 정말 항상 곁에 붙어서 나를 호위할 조력자인데, 당연히 능력 이전에 신뢰가 더욱 큰 문제였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그럭저럭 믿을 수 있는 이를 호위로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애매하군."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가 이토록 버거운 것이다.

아직 뭘 한 것도 없는데 앞일을 생각한 것만으로 벌써부터 막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그러다 갑자기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방 바깥에 있는 케일런을 불렀다.

"책을 읽고 싶은데, 성에 도서관 같은 곳도 있나?"

"예, 존재합니다."

혹시나 싶어 물어본 건데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몇 곳이 있고, 심지어 중앙 도서관까지 따로 존재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성내에 도서관이 있는 게 이상할 것도 없긴 했다.

대군주성은 세인테아 제국으로 따지면 황궁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명칭이 군주성이니 어감이 좀 다를 뿐이지.

"원하시는 종류의 서적을 말씀해주시면 즉시 대령하겠······."

"됐다. 직접 갈 생각이니 안내해라."

"바로 모시겠습니다."

케일런이 주변의 시종에게 뭐라 말을 전했다.

그에 화들짝 놀란 시종들이 서둘러 어디론가 총총 달려갔다. 그냥 안내나 해달라니까 뭘 하는 건지.

어쨌든 그렇게 그녀를 따라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며 누군가를 마주칠 때마다 몇몇은 흠칫 놀라며 묵례를 해왔다. 중간중간 시선도 느껴졌다.

뭘 하기는 커녕 얼굴도 거의 내비친 적 없는데 나에 대한 소문이 성내에 벌써 꽤나 퍼진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참.'

엘프에, 수인에, 드워프에, 거인족에, 그리고 몇몇 희소 종족들까지.

기본적으로 인간이 많긴 하지만 이곳 칼데릭엔 정말 다양한 종족들이 존재했다.

여전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풍경이었지만 이것도 시간이 더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중앙 도서관은 내 방이 위치해있는 건물의 몇 건물 너머에 있었다.

좀 전에 창가에서 내려다봤던 기사들이 훈련 중인 광장이 경로 근처에 있었기에 지나치며 힐끔 눈이 갔다.

도서관에 도착해 들어서자마자 입구에 한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정중히 서있는 것이 보였다.

자그마한 체구나 뒤에 달린 꼬리 형태를 보니 수인 중에서도 쥐에 속하는 서족인 듯했다.

"어서오십시오, 7군주님. 중앙 도서관을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뭘 그리 서두르나 했더니 여까지 내 행차 소식이나 전한 거였나?

자신을 관장이라고 소개한 서족 노인이 직접 도서관 안내를 하겠다며 나섰지만, 굳이 필요 없었기에 거절했다.

나는 두 사람은 놔둔 채 천천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내부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었기에 잡음 하나 없이 고요했다.

원래부터 비어있던 건지, 아니면 내가 오기 전에 전부 퇴출시킨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엄청 넓네.'

대충 둘러보다 보니 관장이 왜 안내를 하겠다고 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책장별로 서적의 분류가 그렇게 세세히 된 것도 아니었기에 원하는 책을 찾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듯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딱히 특정한 내용의 책을 찾는 게 아니라 검법서나 마법서 같은 거라면 아무거나 괜찮았으니까.

'이쪽이군.'

곧 마법서들이 한가득 모인 책장을 찾은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무런 책이나 하나 뽑아든 뒤 대충 훑기 시작했다.

내용을 읽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라키로니아 대륙 공용어, 그러니까 생전 처음 접한 이 세계의 언어는 어째서인지 처음 빙의됐던 순간부터 평생을 써온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됐으니까.

"······."

물론 그와 별개로 지금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 이론······ 뭔가 수학적인 원리와 관련 있어 보이기는 한데 뭐라는 건지 전혀 못 알아먹겠다.

'그나저나 역시 안 되나.'

페이지를 좌르륵 끝까지 넘긴 나는 작게 혀를 차며 책을 덮었다.

