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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3화 (3/189)

탈출 (2)

"······."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쓰러진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 된 건가?'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조금의 미동도 없는 모습은 영락없이 죽은 자의 모습이었다.

즉살, 접촉한 대상을 즉사시킬 수 있는 10성 등급의 스킬.

설마 싶었지만 정말로 스킬의 효과가 성공적으로 발동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갑자기 이 괴물이 쓰러질 이유가 또 뭐가 있을까.

이것으로 확신이 들었다.

나는 융합의 결과로 나왔던 즉살 스킬을 보유한 채 이 몸에 빙의한 것이 확실했다.

'그럼 즉살 외에 다른 스킬들은?'

생각은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는 라사에서도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수준의 고인물 유저였다.

만약 내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다른 스킬들도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라고 잠시 행복회로를 돌려봤지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보유하고 있던 스킬 중에는 캐릭터의 기본 스탯을 증폭시키는 패시브 스킬들도 수두룩했다.

그러니 스킬들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지금의 육체가 이따위로 허약한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딱히 액티브 스킬들 역시 떠올려봐도 사용이 되는 건 없는 것 같았다.

'다른 스킬들은 없고 왜 즉살만······ 아.'

이유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왜긴 왜겠나, 다른 스킬이나 스탯은 모조리 융합 재료로 갈아버렸었잖아?

만약 융합이 완료된 시점을 기준으로 캐릭터의 능력이 그대로 전이된 거라면······ 전부 말이 된다.

이 허약하기 그지없는 육체 능력도, 즉살 외의 다른 스킬들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허."

설마 진짜 그런 건가? 진짜로?

순간 뒷골이 확 땡기는 느낌이었다.

그럼 만약 융합 따위를 하지 않았다면 캐릭터의 모든 능력이 그대로 유지될 수도 있었다는 게 아닌가?

아니, 애초에 지금의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캐릭터의 모든 능력치를 혼돈의 상자에 융합시킨 게 게임 속에 빙의된 원인이라면 말이다.

상관관계는 알 수 없으나, 빙의가 이루어진 건 융합이 끝난 바로 직후였으니 솔직히 후자의 확률이 더 높아보였다.

'어느 쪽이든 결국 그 빌어먹을 융합은 하지 말았어야 했군.'

후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려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았다.

'······아, 그런 거였나?'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까부터 내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이토록 비상식적인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제왕의 혼]

영혼에 제왕의 지고한 격이 서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정신 계열 디버프에 완전 면역됩니다.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지배자의 품격과 위압감이 깃듭니다. NPC와의 대화에서 우위를 점할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융합 재료에 그만 실수로 빠뜨렸었던 9성 스킬 하나, 제왕의 혼.

아무래도 그것의 효과가 내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덕분에 정신없는 상황 전개에도, 방금 막 죽을 뻔하고 주위가 시체 조각들로 피바다가 된 이 수라장에서도 계속해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게 가능한 것일 터.

'아니면 진작 정신줄을 놔버렸어도 이상할 게 없지.'

지독한 혈향이 코를 찌른다.

나는 싸늘한 주검이 된 노인에게로 재차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권성 가르톤이라고 했나?

세인테아의 다섯 별 중 하나, 라사의 세계관에서도 능히 대륙급 강자의 반열에 드는 인물.

앞의 '권성'이라는 이명은 더없이 잘 알고 있었지만 뒤에 붙은 이름이 낯설다.

내가 라사를 플레이하며 등장한 권성은 가르톤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었었으니까.

'잘못 기억한 건 아닐 텐데······ 설마 시간대가 다른가?'

또 이 정도의 거물이 아체몬의 호송선에는 왜 타고 있던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런 것들이야 일단 제쳐두고.

이제 뭘 어떻게 해야 되지?

당장 목숨을 건진 건 좋지만 상황은 여전히 위기였다.

손발은 아직 구속구에 묶인 채였고, 폭발음은 끊겼지만 선박의 불안정한 흔들림도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대체 이 호송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계속 지금처럼 묶여만 있다간 아주 높은 확률로 다시 생존을 위협받을 것이었다.

"······?"

그 순간 내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의식적인 게 아니라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창살 너머, 시야 한구석에 무언가 이상한 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Lv. 89】

빈 허공에 둥둥 떠있는 레벨 표시.

