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4화 (4/189)

탈출 (3)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남자.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태도는 한눈에 봐도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상대가 이 상황에 대해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설마 권성 때문인가?'

내가 권성을 죽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이쪽을 뭐 권성 이상의 엄청나게 위험한 인물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거나?

······확실히 오해할 만도 하군. 그렇다면 저 반응도 대충 이해가 됐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권성에 버금가는 수준의 강자가 죄수 나부랭이 따위를 경계할 이유가 또 뭐가 있겠는가.

어쨌든 지금의 내게 있어선 더없이 고마운 착각이었기에 장단에 맞춰주기 위해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누구냐고 질문을 해오긴 했지만 뭐라 딱히 대답할 말도 궁색했다. 그냥 닥치고 있는 게 낫겠지.

괜히 감정의 동요라도 내비쳤다간 더욱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리라.

"저는 데이폰, 로그나르 왕국이나 세인테아 제국 연합과는 관계없는, 칼데릭 군주회 소속의 인물입니다."

사내가 멋대로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칼데릭 군주회?"

그런데 칼데릭이라고?

세인테아와 더불어 대륙을 사분하고 있는 라사의 4대 세력 중 하나, 칼데릭 군주회?

'지금 상황도 이놈이 벌인 짓인가?'

권성에 더해 칼데릭까지, 이만한 거물들이 고작 호송선 한 척에 모여선 대체 뭘 하고 있던 걸까.

뭔가 심상치 않은 세력 싸움이 얽혔을 거라고만 그저 짐작해볼 뿐이었다.

그보다 지금 내게 있어 중요한 건 이들의 목적이나 뒷사정이 아니라 당장의 생존이었다.

나는 슬쩍 놈의 눈치를 보고서 물었다.

"배에는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아까부터 흔들림이 멎지를 않는데, 설마 침몰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

"선체의 상태를 알고 싶으신 거라면, 호송선은 아체몬에 도달하지 못하고 곧 침몰할 겁니다."

뭐, 이 새끼야?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포커페이스가 깨졌다.

곧 바다 한가운데서 수장당할 걸 선고받았는데 인상이 안 구겨질 수가 없었다.

"당신 정도의 인물이 어째서 호송선의 죄수로 있는 것입니까?"

나도 나 게임에 처넣은 놈 멱살 잡고 묻고 싶은 심정이니까 닥쳐봐라.

이제 어쩌지?

손발은 여전히 묶여있고, 그 와중에 배는 곧 침몰한다 하고, 앞에는 90레벨에 가까운 괴물이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고.

그야말로 설상가상. 상황은 나아지긴 커녕 더욱 답 없게만 흘러가고 있었다.

냉정이 유지되면 뭐 하나. 이 상황에 어떻게 살아날 길이 있기는 한가?

쿠웅!

더욱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선체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경고한다.

'근데 저놈은 뭐가 저렇게 여유로워?'

아무리 레벨이 저만큼 높다고 해도 맨몸으로 해상 한가운데를 탈출할 수가 있나? 육지가 가까운가?

하기야, 놈은 일을 벌인 장본인일 테니 뭐라도 탈출로가 있을 것이다.

'다른 선박을 준비했든, 아니면 텔레포트든······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깨달았다.

이 상황에 그나마 기대볼 만한 유일한 구명줄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저 로브 놈한테 도움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호송선과 함께 수장되는 신세만큼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당연한 문제는······.

'순순히 도와줄 리가 없잖아.'

놈에게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현재 나에 대한 놈의 스탠스는 명백히 '경계'다.

이쪽의 전력을 알 수가 없으니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뿐일 터였다.

그런 상황에 배를 못 탈출하고 구속구 하나 풀지 못하겠으니 도움을 요청한다?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떨거지에 불과했단 걸 들켜 곧바로 목이 날아갈 확률이 훨씬 높아보였다.

그러나 뭐가 됐든 남은 활로가 놈뿐인 것도 현실.

목숨을 연명하고 싶다면 방법을 쥐어짜야만 한다.