여유롭게 마법이나 배워보자고 마법서를 찾은 건 아니었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가끔씩 마법서처럼 책 형태의 아이템에서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경우도 있었기에, 혹시나 싶었을 뿐.

하지만 역시 너무 날로 먹으려는 기대였던 모양이다. 하긴, 이게 되면 완전히 사기지.

몇 권 더 살펴보다가 깔끔하게 미련을 버렸다.

이왕 온 거 다른 책들도 이것저것 살펴보며 시간을 보낸 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케일런과 함께 도서관을 나섰다.

'출출한데 간식이나 만들어달라고 할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사들의 모습이 다시 눈에 띄었다.

아까부터 해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여전히 열띤 훈련이 한창인 광경이었다.

"······?"

별 생각 없이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순간 시선을 한 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문득 기사들 사이에 이질적인 것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Lv.81】

대련을 하는 듯 다른 기사와 검을 부딪히고 있는 한 백발의 여기사.

이질적인 존재는 바로 그녀였다.

그도 그럴 게, 기껏해야 40레벨대인 기사들 틈에서 혼자 완전히 동떨어진 레벨을 하고 있었으니까.

상관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저 얼굴, 어디선가 본 듯한······.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가만히 서있자 케일런이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나는 기사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들은 뭐지?"

"성의 백린 기사단 소속의 견습기사들입니다. 정오 훈련을 진행 중인 모양입니다."

백린 기사단이라면 대군주성 직속의 정예 전력이었다.

그나저나 일반적인 귀족 가문의 평기사가 30레벨 정도인데, 대군주성에서는 40레벨이 넘어도 견습기사인······.

"······!"

아, 떠올랐다.

저 새하얀 백발에, 칼데릭 소속의 기사.

게임 그래픽과 현실의 외관에는 당연히 큰 차이가 있지만, 묘한 낯익음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저 남자가 기사들의 상관인가?"

나는 기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기사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예, 백린 5기사단의 부단장인······."

"잠시 이리로 불러올 수 있겠나?"

내가 생각해도 굉장히 뜬금없는 요구였기에 케일런은 순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곧장 알겠다 대답하고 기사들을 향해서 다가갔다.

그리곤 남자와 뭐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더니, 금세 그를 데리고서 내 앞으로 데려왔다. 이게 권력이군.

【Lv.63】

"7군주님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백린 제5기사단 소속의 부기사단장, 캄슨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긴장으로 굳은 남자가 뻣뻣하게 경례를 해왔다.

네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고.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뭐든 최선을 다해서 답해드리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저 백발의 여자."

나는 그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예상 못한 질문이었는지, 부단장 캄슨은 한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이 됐다가 재빨리 답했다.

"견습기사인 아셸입니다. 세 달 전에 입단하여 현재 견습 과정을 거치고 있는 신입입니다."

······역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등골에 미약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설마 싶었지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아셸 그론힐트.'

라샤 메인 스토리의 최대 주역 중 하나.

처음에는 적으로 등장하나, 서서히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아군 진영으로 편입되어 큰 도움을 주는 강력한 선역.

'지금 시점엔 대군주성에 견습기사로 있었구나.'

하나 자연스러운 의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어째서 견습기사 따위로 있는 것인지.

80이 넘는 레벨이면 백린의 기사단장을 넘어서 대군주성의 최정예인 흑린의 단원도 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임에서도 첫 등장 때 그러했고.

'······대충 예상이 되긴 하는데.'

그러나 나는 그녀가 지닌 배경과 사정을 알고 있다.

때문에 금세 그럴듯한 짐작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은 아직 주위 환경을 경계 중인 건가? 그래서 힘을 숨긴 채 입단한 거고?

'이걸 어쩐다.'

대련이 끝난 뒤 아셸은 별 지친 기색 없이 검을 거두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기며 이쪽을 힐끗 바라보는 모습.

나는 짧은 고뇌에 빠졌다.

이건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나는 믿을 수 있는 호위를 구해야만 하는 상황. 그리고 그녀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성격의 인물이었다.

