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8화 (8/189)

정리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된 후에도 난 계속해서 회의장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물론 뭔지도 모를 내용들을 떠드는데 거기 끼어들어 입을 열 일은 없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난 뒤, 저녁에 있을 만찬이라든가 앞으로의 예정이라든가 등의 이야기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온 것이 현재.

"하."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칼데릭의 7군주.

이제부터 그게 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평범 그 자체인 삶을 살다가 갑자기 군주가 되다니, 출세도 이런 출세가 없었다.

비록 남은 명줄이 얼마나 되는지는 이 순간부로 조금도 알 수 없게 됐다지만 말이다.

칼데릭의 영역은 크게 나누면 중앙의 대군주령과 그를 둘러싼 1~9군주령, 총 열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군주들은 명칭만 괜히 군주인 게 아니라 각각이 하나의 왕국과도 같은 그 거대한 땅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존재였다.

이제 7군주가 된 나 역시 7군주령인 '엔록'에 대한 모든 권력을 손에 쥐게 된 입장이었다.

칼데릭의 군좌가 혈육의 계승 따위는 없이 오로지 오로지 대군주의 임명 아래 정해지는 자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홉 군주가 대군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대군주가 군주들의 수장이자 구심점이긴 하나, 회의에서도 봤듯이 이들 사이의 관계는 수직이 아닌 수평적인 계약관계에 가까웠다.

몇몇 정해진 조건만 제외하면 군주들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이런 기이한 구조가 이뤄지고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칼데릭의 유래와 관련된 설정집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다.

설명이 꽤 상세히 적혀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떠오르는 핵심만 말하자면 이거다.

대군주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고, 그러한 역량 아래 오랜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레 세력 자체가 단단히 굳혀졌기 때문에.

현 군주들 중 몇몇은 이미 백 년이 넘는 아득한 시간을 대군주와 함께하였고, 특히나 1군주 신퇴는 칼데릭의 설립부터 수백 년을 군주로서 군림해온 존재였다.

그러한 긴 유대 아래 이어져온 체계는 어떤 면에선 전형적인 왕정인 세인테아 제국 연합보다도 견고한 것이었다.

'······그딴 것들이야 아무래도 좋고.'

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여버린 거지?

잠시 이런저런 후회를 줄줄이 이어가다가 문득 우스움을 느꼈다.

어디부터 꼬여버렸냐니.

내가 뭘 어떻게 했고 자시고, 애당초 게임 속에 들어온 이 상황부터가 무언가 꼬여도 제대로 꼬여버린 것 아니겠는가.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테이블 위의 바구니에 담긴 사과처럼 생긴 과일을 하나 집어들었다.

한입 크게 베어 무니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평소 알던 사과 맛이랑 미묘하게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맛은 좋았다.

상황이 이러니 뭘 먹을 생각이 안 들었을 뿐이지 아까부터 공복이었다.

확 몰려온 허기에 과일 몇 개를 순식간에 해치운 뒤에야 의자에 털썩 등을 기대고 앉았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잖아.'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쓸데없이 하나하나에 후회하고, 처지를 한탄할 필요가 있나.

그보다는 앞으로의 일들을 대비하고 준비하는 게 말할 필요도 없이 훨씬 생산적이다.

그렇게 마음을 잡자 축 처지는 맥없는 감정들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제왕의 혼 덕분에, 내 마음의 가장 근간에는 차가운 냉정이 언제든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굳게 자리를 잡게 된 듯했다.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21세기처럼 현대적인 배경의 세계도 아니었다.

몬스터, 강도, 전쟁, 마족······ 온갖 위험들이 득실거리고 생명의 가치가 하찮은, 거칠고 흉흉한 땅.

결국 본래 현실로 돌아갈 근본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이 연약한 목숨이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위협받을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세계에 어떤 어두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좌절할 것만도 없었다.

라사에서도 손에 꼽는 고인물이었던 내 머릿속에는 이 세계에 대한 온갖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들어있으니까.

또 가진 능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즉살과 제왕의 혼,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즉사기와 멘탈 유지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지 않은가.

물론 본 캐릭터의 능력이 완전히 다 전이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아무튼 좋게 보면 나쁘지만도 않은 상황이다.

칼데릭의 7군주라는 직위.

이것은 나에게 엄청난 위험부담이지만 동시에 힘이 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칼데릭의 영역 내에선 절대적인 권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 하기 나름이겠지만, 가진 바 정보를 활용해 다가올 위험들에 대비하기엔 분명 굉장한 어드밴티지가 될 터였다.

'그나저나 대군주는······.'

생각의 흐름이 대군주 라샤테인에게로 이어졌다.