놈이 내게 품고 있는 착각을 이용하든 뭘 하든, 어떻게든 탈출할 방법을...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칼데릭의 대군주성으로."

······뭐?

나는 벙찐 기색을 숨긴 채 놈을 다시 바라봤다.

"대군주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능력을 중시하시는 분입니다. 종족, 출신, 과거 따위는 칼데릭에서 조금도 중요치 않습니다. 경과 같은 분이라면 대군주께서도 필시 반기실 것입니다."

"······."

"칼데릭은 세인테아와 많은 것들이 다릅니다. 적어도 인간만들의 땅보다는 경의 흥미를 이끌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호칭까지 어느새 경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얘가 지금 뭐라는 거냐?

예상을 한참 벗어난 말이었기에 그 의미를 이해하기까진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이거 설마 스카웃인가?'

저놈이 지금 나한테 자기네 세력으로 영입을 제안하고 있는 건가?

아무리 내 존재를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한들 정체도 불분명한 죄수한테?

나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놈이 뭔가를 깊이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이건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내가 필사적으로 쇼를 부릴 것도 없이 놈이 먼저 자처하고 나선 상황.

제안을 수락하면 이 침몰 직전의 배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 뒤의 일인데.'

실상은 별 능력도 없는 허접 새끼에 불과한 내가 칼데릭으로 가서 뭘 어쩌겠단 건가?

그리고 뭐? 대군주성? 칼데릭의 대군주한테 직접 나를 데려가겠다고?

차라리 호랑이 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미는 편이 나을 것이다.

쿠우웅!

······하지만 별다른 길이 없었다.

무너지는 선박의 파편에 깔려 뒈지든, 아니면 바다에 빠져 익사를 하든.

놈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나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죽을 것이다.

'최악보다야 차악이지.'

뒷감당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당장 살고 보는 게 우선이었다.

꽤 긴 침묵 뒤에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건 영입 제안인가?"

"물론입니다."

냉큼 대답이 돌아왔다.

"칼데릭이라······."

괜히 한 번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이내 말을 이었다.

"조금 흥미가 이는군."

아, 이건 좀 아닌가.

말하고 바로 후회했다. 흥미는 지랄. 그냥 수락한다고 하면 될 걸 분위기 잡겠답시고 너무 갔다.

그래도 세이프였는지 놈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한순간 조금 환해진 듯했다.

'근데 구속구 좀.'

알아서 센스 있게 이거부터 좀 풀어주면 안 되나?

다행히 그런 내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놈이 감옥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왔다.

캉!

구속구들이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에 간단히 박살나 바닥에 널부러졌다.

그제야 나는 몸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힐끗 눈치를 살피자 놈은 별달리 이상하게 여기진 않는 기색이었다.

그래, 설마 권성도 죽인 놈이 이깟 쇳조각 하나 못 부수는 약골이라고 상상이나 하겠나.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립니다. 칼데릭 군주회 대군주성 소속, 대군주 직속 참모장 데이폰 클라디넬입니다."

대군주 직속 참모장?

'어쩐지 레벨이 더럽게 높더라니.'

나는 그제야 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라사의 수많은 NPC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외우고 있진 않았기에 이름만 들었을 때는 곧장 못 떠올렸다.

칼데릭의 대군주 참모장. 대군주의 최측근이자, 실질적인 영향력은 아홉 군주에도 못지않은 거물.

말을 마친 놈이 빤히 나를 바라봤다.

이쪽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선이었다.

나는 약간의 곤란함을 느꼈다.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자기소개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잠깐의 침묵 뒤에 결국 짧은 한마디만 내뱉었다.

"론."

의미는 없다. 순간적으로 아무렇게나 떠오른 적당한 이름을 뱉은 것이었다.

서양풍 판타지 세계에서 내 진짜 이름 석자를 말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했는지 다행히도 데이폰은 더 자세히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실례하지만 권성의 시체를 제가 회수해도 되겠습니까?"

"······?"

