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 회의 (3)
"······."
뭐?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순간 의미를 잘못 이해했나 싶어 그녀가 한 말을 되짚어봤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해도 말한 그대로의 의미였다.
지금 저 여자가, 대군주 라샤테인이 나에게 칼데릭의 군주가 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진심?'
아니,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조크 같은 거겠지.
신경에 날이 바짝 선 상태이다 보니 농담까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
"아, 오해하지 마.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할 생각 없냐고 물어보는 거야."
"······."
"지금 7군주 자리가 몇 년째 비어있는 상황이거든. 계속 비워둘 수도 없는데 영 마음에 차는 놈도 없고. 그러던 와중에 마침 론 경이 찾아온 거야. 나는 경이 7군주좌를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걸까.
7군주 자리를 맡아? 누가? 내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농담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나는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을 숨긴 채 간신히 표정만 유지했다.
'그런데 7군주 자리가 왜 비어있지?'
내가 알고 있는 7군주 살귀 리프리곤은 어디로 증발하고?
권성이 다른 놈이었던 것도 그렇고, 역시 내가 플레이했던 라사의 배경과 시간대 차이가 있는 건가?
'다른 군주들은 전부 그대로인 걸 보니 미래는 아닐 테고, 그럼 과거의 시점이라는 건데······ 아.'
2군주 뇌후의 존재를 고려하면 아마 그리 멀진 않은 몇 년 전의 과거가 아닐까 싶다.
뭐, 지금은 그런 거나 따져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만······.
"대군주······ 진심이십니까?"
짧게 이어진 정적을 깨고 가장 먼저 뇌후가 말을 뗐다.
"뜬금없이 외부자는 왜 참석시켰나 했더니 이럴 생각이셨구만. 전부 모인 자리에서 바로 결정하려고?"
폭왕도 헛웃음을 흘리며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다른 군주들도 입을 열진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황당하다는 기색들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멍만 때리고 있는 천궁 빼고.
그야 그렇다.
아홉 군주는 대군주 라샤테인을 제외하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지닌 존재이자, 칼데릭의 상징 그 자체.
그런 지고한 자리에 앉을 인물을 뭔 점심 메뉴 고르듯 가볍게 정하려 하고 있으니.
나도 이렇게 어이가 없는데 다른 군주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대군주가 홀로 태연하게 웃었다.
"좀 갑작스럽긴 하겠지만, 다들 잘 알잖아? 군좌에 필요한 자격은 능력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뇌후가 곧바로 항의했다.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저 자가 대체 무엇으로 본신의 능력을 증명했단 말입니까?"
"충분히 증명했지. 세인테아의 권성을 일격에 죽였다고 하니까."
"······!"
"그렇지, 참모장?"
"그렇습니다."
대군주의 물음에 데이폰이 긍정했다.
당연하게도 호송선에서 있었던 일은 그녀도 모두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허, 권성을 죽였다고?"
군주들은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물론 칼데릭의 군주 전원은 권성보다 높은 격의 강자들이다.
단순 수치상으로는 몇 레벨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만 고레벨대, 특히 80, 90레벨대에서는 레벨 하나하나가 큰 격차니까.
이들이 놀란 포인트는 단순히 권성을 죽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마 '일격'에 죽였다는 부분이겠지.
"게다가 내 정체까지 단번에 간파했고 말이야. 지금까지 그랬던 군주가 누구 또 있었던가?"
그 말에 군주들이 모두 침묵했다.
이제 보니 다른 군주들도 한 번씩은 대군주에게 비슷한 장난을 겪었던 모양이다.
와중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천궁이 뜬금없이 손을 슥 들어올렸다.
"그래, 3군주는 빼고."
손을 내린 천궁이 다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다른 군주들은 그런 그를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았다. 기행이 한두 번도 아니라는 듯 익숙한 분위기.
신퇴가 나와 데이폰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한데 대군주, 이번에 참모장이 어떤 임무로 세인테아에 갔던 것인지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오만."
"그렇지 않아도 회의 안건 중 하나였으니까 그건 잠시 미뤄두고."
대군주가 원탁을 둘러봤다.
