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1)
거무칙칙한 바닥. 퀴퀴한 먼지 냄새.
나는 두 눈을 깜박거리다 푹 떨구어진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 어디서 술이라도 한 모금 안 떨어지나, 씨팔."
바로 옆에서 험악한 인상으로 뭐라 중얼거리고 있는, 웬 대머리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는 비슷한 복장의 이들이 줄줄이 늘어진 채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그 복장이 죄수복이고 이곳이 감옥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손발목에는 하나같이 두꺼운 사슬이 묶여 있었고, 전방에는 촘촘히 박힌 쇠창살까지 보였으니까.
거기다 창살 너머에서 일렁이는 저 반투명한 푸른 장막은 또 뭘까. 어디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진짜 뭐야, 저거?
절그럭.
그보다 내 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손발에 차인 묵직한 철갑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뭐야, 대체······.'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기억을 더듬었다.
난 분명 방금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라사를 플레이하고 있었을 터인데.
혼돈의 상자를 융합했더니 개쩌는 10성 스킬이 튀어나왔고, 다음엔······ 아, 그래.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더니, 정신을 잃은 건가?
그리고 다시 눈을 떴더니 이 꼴이다.
전후 기억은 뚜렷했지만 상황이 정리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봤다.
"뭘 꼬라봐, 새끼야."
눈을 마주친 옆의 대머리 사내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서늘한 음성에 내가 말하고서 스스로 놀랐다.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한국어도 아닌 언어가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뭐? 이 미친 새끼가 뭐라는 거······."
황당하다는 얼굴로 욕을 지껄이는 사내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놈이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마지못한 기색으로 순순히 대답했다.
"어디긴 어디야, 빌어먹을 호송선 안이지."
"호송선?"
"······깜빡 졸기라도 한 거냐? 아체몬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잖냐. 죄수들의 무덤인 그 빌어먹을 곳!"
아체몬? 죄수들의 무덤?
어딘가 익숙한 명칭의 그것을 이내 떠올린 나는 반사적으로 '뭐?'라고 되물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게, 그건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장소의 이름이었으니까.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게임 속 세계에 말이다.
"이봐."
"또 뭐?"
"아체몬이 설마 로그나르 왕국에서 관리하는 중죄수 수용소를 말하는 건가?"
"뭘 자꾸 당연한 걸 처묻는 거야?"
"······여기는, 이 세계는 지구가 아니라 라키로니아 대륙이고?"
사내는 이제 완전히 미친놈 바라보듯 나를 쳐다봤다.
"별 미친······ 진짜 갑자기 돌아버렸나?"
그렇게 중얼거린 놈이 슬그머니 옆으로 멀어졌다.
나도 도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더 물어볼 것도 없이 이제야 뭐가 뭔지 이해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야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옆의 사내를 포함해 죄수들의 머리 바로 위에 떠오른 숫자들을 포함해서.
【Lv. 48】
【Lv. 51】
【Lv. 45】
레벨 표시.
믿기지 않지만 나는 게임 속에, 내가 방금까지 플레이하던 라키로니아 사가의 세계에 들어온 모양이다.
그것 말고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생생하기 그지없는 감각이 현재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쯤은 확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게다가 이건······ 내 몸도 아니잖아?'
거울이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굳이 얼굴을 살피지 않더라도 내 몸이 아니라는 건 깨달을 수 있었다.
피부색이고 목소리고 체형이고 죄다 다른 데다가, 몸 자체에 평소와 다른 이질감이 들었으니까.
빙의? 게임 속 캐릭터에 빙의하기라도 한 건가?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
빠르게 혼란감을 가라앉히고 우선 이 몸의 처지부터 정리해보기로 했다.
방금의 짧은 대화에서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얻었으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호송선, 그리고 아체몬 수용소.
그곳은 사내의 말대로 죄수들의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며 거치게 되는 수많은 과정 중 하나이기에 나도 잘 알고 있는 장소였다.
