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274화 (274/275)

274. 차원 원리와 화성

이반의 뜬금없는 말에 놀랐는지 모두 입을 다문 체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황당했는지, 아니면 너무 무서운 말이라 그런지, 누구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진성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구가 사라질 수도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정확한 건 아니야."

"이런···, 너무 무책임한 말 같은데?"

"확률상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기존 공식에 4개의 변수를 새로 추가했잖아. 그래서 난 상위차원으로 갈 수 있는 줄만 알았지. 그것도 4단계나 위에 있는 차원으로 말이야."

"맞아. 그래서 나와 문식이가 다 팽개치고 떠나자고 한 거잖아. 안 그래?"

지켜보던 정훈이가 정신을 차렸는지 거들었다.

"네가 상위차원으로 간다는 말만 하지 않았다면, 난 그냥 여기서 즐기며 살다가 생을 끝내려고 했어. 그런데 인제 와서 무슨 말이야?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이반은 그런 시선이 싫었는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더니 빈자리에 앉았다.

"미안해. 차원 원리에 너무 집착했어."

"파장만 통과할 수 있다는 차원 원리?"

"응, 맞아."

이반은 진성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탔는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잔을 들이킨 이반.

숨을 깊이 내쉬더니 다시 입을 주절거렸다.

"내가 시공간 이동에 관한 아이디어를 블랙홀에서 얻었다고 했잖아?"

"그랬지."

"그래서 입자와 광자 가속기를 이용해 극소형 블랙홀을 만들고 그 틈으로 시공간을 넘어 온 거잖아?"

"맞아. 다시 태어나야 했지만, 아무튼 너 이론은 우리가 이렇게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로 증명됐지."

야코프는 무지막지한 중력의 힘으로 모든 물질을 갈아버리고, 빛까지 끌어당기는 블랙홀의 매력에 빠진 적이 있었다.

대부분 경이로운 현상에 놀라며 '신기하다'고 생각만 하고 그냥 넘겼겠지만, 야코프는 아니었다.

천생 과학자인 야코프는 블랙홀에 관해 깊이 파고들었고, 끝내 시공간 이동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엄청난 에너지로 입자를 가속해 충돌시키면 극히 짧은 시간 동안 극히 작은 블랙홀이 생성된다는 것을 안 야코프.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블랙홀을 통과하면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이론을 완성했다.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고 싶은 야코프.

참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그걸 이용해 시공간 이동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그 와중에 휩쓸린 문식이와 공식이는 덤이었다.

"그런데 지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은 뭐야? 너무 작은 블랙홀이고 순식간에 생겼다 사라지는 거라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맞아. 영향을 줬다면 지구는 진작에 사라졌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잖아?"

"않았지. 벌어졌다면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

지금도 입자 가속기를 이용해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기에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블랙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그런데 해변에서 몰아치는 파도를 보다가 새로운 변수 4개가 떠올랐어. 난 그 변수를 차원 변수라 생각했거든."

"아니었던 거야?"

"그런 것 같아. 장비를 점검하다가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거든. 나는 추가한 4개의 변수가 또 하나의 민코프스키 시공간(Minkowski Spacetime)을 구성하는 변수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말이지?"

"응. 변수들이 쌍선형 형식(雙線型形式, Bilinear Form)에 맞지 않아."

"이런!"

진성이는 문식이를 기다리는 동안 이반에게 시공간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들었기에 지식이 제법 쌓여 있었다.

"전혀 다른 거였어. 블랙홀을 통과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려면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 사건의 지평선 또는 사상의 지평선)에 물질에 관한 기록을 모두 남기고 파장으로 변해 차원을 넘어간다는 사실에 너무 집착한 거야."

1907년 독일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통일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시공간 기하학이라는 화두를 세상에 던졌다.

이반은 그 이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변수가 전혀 다른 민코프스키 시공간으로 이동하는 건 줄 알고 흥분했던 건데.

아니었던 거다.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훈이가 한심하다는 듯 이반을 쳐다보더니 한소리 했다.