"어쨌든 나는 론 경이 군주 자리에 앉아도 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또 반대 의견은?"
그때 뇌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직접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확인?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어진 말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론이라는 인간의 역량을, 제가 이 자리에서 말입니다. 가벼운 결투 정도는 대군주께서도 허락해주시겠지요."
······순간 가슴이 싸늘히 식어내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냉정함이 억지로 붙들었다.
'기어코.'
기어코 발생하고야 말았다.
회의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 군주라는 이름의 괴물들 사이에 끼어앉게 됐을 때부터 내내 우려했던 경우의 위기가.
"진심이야, 2군주? 대군주성을 다 날려버리기라도 하려고?"
폭왕이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고선 실실 웃었다.
"대군주께서 계시는데 별 문제가 있을 리 있나요. 흐흥,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네요."
흑해 여제도 더듬이를 살랑거리며 한마디 거든다.
다른 군주들도 모두 흥미진진하다는 눈길을 보내왔다.
"흐음, 글쎄······."
대군주가 빤히 이쪽을 바라본다.
그 웃음기 띤 표정을 보니, 그녀는 처음부터 이런 흐름쯤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의 생각은 어떠려나?"
······생각이 어떠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2군주 뇌후, 엘리서스.
전력을 발휘하면 일대 전체에 벼락 폭풍도 일으킬 수 있는 저 괴물하고 싸우라고?
개미와 코끼리의 대결도 그보다는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내 전신은 시커먼 재가 되어 흩날릴 터였다.
즉살 하나를 제외하면 내게는 정말 아무런 능력도 없었으니까.
'빠져나갈 구멍이······.'
모두의 관심이 내 대답으로 몰렸다.
별다른 명분 없이 싸움을 회피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상황이 내게 있어 좋은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겠지.
순간 머릿속에 꽤 그럴듯한 허장성세가 떠올렸다.
먹힐지는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여기서 더 침묵하고 있다간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나는 슬쩍 뇌후를 바라보고서 입을 뗐다.
"상대를 죽여도 상관없다면."
그리고 이어서 덧붙였다.
"적당히 제압만 하는 것에는 별 소질이 없다."
"······."
단 두 마디 말에 회의장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확 퍼지며 공간을 채운 건 그 다음이었다.
"뚫린 입이라고 감히······."
쿠구구구.
뇌후가 전신에 스파크까지 튀겨대며 살의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내 방금 발언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그녀 따위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무시였으니까.
'······이게 살기인가?'
온몸이 찌릿거리는 소름 끼치는 감각.
나는 그런 뇌후의 살기를 태연하게 받아내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압력은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제왕의 혼 덕분인지 정신이나 감정적인 동요는 전혀 없었다.
싸움을 피하긴 커녕 오히려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노린 건 대군주의 중재였다.
나는 상대를 죽여도 괜찮은 조건이라면 결투를 받아들이겠다 했고, 그 도발에 뇌후 역시 완전히 격노했다. 생각보다 훨씬 격한 반응이었지만.
이렇게 어느 쪽도 적당히 끝나지 않을 판이 만들어지면 대군주가 싸움을 허용할 리 없을 것이었다······ 없겠지?
'빨리 쟤 좀 말려줘.'
금방이라도 내가 앉아있는 자리로 전격이 몰아칠 듯 분위기는 살벌했다.
너무 섣불렀나 살짝 후회가 들 즈음 대군주가 입을 열었다.
"그만."
방금까지와 달리 조금은 엄중한 음성.
그에 뇌후는 순순히 기운을 가라앉혔다. 여전히 나를 노려보는 채였지만.
"이러면 어쩔 수 없겠네. 전혀 가벼운 결투가 아니게 되잖아?"
도로 천진한 목소리로 돌아온 대군주가 분위기를 풀듯 싱긋 웃었다.
나는 속으로 깊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생각대로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남의 속을 알 리 없는 다른 군주들은 좋은 볼거리를 놓쳐서 아쉽다는 기색들이었지만.