'석방이나 탈출은 꿈도 못 꾸고, 평생을 가혹한 노역과 생체실험 속에 살다가 피가 다 빨려 죽는 곳.'
아무래도 나는 그 험지로 호송되고 있는 죄수들 중 하나에 빙의된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왜 들어와도 이딴 몸뚱이에······ 그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날 이런 개 같은 상황에 빠뜨렸단 말인가?
고민해봤자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보다도 당장의 생존 문제부터 어떻게든 해야 할 판이었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정신적인 괴리감.
'······나 왜 이렇게 침착하지?'
갑자기 게임 속에 들어왔고, 갑자기 구속된 채 수용소로 끌려가는 죄수 신세가 됐다.
아예 정신을 못 차리고 패닉에 빠져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보통은 그게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하고 바로 닥친 위기부터 해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요도 잠시뿐, 현재 느껴지는 감정은 공포나 두려움 등이 아닌 약간의 혼란스러움과 의문뿐이었다.
평소 그럭저럭 이성적인 편에 속한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에 이렇게까지 냉정할 수 있는 놈이었던가?
콰아앙!
그때 갑자기 울려퍼진 육중한 폭발음.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달아 울리는 폭발에 공간이 크게 흔들거렸다. 이번엔 또 뭐야?
당황한 죄수들이 웅성거리며 바닥에 늘어뜨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씨발, 뭐야? 뭔 일이야?"
"위쪽에서 뭐가 터진 것 같은데."
선체의 진동이 한참을 이어지던 중 죄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창살 너머로 향했다. 하나같이 놀란 토끼 눈으로.
감옥의 바깥을 둘러싸고 있던 푸른 장막이 서서히 빛을 잃으며 흐릿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장막이 완전히 소멸함과 동시에 누군가 소리쳤다.
"······억제장이 사라졌다!"
그 외침이 신호라도 된 듯 곳곳에서 우두둑 소리가 울렸다.
죄수들이 손발에 묶인 구속구를 부숴버리는 소리였다.
"크하핫! 뭐야, 이거! 진짜로 마력이 돌아왔잖아!"
"자유다! 싹 다 뒤집어엎자!"
그렇게 순식간에 몸의 자유를 찾은 죄수들이 환희에 차서 날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열린 난장판을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 상식을 벗어난 괴력이었다.
'쇠를 뭔 종이 찢어버리듯······.'
콰드득!
이내 쇠창살까지 뜯어버린 죄수들이 하나둘씩 감옥 밖으로 나섰다.
그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홀로 주저앉은 채 그 모습을 황망히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폭발음과 흔들리는 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알았으나 내게는 탈옥이라는 선택지가 없었다.
'썩을.'
아무리 힘을 줘도 꼼짝도 않는 구속구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이 몸뚱이의 근력은 본래의 내 몸과 별반 다르지 않게 평범한 수준인 듯 싶었다.
그래서 다른 죄수들처럼 자력으로 구속을 끊을 수도 없었다.
퍼어엉!
그 순간 또다시 폭음이 터졌다. 이번엔 굉장히 가까이서.
가장 앞장서서 출구로 나서던 죄수 하나가 도로 포탄처럼 날아와 벽에 처박힌 것이었다.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채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져 즉사한 모습에 다른 죄수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벌레 놈들이 신나서 팔짝거리기는. 감히 어딜 기어나오는 거냐?"
흉흉한 음성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우락부락한 죄수들이 전부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한 덩치의, 태산과 같은 위압감을 뿜어내는 노인.
"뒈지······!"
멋모르고 덤벼들려던 몇몇 죄수가 앞서 벽에 처박힌 죄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세가 됐다.
파리라도 쫓아내듯 노인이 가볍게 휘저은 주먹에 튕겨나가 으깨진 고깃덩이가 되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남은 죄수들까지 모조리 학살하기 시작했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속도와 파괴력.