대군주는 상상 이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정확히 무슨 의도로 내게 군주 자리를 내어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도 괜히 물어본 건 아니었겠지.'

칼데릭으로 온 이유.

그것이 대군주가 내게 가장 먼저 던졌던 질문이다.

짐작하건데 아마 그건 최소한의 확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에게는 상대방의 말의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딱히 아무 목적도 없다는 내 대답은 진실로 판명났을 테니, 적어도 내게 어떤 불순한 목적이 있지 않다는 건 알았겠지.

'아, 론이 가명이라는 것도 알아챘으려나.'

언뜻 보면 대군주가 굉장히 대충 결정을 내린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뭐가 됐든 그녀는 칼데릭이라는 거대 세력을 아득한 세월 동안 다스려온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으니까.

일단 군주 자리에 앉혀두고 자세한 능력이야 앞으로 천천히 지켜보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르지.

뭐, 어쨌든.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한다.'

여러가지로 복잡했던 생각을 얼추 정리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당장 시작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머릿속에 든 정보들의 정리와 앞으로의 계획 수립. 우선은 그것부터다.

***

"역시 어중간한 놈 안 앉히고 비워두고 있길 잘했다니까. 안 그래, 데이폰?"

라샤테인의 말에 데이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굳이 답을 원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새 군주를 임명하는 건 오로지 대군주의 권한이지만, 한 번 임명한 군주를 파명하는 건 아무리 그녀라도 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빈 군좌가 없었다면 오늘에서야 비로소 나타난 새 주인에게 다른 직위는 무엇도 내어주기가 마땅치 않았으리라.

"그래도 조금 의외였습니다."

"흐응, 뭐가? 곧바로 군주위를 내어준 게?"

"론 경······ 이제 7군주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아무튼 그분을 회의에 참석시키셨을 때부터 예상은 했습니다만."

라샤테인이 씩 웃었다.

"한 번 본 걸로 충분할 정도였거든."

론.

새삼 생각하지만 참으로 묘한 인간이었다.

특히나 폴리모프를 간파당했을 때는 그녀도 진심으로 놀랐었다.

반쯤 장난 섞인 시험이긴 하나, 역대 군주들 중 그녀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던 이는 현 3군주 천궁을 제외하고 누구도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 정도의 격에 오르면 대상의 단순한 외적 요소뿐만 아니라 훨씬 본질적인 부분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제왕을 연상케 했던 지고한 영혼.

아직 제대로 된 능력은 무엇 하나 알지 못했으나, 최소한 그가 다른 군주들에 못지않은 강자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못 봤어? 그 따분해 죽겠다는 표정."

"······."

"쓸데없이 더 간만 봤으면 아마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지도 모를걸, 하하!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놓치긴 절대 싫었거든."

데이폰 또한 회의 내내 론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워낙 표정 변화가 없어서 내심 군주 자리를 거절할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였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7군주는 바로 이동할 예정이래?"

"아마 조금 더 성에서 머무실 듯합니다. 엔록으로 전령은 보내두었습니다."

"그래. 아무튼 수고 많았어. 이번 출성은 본 목적보다도 훨씬 큰 성과가 있었네."

참모장 데이폰이 직접 움직여 세인테아로 향했던 것 또한 중요한 목적이 있었으나, 지금 라샤테인의 머릿속에는 론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아체몬 호송선에 죄수로 타고 있다고 했었지."

호송선에서 있었던 일, 론을 처음으로 접한 당시의 상황은 회의가 시작하기 전 그녀도 전부 전해들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 권성 가르톤을 살해했는지까지도 전부.

"정말 권성을 죽일 때 별다른 기운은 못 느꼈어?"

"예, 말씀드렸다시피 전혀. 단순히 제가 인지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열 걸음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던지라..."

"흐음, 그럼 역시 마법 쪽은 아니려나."

시종인 척 회의장에 입장해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라샤테인은 신경을 기울여 론을 살폈었다.

하지만 그에게선 명백히 어떠한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내 감각까지 속였다는 건 말도 안 되고, 아무래도 '신비'일 확률이 높겠네."

"······."

"아니면 내가 아예 모르는 종족 특질일지도. 외형만 그렇지 인간이 아닐 수 있으니까. 대체 어떤 종류의 능력일까 궁금한걸."

입가에 흥미롭다는 미소를 만연하게 띤 채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데이폰이 넌지시 물었다.

"어째서 더 자세히 알아보진 않으셨는지."

"말했잖아. 쓸데없이 간볼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니까. 그리고 론도 진짜 이름도 아니었고."

"아······ 역시 그렇습니까?"