저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나 잠시 고민하다가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은신 계열 스킬······.'

아무도 없는데 레벨이 떠올라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저곳에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언제부터 숨어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방금의 권성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거의 준하는 레벨의 괴물.

저 정체 모를 상대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장 적절한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근데 그러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입이 먼저 반사적으로 열렸다.

그것도 더없이 무심하고 오만한 말투로.

"쥐새끼처럼 굴지 말고 나와라."

······나는 뒈지고 싶어서 환장한 건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단지 본능 같은 무언가가 한순간 이성을 앞질렀다. 그것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는 곧바로 깨달았다.

현재 내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제왕의 혼 스킬 말고 달리 또 뭐가 있을까. 아, 씨발······.

'엿 됐다.'

뭐가 됐든 완전히 조졌다.

즉사기가 있다고 한들 대상과 접촉하지 않으면 발동할 수 없다.

방금의 도발에 욱한 저 정체 모를 상대가 공격부터 날리면 내 목숨은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스르륵.

잠시 뒤 허공에 어둠이 넘실거리더니, 그 사이에서 로브를 걸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데이폰은 호송관과 선원들의 시체를 가로질러 선내 복도를 걸었다.

상황은 예정대로 순조로웠다.

목표 요인은 처단했고, 선박의 장치들도 크게 파괴됐으니 호송선은 머지 않아 침몰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권성을 살해한 뒤 확실히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고 복귀하는 일만 남았다.

로그나르 왕국 측에서 나름 대비를 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무려 오성의 일인을 끌어들인 건 의외였다.

세인테아의 다섯 별. 권성 정도의 강자라면 아무리 데이폰이라 해도 홀로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는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이런 변수에 대비하여 준비된 카드는 있었으니까.

'저쪽인가.'

아래층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에 데이폰은 곧바로 권성임을 확신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죄수 감금 공간 중 하나로 보이는 선실 내부는 이미 죄수들의 시체로 처참한 풍경이었다.

호송선이 습격받은 상황에 날뛰는 죄수들까지 제어하기는 힘드니 전부 처리해버린 것이리라.

은신한 채 선실 안쪽으로 유유히 이동한 그는 예상했던 대로 권성 가르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권성 가르톤이다.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특별히 들어주마."

권성은 홀로 살아있는 한 죄수의 머리에 손을 올린 채 있었다.

데이폰은 거리를 두고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지막 죄수는 유언이라도 들어준 뒤 처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죽이는 순간 공격해야겠군.'

이왕이면 가장 적절한 때 기습해서 전투를 개시해는 편이 좋을 터.

판단을 마친 데이폰은 권성이 죄수의 머리를 터뜨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곧 죄수의 입이 열렸다.

"죽어."

이어진 광경에 데이폰의 두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

죄수의 한마디에 권성의 몸이 풀썩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는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죽었······ 어?'

숨도 쉬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는다.

쓰러진 권성에게선 생명의 기척이 완전히 끊겨 더 이상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죽어버린 것이다.

전 대륙적으로 명망 높은 무인, 세인테아의 오성 중 하나가 한순간에.

데이폰은 반사적으로 호흡조차 멈추고 기척을 최대로 죽였다.

손발에 구속구를 찬 채 숨이 끊어진 권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죄수 사내.

믿기지 않지만 그가 권성 가르톤을 죽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사내가 한 행동이라고는 단지 '죽어.'라고 짧은 말을 내뱉은 게 전부였다.

'······언령? 언령의 일종인가?'

하지만 권성쯤 되는 강자를 단번에 죽일 수 있는 언령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정체가 뭐지?

데이폰은 더없이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상정을 아득히 벗어난 변수의 등장. 이 터무니없는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기습? 권성을 단번에 죽여버린 정체불명의 괴인과 전투를 벌이는 건 미친 짓이다.

4군주 망자왕으로부터 제공받은, 본래 권성을 죽이는 데 사용하려고 했던 전력을 사용해도 승산은 미지수였다.

그럼 이대로 퇴각해야 하나? 하지만 저 미지의 인물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한 채로 그냥 돌아가기엔······.

'······!'

순간 데이폰은 전신에 소름이 쭈뼛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시선을 돌린 사내가 이쪽을 빤히 응시했기 때문이다.

