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 회의 (1)
공동은 상당히 깊은 지하에 있었는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한참을 이어졌다.
지상에 도착하자 데이폰은 양해를 구한 뒤 먼저 어디론가 떠나갔고, 나는 케일런에게 안내받아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식사, 목욕, 혹은 그 외의 무엇이든 말씀해주시면 원하시는 것부터 곧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목욕부터 하겠다 답했다.
좀 전까지 죄수 신세였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현재 내 꼴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케일런도 그럴 거라 예상했는지 즉시 하인들을 시켜서 준비를 마쳤다.
목욕 수발을 든답시고 하녀들이 우르를 붙었지만 전부 물리게 했다.
불과 한 시간도 안된 시간 전까지 지극히 평범한 현대인에 불과했던 입장에서 남이 몸을 씻겨주는 건 그냥 수치플이었다.
"목욕하시는 동안 따로 식사 준비를······."
"필요 없다."
일단 개운하게 씻고 싶을 뿐이지 식사는 딱히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어찌저찌 목욕을 마친 후에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방으로 안내받았다. 굉장히 넓고 화려한 방이었다.
나는 거울 앞에 다가가 섰다.
거울 저편에는 낯설기 그지없는 사내가 빤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칠흑색 머리칼, 창백하도록 새하얀 피부, 선명한 금빛을 띠고 있는 두 눈동자와, 뚜렷한 이목구비.
'더럽게 잘생기긴 했네.'
현재 처지는 다 제쳐두고 빙의된 몸에 대한 순수한 감상이었다.
목욕하면서 이미 확인은 했지만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외모였다.
그보다 나는 내 캐릭터도 아니고 대체 어떤 몸뚱이에 들어와버린 건지 모르겠다.
내 캐릭터는 이런 외형이 아니라 금발에 청안이었으니까.
걸음을 옮겨 이번엔 창가에 섰다.
높은 층에 위치한 방이었기에 창밖으로는 성내의 풍경이 제법 잘 보였다.
외곽을 둘러싼 거대한 성벽도, 높고 장엄한 건물들도, 곳곳에 삼엄한 기세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와 기사들도.
'칼데릭 군주회.'
대군주 라샤테인과 그 휘하의 아홉 군주가 정점에 있는, 대륙의 4대 세력 중 하나.
거의 인류만이 존재하는 세인테아와는 달리 인간 외에도 다양한 종족들이 섞여있는 땅.
그러한 특징에서 알 수 있듯 4대 세력 중에서도 가장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격의 세력.
현재 내가 있는 곳은 그런 칼데릭의 대군주성이었다.
대군주성은 대군주령 드라고어의 수도, 워본의 정중앙에 위치한 성이다.
드라고어는 내가 라사를 플레이하며 밥 먹듯 드나들던 익숙한 지역이기도 했다.
'저 성벽 바깥엔 워본 시가 펼쳐져 있는 건가.'
컴퓨터 화면 너머, 그저 게임의 그래픽으로 봐왔던 장소를 현실에서 직접 생생히 마주한다.
만약 지금 처지가 이렇지만 않았다면 눈앞의 압도적인 풍경을 순수히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후우······."
창틀에 턱을 괸 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됐지?
대체 왜 내가 이제부터 칼데릭의 대군주와 대면을 해야 되는 거냐고.
오해 하나로 판이 커져도 너무 커졌다.
지금이라면 종을 초월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문득 아까 케일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군주 회의가 곧 시작된다고 했었는데······.'
나는 라사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의 고인물이었다.
당연히 칼데릭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칼데릭 소속의 주요 NPC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지배층이 돌아가는 방식이나 체계 등에 대해서도 제법 자세하게.
보통 스토리 진행과는 별 관계없는 세세한 설정들까지 알고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는 드물지만, 그 게임이 라사라면 경우가 조금 달랐다.
라사는 숨겨진 히든 피스가 굉장히 많은 게임이었고, 때로는 게임의 설정 내에서 그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뿐만 아니라 라사의 고인물이라면 대부분이 사소하기 그지없는 설정들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군주 회의.
