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제 하루 남았나······."
익숙한 로그인창에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며 가볍게 혀를 찼다.
게임의 서비스 종료.
공지가 뜬 건 몇 달도 전이었지만, 오늘로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유독 마음이 허해지는 느낌이었다.
라키로니아 사가, 약칭 라사는 내가 학창 시절부터 푹 빠져 장장 8년을 넘게 플레이해온 RPG 게임이다.
뛰어난 그래픽과 몰입감 높은 스토리, 광활한 맵과 세계관, 비교적 참신한 시스템들로 한때는 제법 인기를 끌었던 게임.
현재는 퇴물 게임으로 낙인 찍힌 지 오래고 골수 중의 골수 유저들만 남아있는 상황이지만, 인생의 3분의 1 가까이를 쏟아부은 이 게임은 뭐가 어쩌든 내 일상과도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런 게임이 끝내 서비스 종료를 알려온 것이다.
전조가 없던 것도 아니고, 솔직히 언제 종료를 해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허무함과 배신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캐릭터를 움직여 창고를 찾아가 보관된 아이템들을 화면에 띄웠다. 옆쪽에는 인벤토리도 띄웠다.
10년 가까운 시간을 플레이하면서 쌓인 수많은 아이템들.
그냥 평범하게 좋은 것들도 있었고, 엄청나게 좋은 것들도 있었고, 게임에서도 손에 꼽을 보물들도 있었다. 새삼 모아서 보니까 많기는 더럽게 많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캐릭터 정보창과 스킬창도 켰다.
【Lv. 99】
라사의 레벨 시스템은 레벨이 높아질수록 레벨업이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지는 방식이다.
더군다나 80레벨부터는 단순히 경험치뿐 아니라 온갖 까다로운 업적들까지 필요했기에 고인물의 상징이기도 했다.
99레벨이면 아직 그 위에 도달한 유저가 없는 라사의 비공식 만렙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1레벨이 아쉬울 뿐이었다.
'100레벨은 찍어보고 싶었는데.'
하늘을 찌르는 스탯 수치와, 온갖 스킬들,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장비들까지 줄줄이 나열되어 화면에 떠올랐다.
웬만큼 고인 유저들도 명함을 못 내밀 화려한 캐릭터 스펙이었으나 이제 와서는 다 부질없을 뿐이었다.
이깟 데이터 쪼가리들이 뭐라고 뭐 그리 모으고 강화하는 데 애를 써온 건지.
"시작해볼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흥미와 기대감이 솟아오르는 걸 느끼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것들을 전부 화면에 띄운 건 내 마지막 호기심을 위해서였다.
마우스 커서가 향한 곳은 창고 구석 칸에 박혀있던 한 상자 형태의 아이템이었다.
[혼돈의 상자]
세상 만물을 융합할 수 있는 혼돈의 상자.
아이템, 골드, 스킬, 스탯 등 캐릭터가 소유하고 있거나 캐릭터를 구성하는 무엇이든 재료로 설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등급: ★★★★★★★★★(9성
라사는 보통의 다른 RPG 게임들에 비해 굉장히 자유도가 높고 개성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 월드 곳곳에 숨겨진 히든 피스 같은 것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이 '혼돈의 상자' 역시 우연히 발견한 한 던전에서 얻었던 아이템이었다.
일단 설명에서 알 수 있듯 효과부터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온갖 특이한 스킬과 아이템들이 넘쳐나는 라사에서도 이보다 특이한 건 본 적 없었다.
단순한 아이템 합성이라면 특별할 것도 없지만, 이 혼돈의 상자는 아이템뿐 아니라 캐릭터의 스킬이나 스탯까지도 합성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설정할 수 있는 재료의 종류나 개수에 아예 제한이 존재하지 않았다.
'신기한 거 빼면 허울만 좋은 아이템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아이템을 사용한 건 얻었을 당시에나 재미 삼아 좀 써본 게 전부였다.
게임에서도 얼마 존재하지 않는 9성 아이템을 창고에만 박아놓고 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효율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졌지.'
아니, 떨어지다 못해 아예 없다시피했다.
