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6화 (6/189)

군주 회의 (2)

공기가 무겁다.

비유 따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표현이었다. 회의장에 들어서자 받은 느낌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그리고 조금 어스름한 공간.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중앙의 거대한 원탁과, 그를 둘러싸고 앉아있는 다섯 명의 사람······ 아니, 존재였다.

"어서 오게, 5군주. 그리고 참모장."

정적을 깨고서 인자한 노인의 음성이 울려퍼진다.

원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난쟁이에게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작달막한 체구, 구릿빛 피부, 턱 밑으로 수북히 뻗은 수염.

무엇보다 떨어진 거리에서 봐도 너무도 선명히 보이는, 암석 같은 근육질의 전신.

나는 그 모든 특징을 하나로 압축하는 명칭을 알고 있었다. 드워프.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또한.

'1군주 신퇴, 아고르.'

그를 포함해 원탁의 군주들의 시선은 일제히 이쪽을 향해있었다.

"어, 아고르 영감도 오랜만."

광랑이 비어있는 자리 중 하나에 다가가 털썩 기대앉았다.

그 외에 더 오고 가는 인사는 없었다.

그저 의문에 찬 시선들이 여전히 나와 데이폰을 향해 머물러있을 뿐.

3군주 천궁, 2군주 뇌후, 6군주 폭왕, 8군주 흑해 여제······ 나 또한 그들의 면면을 살피며 기억 속 이름을 하나씩 매칭시켰다.

칼데릭의 군주들은 종족도, 특색도 완벽히 제각각이니 누가 누구인지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대군주는······ 없나?'

아직 회의장에 안 도착한 건가?

대군주 외에 4, 7, 9군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 또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지 아예 불참인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옆의 인간은 누구인가?"

1군주 신퇴가 데이폰을 향해서 물었다.

앞서 광랑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데이폰이 다시 나를 소개했다.

"외부에서 모셔온 귀빈입니다. 대군주께서 회의의 참석을 직접 허가하셨습니다."

그 말에 군주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참석 허가라니······ 대군주가?"

질문을 던진 신퇴는 의문과 놀라움이 섞인 투로 중얼거렸고.

"흐응,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래?"

8군주 흑해 여제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서 흥미롭다는 기색을 표했으며.

"하여간 우리 대군주님은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이번 회의는 시작부터 따분하지 않아서 좋네."

6군주 폭왕도 마찬가지로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

3군주 천궁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처음부터 이쪽에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었다.

"대군주께서 어찌하여 외부자를 군주 회의에 참석시키셨단 말인가?"

유일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낸 이는 2군주 뇌후였다.

하늘색의 장발, 길고 뾰족한 귀를 지닌 엘프가 노골적인 언짢음이 서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도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으니 그렇게 안 노려봤으면 좋겠는데.

그때 광랑이 킥킥 웃으며 끼어들었다.

"대군주가 허락했다는데 그냥 그런가 보다 하지, 왜 엄한 데에 따지고 있어? 꼬맹이 더러운 성질은 여전하네."

뇌후가 시선을 홱 돌려 그녀를 노려봤다.

"날 꼬맹이라 부르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요, 5군주."

"그랬었나? 뭐 어쩌라고. 꼬우면 너도 나 개새끼라고 부르든가."

놀리듯 귀를 쫑긋거리는 광랑의 행동에 뇌후는 상대를 말자는 듯 혀를 찰 뿐이었다.

나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계속 이러고 서있어야 되나 생각이 들 즈음 데이폰이 나를 자리로 안내했다.

"이쪽에 앉아주시길."

그렇게 나는 원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게 되었다.

물론 군주들의 관심은 여전히 거두어지지 않은 채였다.

아, 정말 싫다. 이 분위기.

무엇보다 8군주 흑해 여제······ 하필 정면 자리에 앉은 그녀는 존재 자체만으로 나를 상당히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이마의 나방 같은 더듬이와, 등 뒤에 달린 거대한 막 날개, 그리고 인간의 피부와 곤충의 외골격이 섞인 듯한 외형은 충분히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그로테스크했으니까.

'나한테 말 걸지 마라, 제발.'

이 괴물들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허공에 시선을 두고, 무표정을 유지한 채 닥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회의장의 문이 다시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뭔가 했더니 그냥 하녀였다.

"······?"

아니······ 하녀?

회의장에 홀로 들어온 여인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원탁에 다가와 찻잔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한다.

어쩐지 군주들 사이에 한층 묘한 분위기가 내려앉은 듯했다.

굳이 신경 쓸 것도 없이, 회의 시작 전 미리 마실 것을 세팅하는 평범한 시종의 모습.

하지만 난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Lv.98】

그야, 고작 하녀가 군주들조차 압도하는 정신 나간 레벨을 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체 뭐 하자는 거지, 이건.

"흐흥, 대군주께선 대체 언제 도착하시려나? 이제 시간도 다 됐는데."

흑해 여제가 나를 향해 눈웃음 지으며 능청스레 중얼거렸다.

"곧 오겠지. 차나 들면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말이야."

말과는 정반대로 김이 펄펄 나는 차를 단숨에 들이킨 폭왕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광랑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5군주, 번헬에 갔었다고 들었는데 뭐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려줄 건 없나?"

"은근슬쩍 말 걸지 마라, 흡혈귀 새끼야."