그것은 이름 그대로 대군주와 아홉 군주가 전부 모여 참석하는 정기적인 대회의다.
그리고 회의가 열리는 장소는 당연히 대군주가 위치한 이곳, 대군주성이었다.
'그럼 지금 여기에 다른 군주들도 대부분 모여있다는 거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왠지 모를 불안함이 솟아올랐다.
어쩐지······ 타이밍이 굉장히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군주 라샤테인이 꽤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인물이라는 것을.
똑똑.
한참을 고뇌에 빠져 있자니 노크 소리가 울렸다.
"편히 쉬고 계셨습니까, 론 경."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케일런이 아니라 데이폰이었다.
나는 때가 왔음을 알았다.
이어진 말에 불길한 예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것까지도.
"대군주님과 다른 군주님들이 모이는 회의가 이제 곧 시작됩니다만, 대군주께서 그곳에 론 경도 함께 참석하길 바라십니다."
"······."
아.
빌어먹을 예지력이 상승했다.
***
짧은 이야기를 마친 뒤 나는 곧장 데이폰을 따라서 이동하게 되었다.
넓고 고요한 복도에 일정한 간격의 두 발걸음 소리만이 나지막이 울려퍼진다.
향하는 목적지는 앞서 들었던 대로 군주 회의장.
앞으로의 흐름에 따라 내게는 회의장이 아니라 공개 처형장이 될 수도 있을 장소였다.
'갈수록 태산이네.'
아니, 군주들이 모이는 정상 회의에 생판 외부인인 나를 대체 왜?
지금은 그저 앞장서서 걷는 데이폰의 뒤통수를 한 대라도 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쨌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이놈이었으니까.
놈 덕분에 호송선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맞지만 애당초 호송선을 습격한 것도 놈이었다.
아니었으면 지금쯤 배는 침몰하는 일 없이 바다를 가로질러 순항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다다를 목적지가 수용소이긴 했지만, 이제부터 칼데릭의 지배자들과 대면해야 하는 지금 상황과 비교하면 차라리 그쪽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가정이지.'
나는 초연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온 이상 피하지도 못한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길이었는지는 이제 곧 알게 될 것이었다.
과연 칼데릭의 정점인 군주들의 앞에서도 하찮은 실체를 들키지 않은 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만약 정말 일이 최악으로 흘러가서 들키게 되면······.'
그나마 하나 유일하게 있는 즉살 스킬이라 해봐야 신변을 보호할 수단은 전혀 못 된다.
권성에게도 통했으니 효과는 확실하겠지만 접촉 시에만 발동이 가능하다는 치명적인 조건이 있으니까.
뭐, 그렇다고 해도 그 외의 방법이 아예 없진 않을 것이다.
입을 잘 털기만 하면 내 방대한 게임 지식은 대군주와도 충분히 협상을 할 수 있는 카드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최선은 들키지 않고 어떻게든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는 거겠지만.
이동할수록 점점 어두워진다 싶었더니 어느새 복도의 창들이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대신 천장에 박힌 발광석이 어둠을 밝혔다.
이윽고 검붉은 카펫이 깔린 통로로 들어서자 초입에 몇몇 기사들이 엄숙한 기세로 정렬한 채 서있었다.
처억.
일제히 검을 치켜들며 경례를 올리는 기사들.
"도착했습니다."
데이폰은 그렇게 말하며 그들 사이를 지나쳐 걸었고, 나도 태연함을 가장한 채 뒤따랐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한참 걷자 그 끝에 있던 거대한 문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쪽처럼 방금 도착한 듯 좀 떨어진 앞쪽에 서있던 누군가의 모습도.
타오르는 화염을 연상시키는 시뻘건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그 양쪽에 솟아있는 짐승의 귀. 이마부터 턱까지 사선으로 길게 이어진 자상. 그리고 등 뒤에 메인 거대한 대검.
"여, 참모장."