"공식이가 허당! 허당 하더니 진짜였군. 머리가 작아도 똑똑하길래 머리 크기는 지능과 관련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네."

도발하는 정훈이의 말에 이반이 발끈했다.

"뇌 용량과 지능은 상관없거든! 까마귀는 뇌가 작아도 웬만한 개나 원숭이보다 똑똑해. 그 이유는 뇌 용량이 아니라 뇌에 퍼져있는 뉴런(Neuron)의 밀도가 지능을 결정하기 때문이지."

이때 듣고만 있던 태자가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은동리 연구 결과 뉴런이라고도 부르는 신경원(神經元)의 밀도가 지능과 아주 밀접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 많은 연구원들이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경원의 구성과 우주의 구성이 거의 같다고 하던데 참말입니까?"

연의 추종자라 자처하는 태자라 그런지 과학적 지식이 상당(相當)했다.

"네, 전하. 거의 가 아니라 완벽할 정도로 같습니다. 그래서 뇌를 가지고 연구를 더 해봐야겠습니다. 제가 추가한 새로운 변수는 파장만 아니라 입자까지 이동시키는 것 같으니···."

진성이가 입을 열려는 순간 황제가 먼저 물었다.

"그래서 지구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한 겁니까?"

"네, 폐하. 그래서 우주로 나가 연구를 했으면 합니다. 은동리의 첫 번째 규칙은 안전이지 않습니까?"

전생에 은동리에서 반백 년 넘게 살았던 이반이라 안전에 관해서 모를 수 없었다.

비록 잦은 실수는 있었지만, 크게 다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름대로 안전에 주의하고 있었던 거다.

"알겠습니다. 삼태성께서 원하시면, 뭐든 지원하겠습니다. 조선이 이처럼 대단한 과학 기술을 보유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삼태성 덕분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결과는 꼭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폐하."

상위차원으로 갈 수 없다는 말에 정훈이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황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함께 떠나기로 했다.

정훈이는 자신이 원했던 세상을 한번 겪어 봤기에 더는 생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 * *

조선 제국력 410년(2068).

10년 전, 황제의 지원으로 화성에 터를 잡은 세 사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에 열중했다.

기대했던 상위차원은 아니지만, 새로운 차원으로 가기 위해 힘을 합쳤다.

지구에서 벗어나 화성에서 살게 된 셋은 서로를 공식이, 문식이, 야식이라 불렀다.

여러 생을 산만큼 이름 또한 다양했기에 통일한 거였다.

우주복을 입고 있는 귀여운 문어가 잔뜩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문식이가 연구소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외쳤다.

"공식아! 야식아! 먹고 하자!"

눈 밑이 거무죽죽하고 기름기가 번질거리는 얼굴로 나타난 공식이와 야식이.

그들의 눈은 문식이가 들고 온 음식 통에 고정되어 있었다.

"또 손님들 음식 뺏어 온 거야? 우리야 좋지만."

"어허! 뺐다니. 주길래 받아 온 거지."

화성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투명한 반구형 돔으로 덮인 기지를 만들었지만, 지구에서 가져온 식물을 키우는 건 쉽지 않았다.

미약한 태양 빛과 너무 낮은 중력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력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잘 자라는 감자 같은 줄기 식물이나 고구마 같은 뿌리 식물을 재배하여 탄수화물을 얻고, 인공으로 합성한 단백질을 먹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화성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힘들었다.

태자가 양질의 음식을 수시로 보내주지 않았다면, 고양이가 좋아하는 츄르 같은 영양식만 빨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릴 먹여 살리려고 고생이 많다."

"고생은 뭐, 너희들이 고생이지. 그런데 언제쯤이면 끝날 것 같아? 기다리느니 지구에 갔다 오려 하는데···."

"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에 온 손님 중에 내 가슴을 설레게 한 분이 있어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둘과 달리 연구소 살림을 맡아 하던 문식이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화성 전문 여행안내인을 자처했다.