"쥐새끼처럼 굴지 말고 나와라."

······들켰다. 대체 언제부터?

은신을 이토록 쉽게 간파당했다는 사실에 데이폰은 더없이 큰 충격과 낭패감을 느꼈다.

은신 능력 하나만큼은 전 대륙에서도 최고 수준인 그였으니까.

지금이라도 도주를 시도할까 고민이 스쳤으나 이내 접었다.

그러기도 전에 방금의 권성처럼 한순간에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 리스크가 너무 큰 시도였다.

스르륵.

모습을 드러낸 데이폰은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고 있지 않은 공허한 눈빛에선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진다.

데이폰은 그저 어렴풋이 직감할 뿐이었다.

눈앞의 사내가 어쩌면 군주들과 동등한 격의 강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신은 누구입니까?"

잠깐의 정적 뒤 데이폰이 물었다.

사내는 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이쪽을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무언의 압박. 데이폰은 그 시선의 의미를 짐작하고 할 말을 궁리했다.

정체는 전혀 짐작할 수 없지만, 죄수의 신분으로 아체몬에 호송되고 있으며 권성을 거리낌 없이 살해한 인물.

적어도 그쪽에 우호적인 관계일 리는 없으니 신분은 밝혀도 상관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확실히 해두는 편이 좋을 터.

"저는 데이폰, 로그나르 왕국이나 세인테아 제국 연합과는 관계없는, 칼데릭 군주회 소속의 인물입니다."

그 말에,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사내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칼데릭 군주회?"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한 차례 뜸을 들이고는 물어온다.

"배에는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선체의 상태를 알고 싶으신 거라면, 호송선은 아체몬에 도달하지 못하고 곧 침몰할 겁니다."

그 말에 순간 사내의 표정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더니 곧 도로 펴졌다.

다시금 대화가 끊겼다.

단지 궁금한 건 그뿐이었다는 듯 사내는 다른 것들은 물어오지 않았다.

칼데릭에서 일개 호송선을 습격한 목적이라든가 자세한 사정 따윈 관심도 없어보였다.

'일단은 다행인가.'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 태도에 데이폰은 조금 안심했다.

아니, 적의가 없다기보다······ 그저 궁금한 게 해결됐으니 이쪽의 존재에 대해 더는 관심이 없는 것에 가까워 보였지만.

공격만 하지 않는다면야, 탈출을 하든 뭘 하든 사내는 더 이상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데이폰은 복귀를 망설였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엔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이 기묘하기 그지없는 사내에 대해 더욱 의문과 호기심이 커진 상태였으니까.

"당신 정도의 인물이 어째서 호송선의 죄수로 있는 것입니까?"

찰나에 권성을 살해해버리고 이쪽의 은신을 간파한, 그 능력과 전력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괴물.

데이폰에게 있어서는 이 상황이 마치, 고블린들을 가둬둔 우리 구석에서 빈약하기 그지없는 족쇄를 찬 채 얌전히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던 드래곤을 발견한 것처럼 우습게 느껴졌다.

쿠웅!

선체가 크게 흔들리며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사내는 여전히 아무런 행동도 없었고, 질문에 대한 답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빤히 그를 바라보던 데이폰은 무언가를 퍼뜩 깨달았다.

'······알 것 같군.'

감정이 식은 공허한 눈. 주변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 특유의 권태로운 분위기.

비슷한 인물을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알 수 있다.

저건 분명 삶에 더 이상 별다른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의 태도였다.

아마 저 사내에게는 모든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제 곧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도 탈출할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죽든 말든 목숨도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리라.

권성을 죽이고, 이쪽에게 말을 건 것도 그저 순간의 자그마한 변덕과 흥미가 전부였을 터.

쿠우웅!

다시 한 번 선체가 진동했다.

데이폰은 크나큰 아쉬움을 느꼈다.

이만한 거인이 더 이상 세상에 어떠한 흥미도, 미련도 가지고 않고 차가운 해저로 가라앉아 사라지기를 자처함에.

그 아쉬움이 그로서 제법 충동적인,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제안을 내뱉게 만들었다.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단지 이 사내의 마음에 아주 자그마한 흥미의 불씨라도 지필 수 있기를 바라며.

"칼데릭의 대군주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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