이쪽을 돌아보고 있던 그녀가 가벼운 투로 말을 걸어왔다.
그와 상반되게 데이폰은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5군주님."
그녀의 정체는 굳이 이름을 듣지 않아도 본 순간부터 곧바로 깨달았다.
【Lv.95】
권성보다도 높은 저 어마무시한 레벨에, 저 외관.
떠오르는 이는 한 명밖에 없었다.
'5군주 광랑, 이그넬.'
회의장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나.
나는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봤다.
단지 서있는 것뿐임에도 그녀의 존재감이 공간 전체를 짓누르는 듯했다.
권성이야 모르는 놈이었고, 참모장 데이폰은 게임에서도 거의 얽힌 적이 없는 캐릭터였으나, 광랑은 아니다.
한때 수십 번도 넘게 공략에 도전하며 애를 먹었었던, 더없이 익숙한 네임드 중의 네임드 보스 캐릭터.
새삼 이곳이 게임 속 세계라는 사실이 다시금 선명히 실감되었다.
"네가 직전에 맞춰 도착하고 별일이네. 그런데 저건 뭐야?"
광랑이 나를 향해 턱짓을 하며 물었다.
"대군주께서 직접 회의의 참석을 허가하신 분입니다."
"······허?"
그 말에 그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군주 기행이야 하루이틀도 아니니 그렇다 치고, 그래서 누군데?"
"이번에 외부에서 우연히 모셔오게 된······."
"아아, 그러고 보니 너 세인테아로 갔었다고 했나. 어디 얼마나 대단한 놈을 데려왔길래······ 흐음."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향했다.
세로로 쭉 찢어진 맹수의 동공이 전신을 한 차례 훑고는 섬뜩하게 눈을 마주쳐왔다.
"별 것 없어 보이는데."
콰우웅!
공기를 산산히 찢는 파공음.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돌풍과 함께 머리카락이 나풀거렸고, 목 바로 앞에는 검날이 멈춰있었다.
"······."
나는 그저 석상처럼 굳어서 검을 쥐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뭘 한 거야, 지금? 검을 휘두른 건가? 대체 언제?
저 거대한 검을 등에서 뽑는 것조차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중간 과정이 아예 생략된 듯한 비상식적인 속도.
"뭐, 그렇지도 않은가?"
광랑이 씩 웃으며 검을 거두었다.
"아무리 살기가 없어도 아예 반응도 안 할 줄이야. 생긴 거랑 다르게 터프하네."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다.
방금 요단강 한 번 왕복하고 온 기분인데 뭔 놈의 살기 타령이냐.
제왕의 혼만 아니었으면 아마 다리에 힘이 다 풀려서 주저앉았을 것이다.
"5군주님."
고맙게도 데이폰이 굳은 목소리로 제지하듯 나섰다.
"가볍게 인사 좀 한 걸로 정색하기는."
킥킥 웃으며 검을 도로 회수한 광랑이 몸을 돌렸다.
"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붙어보자고. 아무리 봐도 마력은 전혀 안 느껴지는데 뭔 능력을 쓸지 궁금하네."
무슨 끔찍한 소리를.
의도치 않게 오해 스택이 더 쌓인 것 같다.
마저 걸음을 옮겨 문으로 다가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떨떠름한 심정으로 보고 있자니, 데이폰이 꾸벅 고개를 숙여왔다.
방금의 행동에 대해서 대신 사과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기왕이면 검을 휘두르기 전에 먼저 나서줬으면 좋았을 텐데... 뭐, 목이 멀쩡히 붙어있다는 거에나 감사하자.
쿠구구.
묵직한 울림과 함께 거대한 문이 활짝 열린다.
광랑이 먼저 문을 열고 회의장 내부로 들어간 것이었다.
저 안에 그녀뿐 아니라 다른 군주들도 전부 모여있는 거겠지.
"그럼 들어가시죠."
마치 괴물의 아가리로 나아가는 기분을 느끼며, 데이폰과 함께 회의장으로 입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