"따로 이걸 원하실 만한 분이 계셔서 말입니다. 물론 시체에 대한 소유권은 분명히 론 경께 있습니다."

아니, 그런 거 전혀 필요 없는데.

뭔 시체를 두고 소유권까지 튀어나온단 말인가. 이걸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아······ 설마 망자왕 말하는 건가?'

어쨌든 내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기에 알아서 하라고 답했다.

짧게 감사를 전한 데이폰이 권성의 시체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어두운 기운이 솟아나더니 순식간에 시체를 흔적도 없이 삼켜버렸다.

"그럼 론 경, 지금 바로 대군주성으로 모시겠습니다. 텔레포트를 펼칠 테니 마력에 저항하지 말아주십시오."

데이폰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뭘 어떻게 탈출하나 했더니 역시 텔레포트였나?

그러고 보니 분명 참모장의 능력 중 하나가 초장거리 텔레포트였었지······ 근데 잠깐.

'······지금 바로 대군주성으로?'

나는 놈이 내민 손을 떨떠름한 속내로 쳐다보다가 맞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웅.

곧 은은한 푸른빛과 함께 주위의 공간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한순간 몸이 부유하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속이 울렁거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10초는 지났나?

시야가 다시 선명해졌을 때, 내가 서있는 곳은 더 이상 호송선의 감옥이 아니었다.

한순간 달라진 풍경에 나는 놀라움을 숨긴 채 두 눈을 깜박거렸다.

사아아.

어둡고 넓은 공동 같은 공간.

사방의 벽면에는 푸른빛으로 발광하는 거대한 돌들이 수없이 박혀있었고, 거기서부터 뿜어져나온 빛들이 바로 발밑에 뭉쳐져 기하학적인 도형을 구성하고 있었다.

'······마법진?'

서서히 사라져가는 그것을 내려다보던 나는 도로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마법진은 둘째치고 주위에는 로브를 걸친 괴인들이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이동하자마자 뭔데, 이 분위기.

"데이폰 님."

홀로 집사처럼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던 여인이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먼 타지에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무사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자연스레 그녀의 뾰족하게 솟은 귀에 눈이 갔다. 엘프?

"대군주께서는?"

"자리하고 계십니다. 이제 조금 뒤면 군주 회의가 시작됩니다."

"상당히 절묘한 때에 복귀하게 됐군."

그렇게 중얼거린 데이폰이, 의문에 찬 시선으로 내 쪽을 힐끔거리는 여인에게 말을 이었다.

"그분께 직접 소개드릴 귀인이다. 최선의 예를 다해서 모시도록."

"······!"

그 말에 흠칫 놀란 기색을 띤 그녀가 빠르게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한쪽 팔을 접은 채 더없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왔다.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케일런이라고 합니다."

······뭔가 휙휙 진행되는군.

호송선을 탈출했음에도 상황은 여전히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러니까······ 여기가 칼데릭의 대군주성이라는 거지?'

정말 세인테아의 영역에서 칼데릭까지 그 먼 거리를 한 번에 이동해온 건가?

그리고 이제부터 난 칼데릭의 대군주와 대면을 해야 되는 거고?

물론 전부 말했던 대로이긴 한데······ 이렇게나 곧바로?

'환장하겠네.'

지금이라도 수락을 물리겠다 말을 바꾸면 과연 데이폰에게서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궁금하다.

좀 전의 호송선에서와 달리 이곳은 놈의 본진이자 칼데릭 전력의 최중심부였다.

허허 웃으며 순순히 보내주기를 기대한다면 그건 너무 낙천적인 생각일까.

"칼데릭의 대군주성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론 경."

이쪽의 심정을 알 리 없는 데이폰은 그런 한숨 나오는 소리나 지껄일 뿐이었다.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한 대가는 호랑이 굴 입성이었다.

칼데릭의 대군주 라샤테인.

그것도 라사 세계관에서도 한 손에 꼽는 초거물이 수장으로 자리하고 있는.

아······ 이젠 진짜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될 대로 되라.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