다양한 여행객들에게 화성을 자주 안내해주다 보니 이젠 문식이만큼 화성에 관해 아는 이는 드물 정도였다.

"그래서 같이 떠나려고?"

"내가 마추픽추(Machu Picchu)를 안내해주기로 했거든."

"적당히 하고 와. 정들면 안 되잖아?"

"뭐, 나나 그녀나 살 만큼 살았는데 별일 있겠어?"

이제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의 나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증기기관처럼 효율이 엉망이고 관리도 힘든 기술은 건너뛰었던 조선.

의학 또한 독특하게 발전했다.

대전쟁시대 이후에도 간간이 전쟁이 발발한 곳이 있었지만, 1, 2차 세계 대천처럼 참혹한 전쟁은 없었기에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엄청난 과학 기술로 만든 최첨단 장비가 있기에 조선의 의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중 하나가 핵산(DNA, RNA)을 이용한 유전자 치료였다.

주사 한 방이면 반짝이는 머리를 풍성한 머리카락으로 덮을 수 있었고, 젊음 또한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광속의 12%까지 낼 수 있는 핵융합 엔진 덕분에 지구에서 이동하는 것보다 공기가 없는 태양계에서 이동하는 시간이 훨씬 더 짧았다.

이론상 핵융합 엔진이 탑재된 우주선은 지구에서 화성까지 1분이면 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그 속도를 견딜 수 없기에 가속과 감속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 해도 하루면 충분히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지구에서 화성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여행자 대부분이 60세가 넘은 이들이었다.

젊은이들은 굳이 화성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가상 공간에서 완벽하게 체험할 수 있는데 굳이 비싼 돈을 들여 화성에 직접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다.

"뭐, 정신연령이 비슷해 큰 문제는 없겠지. 그래도 적당히 해."

"알았어."

"그러지 않아도 새로운 가속기가 탑재된 우주선이 곧 완성된다고 하니 함께 가자. 이번이 마지막 지구 방문이 될지도 모르니."

"정말? 곧 완성된 데?"

"응. 태자가 완벽하게 검토까지 끝내면 연락을 준다고 했어."

"그럼 연락 오기 전까지 지구에서 지낼 수 있겠네."

"그건 아니야. 우주선에 채울 일꾼 로봇과 전투 로봇도 만들어야 해. 지금 그 작업 중이라 우리가 이 꼴인 거 너도 알잖아."

공식이는 화성에 와서야 조선의 기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구와 비교하여 0.38배에 불과한 중력 때문에 대기조차 잡아 둘 수 없는 화성.

사람은 장기간 살 수 없지만, 로봇은 상관없었다.

그래서인지 화성에는 엄청난 수의 로봇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두 자원을 캐고, 뭔가를 만드는 일꾼 로봇들이었다.

화성에 도착한 공식이는 곳곳에 돌아다니는 로봇들을 보고 함께 화성까지 따라온 태자에게 물었다.

'이것들은 다 뭐냐?'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른 겁니다.'

'응? 내가?'

'네, 폐하께서 남기신 말씀에 '섣불리 진출하지 마라. 모두가 호의적이진 않을 테니' 이런 글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해도 너무 많은데···?'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양계 곳곳에 이보다 많은 로봇이 가동 중입니다. 폐하께서 '몰매에는 장사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네, 폐하. 우리가 이만큼 발전했는데 우주 다른 곳에도 그런 문명이 존재할 것 아닙니까?'

태양계의 끝인 오르트 구름대까지 진출한 인류는 더는 외부로 전진하지 않았다.

외계의 위험에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지. 아무튼 잘했다. 무력 없는 평화는 없으니.'

조선의 로봇 기술은 기계공학 추종자들로 인해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거기에 효율을 생각하지 않고 과감히 투자해 온 조선전력공사 덕분에 로봇 기술은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움직이는 로봇을 개발한 인류.

태양계에 널려 있는 자원을 이용해 혹시나 모를 외계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모두 공식이가 남긴 책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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