"그래. 그런데 다른 것들이야 물어본다고 순순히 알려줄 리가 있나."

론이 스스로의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는 걸 라샤테인은 알고 있었다.

상대의 말에 섞인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뭐, 확인할 건 확인했으니 나머지야 아무래도 좋지만······ 한번 직접 정체를 알아보고 싶긴 하네. 간만에 재밌는 거리잖아?"

"······설마 세인테아로 향하신다는 건?"

"하하, 놀라지 마. 당장이 아니라 나중에 시간 날 때 하겠다는 거니까. 데이폰 너는 언제나 걱정이 과하다고."

손을 휘저은 라샤테인이 씩 웃었다.

"아무튼 천천히 지켜볼까. 우리 새로운 7군주가 앞으로 과연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 기대되는걸."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대군주성에서의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안락했다. 식사는 훌륭했고, 잠자리는 편안했다.

언제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종들이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즉시 대령하니 불편할 것이 있을 리 없었다.

"······."

나는 멍하니 창가에 서서 바람을 쐬고 있는 중이었다.

성내 한편의 광장처럼 넓은 공간에 기사들이 모여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7군주령 엔록으로 이동하지 않고 아직까지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며칠간 거의 방에만 틀어박혀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우선 이 세계가 예상했던 대로 내가 플레이했던 라사의 배경과 시간대 차이가 있다는 건 확인했다.

라키로니아 대륙력 759년, 정확히 5년 정도의 과거 시점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포함해서, 중요하거나 조금이라도 쓸만한 정보들은 기억에서 끄집어내 모조리 메모해두었다. 혹시나 잊어버리지 않도록.

한국어로 적은 필기를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 일은 없었기에 메모에 부담을 느낄 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상기한 정보들을 토대로 앞으로의 대략적인 계획 또한 세웠다.

'가장 필요한 건 무력.'

최우선 순위는 당연하지만 내 일신의 스펙 강화였다.

지금의 나는 약해도 너무 약했다.

신변의 안전 문제를 포함해서, 고작 1레벨 수준의 무력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즉살 스킬은 상대가 누구든 닿기만 하면 죽일 수 있는 비장의 수는 되지만, 단지 그뿐이었으니까.

게임을 플레이할 때처럼 상대를 죽이고 경험치를 얻어 레벨을 올릴 수 있다면 스펙업이야 걱정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하지만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은 안타깝게도 그런 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경험치 시스템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내가 권성을 죽였을 때 뭐라도 변화가 있었어야 할 테니까.

더해서 스탯, 스킬 정보창이나 인벤토리 등등 다른 시스템들도 전부 없었다. 혹시나 싶어 허공에 대고 중얼거려봤지만 뭐가 나타나진 않았다.

그저 가지고 있는 두 스킬과 내 시야에 보이는 레벨 표시만 제외하면, 이곳은 배경만 게임이지 완벽한 현실이었다.

현실에서 강해지는 방법.

당연히 직접 고생하며 수련을 하면 된다. 지금 아래에 보이는 저 기사들처럼.

하지만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만에 하나, 알고 보니 내가 뭐 검술이나 마법 같은 것에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완전히 입문부터 시작해 충분히 강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또 배우는 건 누구에게 배우고?

몇 년 정도 지나면 간신히 30레벨 수준까진 강해질 수 있으려나?

대군주성의 최말단 기사도 그것보단 레벨이 훨씬 높을 것이었다.

······때문에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노력 하나 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강해질 수 있는 종류의 능력을 얻으면 된다.

대륙 곳곳에 숨어있는 신비나, 혹은 유적 등의 히든 피스들.

당장 이곳 대군주성에서 7군주령으로 향하는 길만 해도 얻을 수 있는 신비가 하나 있었다.

그것들이 내 본질적인 전투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단기간 내에 순식간에 스펙을 증폭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겠지.'

여느 판타지가 그렇듯, 기연이 숨어있는 곳은 대체로 험지다. 이 세계도 그러했다.

몬스터라든지 함정이라든지, 내게는 그 과정의 위험을 전부 뚫고 목표가 있는 곳까지 도달할 능력이 없었다.

군주의 권력을 이용해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 구해오도록 시킨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정말 그렇게라도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확실하지도 않고 영 불안한 방법이었다.

또 신비처럼 대신 구해오는 게 불가능한, 반드시 내가 직접 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도 많았고.

애초에 히든 피스들을 찾으러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는 일부터가 나 혼자서는 못할 일이다.

때문에 뛰어난 조력자가 필요했다.

언제 어디서든 곁에서 내 안전을 확실히 책임질 수 있는 조력자······ 그래, 즉 호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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