"뭐, 어쨌든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광랑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딱히 저 흡혈귀처럼 천박한 놈인 것 같지도 않고. 군주 임명이야 어차피 대군주 권한인데 우리 의견을 들을 게 있나."
"가만히 있는 나는 왜 또 걸고 넘어져?"
혈왕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신퇴도 나를 힐끗 바라보고는 나서서 거들었다.
"갑작스럽긴 하나 대군주의 안목을 의심하진 않소. 또 말마따나 7군주좌를 언제까지고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 본장 역시 결정에 불만은 없소이다."
뇌후를 제외하면 딱히 불평을 드러내는 군주는 없어 보였다.
동의한다기보다도 그냥 관심이 없거나, 대군주의 뜻이 확실하니 별말 없이 수용하는 기색들에 가까웠지만.
그런데 난 아직 수락하겠다고 안 했는데 왜 이미 다 확정된 분위기인 거냐?
'······하기야 그런가.'
무려 칼데릭의 군주다.
대륙의 4대 세력 중 하나인 칼데릭 권력의 정점이었다. 그런 자리를 보통 어느 누가 마다할까.
문제는 내게 군주의 자리에 걸맞는 능력이 실제로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상황이 착착 맞아떨어진 덕분에 내 능력에 대해서 모두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지만, 진실은 성문을 지키는 말단 경비병도 못할 실력이었다.
이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대군주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말 7군주가 되면 그때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거절을 하면······.'
그 또한 위태로운 선택지였다.
무엇 하나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칼데릭에 적을 두겠답시고 대군주성에 와서 군주 회의에까지 참석한 입장.
그리고 대군주는 자신이 내걸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제시했다.
이런 마당에 이제 와서 발을 빼겠다고 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어쩌면 대군주의 저 친근한 태도가 순식간에 적의로 돌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감히 자신을 기만한 거냐며.
과연 그것을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멍청한 만용일지, 아니면 최악을 피하는 올바른 선택일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야 되나.'
머릿속이 혼잡하다.
차라리 결정을 조금이라도 유예하는 게 그나마 낫지 않을까?
그때 광랑이 날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아쉽네. 언제든 한번 붙어보기로 아까 회의장 앞에서 약속했었는데 말이야. 이대로 군주가 되면 그러기도 글렀네."
······대체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는데?
그리고 군주가 되면 그러기도 글렀다니, 저건 또 뭔 말인가 싶다가 이내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칼데릭에선 군주들 간의 전투만큼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는 설정이 있었던가.
개별적인 성향이 무척이나 강한 군주들이 큰 충돌 없이 공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율이라고.
"나도 적당히 끝내는 거 엄청 싫어하거든. 최소한 어느 한쪽이 뒈지기 직전까지 가야 그게 제대로 된 결투지, 안 그래? 너랑은 그럭저럭 마음이 맞을 것 같았는데 아깝게 됐어."
"······."
희희낙락 웃으며 하는 그 살벌한 소리에 문득 끔찍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만약 군주 자리를 거절하면, 당장 회의가 끝난 후에라도 저 미친 괴물이 신나서 싸움을 걸어올지도 모르겠다고.
첫 대면에도 다짜고짜 목에 검부터 들이댔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넘치는 일이다.
그뿐인가? 지금도 옆에선 뇌후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저쪽은 훨씬 더 위험하다.
거절의 선택지를 고르면 당장 회의가 끝난 다음 일부터 걱정해야 할 판인 것이었다.
수락과 거절.
어느 쪽이든 글러먹은 최악과 차악의 선택지. 호송선에서와 비슷하다.
새삼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와선 안 됐다는 후회가 솟았다.
역시 대군주와 마주하기 전에 어떻게든 이 빌어먹을 성에서 탈출했어야 했던 건가.
······하지만 후회는 부질없고, 시간은 나를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은 채 선택을 강요했다.
"자, 이제 론 경의 대답만 남았네."
대군주의 최종 선언.
"칼데릭의 대군주로서 경에게 정식으로 제안할게. 7군주좌를 맡아주겠어?"
회의장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고, 원탁의 모든 군주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끝내 마음을 정한 나는 반쯤 체념한 채 입을 열었다.
"······받아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