게다가 지금도 충분히 강한데, 미래에는 군주급 레벨까지 성장할 포텐이 있는 인물을 여기서 조력자로 삼을 수 있다면······.

'문제는 어떻게 설득하냐는 건데.'

현재 아셸은 대군주성에 소속된 기사다.

물론 군주의 권력이면 아무리 대군주성 소속이라도 견습기사 하나를 데려가는 것쯤은 어렵지 않겠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셸은 분명한 목적이 있어 대군주성의 기사가 된 것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억지로 호위로 데려가버리면 그녀가 내게 호감은 커녕 적의를 품게 될지도 몰랐다.

"······."

한번 해보자.

못 봤다면 모를까, 이렇게 발견한 이상 그냥 포기하고 지나가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이다.

결정을 마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훈련이 언제 끝나지?"

"앞으로 한 시간 정도 더 진행할 예정입니다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끝나면 데려가도 되겠나?"

내 말에 부단장은 벙찐 얼굴이 되었다. 예상한 반응이다.

칼데릭에서 군주는 하늘.

그런 군주가 일개 견습기사에게 볼일이 있어 직접 데려가겠다는 상황이었으니까.

"무, 물론입니다! 당장 데려가셔도······."

"아니, 한 시간 뒤다."

나는 못박듯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먼저 돌아갈 테니, 훈련이 끝나면 천천히 방으로 데려오도록 해라."

내 말에 케일런의 시선이 조금 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는 것을.

"그저 대화를 원할 뿐이다."

구태여 덧붙여 말하자 그녀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아셸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어떻게 해야 그녀를 호위로 꼬드길 수 있을지.

***

아셸이 방으로 찾아온 건 한 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7군주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백린 제5기사단 소속의 견습기사, 아셸이라고 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경례를 하는 그녀는 훈련할 때의 경갑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앉아라."

나는 반대편 자리로 손을 뻗었다.

잠시 침묵한 채 서있던 아셸은 이내 자리에 앉았다.

단둘이 마주앉은 테이블. 방에는 적막함이 감돈다.

후룩.

말없이 차를 마시며 반대편을 힐끔 바라봤다.

앞에 놓인 찻잔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아셸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올렸다.

선명한 주홍빛의 눈동자에 담긴 여러 감정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긴장, 경계, 그리고 의문. 자신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

······솔직히 긴장은 이쪽이 더 됐다.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여자는 80레벨이 넘는 괴물이고, 지금부터 할 말은 분명 그녀를 크게 자극할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설득을 위해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힘을 감추고 있는 건가?"

질질 끌 것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

아셸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그만한 실력에 견습기사로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어째서 힘을 감추고 있는 건지 궁금하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미약하게 날이 선, 명백히 경계심이 깃든 목소리.

"부정할 생각이라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이어진 내 말에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백월족."

"······!"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들었는데 생존자가 있었을 줄이야. 대군주성으로 온 이유가 무엇이지?"

날카롭게 벼려진 적의가 곧바로 전신을 찔러온다.

군주 회의 때 겪어봤던 뇌후의 기운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졌으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지 굉장한 압력이었다.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관둬라. 네 힘으로는 무리니."

물론 허세였다.

여기서 그녀가 검을 뽑아 휘두르면 나는 내가 죽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일단 아셸은 살생을 함부로 하는 성격이 아니다. 비록 지금이 과거라도 고작 몇 년인데 그 본성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자에게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 만큼 막무가내이지 않았다.

아무리 스스로의 실력을 자부한다 한들 칼데릭의 군주는 격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터.

"······."

허세가 잘 먹혔는지 아셸은 입술을 꽉 깨물며 기운을 거두었다.

깨문 입술에서 피까지 주륵 흘려내렸기에 좀 미안할 정도였다.

아마 지금 그녀는 더없이 혼란스러울 것이었다.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았는지, 또 내 목적이 무엇인지 완전히 혼란스러울 터.

설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자, 한번 제대로 입을 털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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