하지만 그녀는 좀 전까지와 다른 서늘한 목소리로 그 물음을 무참히 뭉개버릴 뿐이었다.

말도 섞기 싫다는 듯한 매몰찬 태도에 폭왕은 익숙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거 쌀쌀맞기는. 왜 항상 나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지 모르겠다니까. 안 그래, 2군주?"

"당신처럼 천박한 이를 어느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제게 쓸데없이 말 걸지 마십시오."

"크큭! 정말 너무들 하는구만. 좀 전에 싸워놓고도 내 편을 안 들어주네."

그 쓰잘데기없는 대화들을 들으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 어이없는 연극을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되는 건지.

'시험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달그락.

마지막으로 내 곁으로 다가와 찻잔을 내려놓은 하녀를 바라보며, 나는 굳게 닫고 있던 입을 뗐다.

"대군주."

하녀의 동작이 멈칫 굳는다.

"쓸데없는 장난은 언제 끝낼 거지?"

다른 군주들이 하나같이 놀란 기색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여태껏 내게 시선 한 번 보내지 않았던 3군주 천궁까지도.

"······하핫!"

그제야 가면을 벗어던진 하녀가 한 발짝 물러서며 웃음을 터뜨렸다.

"데이폰의 은신도 단번에 꿰뚫었다더니, 간만에 정말 재밌는 손님이 찾아왔네?"

······대군주 라샤테인.

칼데릭 전체의 주인이자, 아홉 군주들의 수장.

그리고 이 라사 세계관의 최강자에 가까운 인물 중 하나.

사르륵.

순간 그녀의 전신이 시커먼 기운에 휘감기더니 눈 깜짝할 사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뒤바뀌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칠흑색의 장발과 눈동자, 그리고 입고 있던 옷까지도 하녀복에서 화사한 드레스 복장으로.

원탁의 상석으로 걸어간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나풀거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까지 회의장의 입구 부근에 서있던 데이폰은 어느새 그 뒤로 다가가서 선 채였다.

"어디 보자, 4군주하고 9군주는 각자 일이 있으니 불참이고."

원탁을 둘러보던 대군주의 시선이 신퇴에게로 향했다.

"1군주도 여러모로 바쁠 텐데 수고해서 참여해줬네."

그 말에 신퇴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별 말씀이오, 대군주. 불가피한 일이 아니고서야 군주 회의에 참석하는 건 군주로서 당연한 의무이니."

대군주가 옅은 미소를 띤 채 이번엔 뇌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2군주는 아까부터 할 말이 굉장히 많아 보이는 얼굴인데?"

"······강녕하셨습니까, 대군주."

고개를 꾸벅인 그녀가 나를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저 회의에 외부자를 참석시킨 대군주의 의중을 짐작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하하, 뭘 의중씩이나."

대군주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마침 다들 모이니까 적당한 자리겠다 싶었을 뿐이야."

······적당해? 뭐가?

이어 그녀가 분위기를 환기하듯 짝짝 손뼉을 쳤다.

"자, 그럼 회의 시작! 첫 번째 안건은 보시다시피 새 인재 영입 건인데, 참모장한테 얘기는 대충 들었지?"

군주들의 이목이 다시금 집중되었고, 대군주 또한 싱긋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우선 경의 이름부터 직접 다시 알려줬으면 하는데."

"······론."

이제 시작이군.

아직까지 특별한 위기는 없었으나 조금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진짜는 대군주가 등장한 바로 지금부터였으니까.

뇌후의 말마따나 생판 외부자인 나를 군주 회의에까지 불러와서 이 자리에 앉힌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설마 능력을 시험한답시고 군주들이랑 싸움이라도 붙이려는 건 아니겠······.

"좋아. 그럼 론 경, 칼데릭으로 온 목적이 뭐야?"

······무슨 면접이냐?

생각보다 평범한 질문이 날아와서 꽤 긴장하고 있다가 맥이 빠졌다.

나는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고 빤히 그녀를 바라봤다.

"아아, 물론 먼저 제안한 쪽이 우리 참모장이라는 건 알아. 궁금한 건 어째서 마음이 동했냐는 거야."

"······."

"솔직히 지금 엄청 놀란 상태거든. 경 정도 되는 인물이 이렇게 불쑥 성에 찾아오고. 단순히 부귀영화가 목적이면 어디서든 원하는 대로 누릴 수 있는 실력이잖아? 그런데도 칼데릭으로 온 건 달리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냐?"

특별한 이유는 개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다 내몰린 막다른 길이 이곳이었을 뿐이다. 그딴 게 있을 리 있나?

나는 대군주의 능력을 전부 알고 있다.

어차피 적당히 꾸며 대답하는 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딱히 목적은 없다."

그에 대군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말의 진의를 가늠하는 듯이.

"······데이폰에게 들은 대로네. 그럼 정말 단순한 흥미뿐이라는 거구나?"

입꼬리를 올리며 도로 웃음을 지은 그녀가 좋아, 좋아라고 흥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말괄량이 소녀와 같은 모습이었으나 전혀 귀엽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내면에 숨겨진 실체는 천 살 가까이 먹은 괴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보이는 모습도 본체가 아닌 폴리모프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래서 본론은 뭐냐.'

어쨌든 고작 그거 하나 묻자고 이 자리에 앉힌 건 아니겠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나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다시 대군주의 입이 열렸다.

"론 경, 군주 할 생각 없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