차마 움직임을 눈으로 쫓을 수도 없어, 내 시야에는 그저 시뻘건 피분수와 함께 죄수들의 몸이 줄줄이 터져나가는 광경만이 비칠 뿐이었다.
한없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인간의 육체가 과일 터지듯 저리 쉽게 산산조각날 수 있는 거였나.
콰앙!
와중에 한 놈이 내가 앉아있는 근처로 날아와 처박혔다. 얼굴에 핏물이 튀었다.
죄수들은 저항도 도망도 시도하지 못한 채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했다.
사실 노인이 등장한 순간부터 그 결과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었다. 왜냐면······.
【Lv. 91】
······머리 위에 표시된 레벨에서부터 알 수 있었으니까.
그는 애초에 다른 차원의 괴물이었다.
기껏해야 40, 50레벨대의 죄수들이 얼마나 몰려들든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보통 RPG가 다 그렇지만 라사에서는 특히 레벨 격차가 클수록 전투 자체가 성립되기 힘들다. 머릿수 따위는 무의미했다. 하물며 수십 레벨의 아득한 차이여서야······.
'씨발.'
끔직한 참상, 진득한 피비린내.
볼에 튄 핏물을 닦아내며 나는 다시 한 번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난데없이 게임 속에 들어오고, 호송선의 죄수가 되고, 무언가 터지는가 싶더니 개판이 나고, 갑자기 나타난 괴물 노인네가 다른 죄수들을 싹 학살하고.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단지 확실한 것 하나는, 지금 내 목숨이 절벽의 썩은 동아줄에 매달린 것보다도 위태로워졌다는 사실뿐이었다.
"허, 그래도 얌전히 있던 놈도 있었나?"
신기하다는 듯 이쪽을 바라본 노인이 주먹을 한가득 적신 핏물을 털어내며 가까이 접근해왔다.
부서진 철창을 넘어 감옥으로 들어온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나도 말없이 그를 올려다봤다.
사실은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도망치지 않고 얌전히 있었으니 살려주지는 않을까 아주 작은 기대를 품어봤다.
그러나 아무래도 부질없는 희망인 듯했다.
노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눈빛이 묘한 녀석이군. 굳이 죽이고 싶진 않다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구나."
손두껑만 한 거대한 손이 내 머리 위에 올려졌다.
단지 그뿐임에도 금방이라도 머리가 찌그러질 것만 같은 압력이 느껴졌다.
여기서 노인이 조금이라도 손아귀에 힘을 주면 내 머리통은 산산히 터져나갈 것이었으며, 그건 이제 곧 일어날 미래였다.
죽는 건가? 이대로?
'······이딴 식으로 허무하게?'
이 와중에도 내 머리는 정말 어떻게 되먹은 건지 냉정하게 사고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죽어버리면 다시 원래의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닐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형편 좋게만 생각하고 지금의 목숨을 게임처럼 쉽게 내던져버릴 수는 없었다.
'······!'
찰나, 필사적으로 활로를 찾던 나는 무언가를 번뜩 떠올렸다.
게임 속에 들어오기 전 마지막 순간.
혼돈의 상자, 캐릭터의 모든 걸 융합해버리자 결과로 튀어나왔던 스킬.
[즉살]
모든 종류의 효과를 무시하고 대상을 즉사시킵니다. 대상과 접촉한 상태에서 발동이 가능하며, 적용 대상에 제한은 없습니다.
설마, 라는 생각이 스친다.
내가 게임에 빙의된 건 융합이 끝난 다음 곧바로였으니까.
확신 따위는 없었다. 다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나는 권성 가르톤이다.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특별히 들어주마."
나는 노인과 눈을 마주치고서 나지막이 입을 뗐다.
"죽어."
그와 동시에 머리에 올려져 있던 손이 스르륵 미끌어졌다.
쿠웅.
노인의 거구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