보통 무언가를 합성하면 그보다 더 높은 가치의 무언가가 나와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건 가치가 향상되긴 커녕 오히려 하락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융합을 시도하면 그런 경우가 열에 아홉인 양심 나간 아이템을 어디에 좋다고 써먹으란 말인가.
물론 뭐든 재료로 삼을 수 있고, 결과로 뭐가 튀어나올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가지고 놀기는 좋았지만······ 딱 그 정도 가치뿐이었다. 여태까지는.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플레이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이만큼 훌륭한 아이템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융합의 재료를 설정하십시오.]
나는 혼돈의 상자를 활성화한 뒤 커서를 움직였다.
아이템, 골드, 스탯, 스킬,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클릭했다.
수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겨우겨우 만들어냈던 아이템들도, 그야말로 천운이 따라 얻을 수 있었던 스킬들도, 전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재료로 설정했다.
이래서야 융합이 끝나면 방금 막 생성한 1레벨 캐릭터나 다름없게 되겠지만, 뭐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마지막인데.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다 합성해버리면 과연 뭐가 튀어나올지.'
[재료 설정이 끝났습니다.]
[정말로 융합하시겠습니까?]
이윽고 준비가 끝났다.
"아."
망설임 없이 '예'를 클릭한 나는 그와 동시에 아차 싶었다.
다 선택한 줄 알았더니 스킬 하나가 재료로 설정되지 않았다.
[제왕의 혼]
영혼에 지고한 제왕의 격이 서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정신 계열 디버프에 완전 면역됩니다.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지배자의 품격과 위압감이 깃듭니다. NPC와의 대화에서 우위를 점할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등급: ★★★★★★★★★(9성
유형: 패시브
레벨: 1(Max
라사의 비공식 최고 등급인 9성의 스킬이나 아이템은 극도로 희귀하고 그 효과가 하나같이 사기적이다.
'제왕의 혼' 역시도 그런 9성급 스킬 중 하나였다.
[융합을 시작합니다.]
뭐, 됐나.
하나를 실수로 빠뜨린 건 조금 김이 샜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두운 오라를 뿜어내며 화면 너머에서 격하게 진동하는 혼돈의 상자를 바라봤다.
어째 원래보다 이펙트가 훨씬 요란스러운 것 같은데, 전부 다 때려넣어서 그런가?
몇 초 뒤 상자를 감싼 어둠을 뚫고 찬란한 빛이 터지더니, 알림이 떠올랐다.
[융합이 완료되었습니다.]
[즉살(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즉살]
모든 종류의 효과를 무시하고 대상을 즉사시킵니다. 대상과 접촉한 상태에서 발동이 가능하며, 적용 대상에 제한은 없습니다.
등급: ★★★★★★★★★★(10성
유형: 액티브
레벨: 1(Max
쿨타임: 없음
나는 눈을 깜빡이며 융합 결과로 튀어나온 스킬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 나지막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와, 씨발."
뭐야, 이건?
등급이 9성도 아니고 10성이라고?
라사에 10성의 등급이 존재했었다니, 지금껏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완전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튀어나와버렸다.
거기에 스킬의 설명을 읽으니 더욱 충격이었다.
'모든 종류의 효과를 무시하고 즉사? 거기다 쿨타임이나 대상 제한도 없어?'
대상 제한이 없는 즉사기라니, 그 말은 설마 일반몹뿐 아니라 보스몹에게도 사용이 가능하다는 뜻인가?
몇 시간은 붙어서 고생해야 겨우 잡는 극악한 보스들에게도 즉사 판정이 들어간다고?
'설마 그럴 리가······ 아니, 그래도 지금껏 없었던 등급의 스킬이잖아?'
나는 완전히 황당해진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으며 캐릭터를 움직였다.
생각만 하고 있을 것 없이 직접 확인해보면 그만이었다.
설마 섭종 하루를 남기고 이런 터무니없는 스킬을 얻게 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빨리 융합해볼 걸 그랬······.
울렁!
"······?"
순간 시야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더니 세상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깜짝 놀라서 비명을 내질렀지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귓가를 찌르는 기이한 이명과,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한 어지러움 속에서······.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서서히 의식이 아득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