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재회 그리고 추가된 변수
마음의 창이라는 눈.
그 눈을 본 순간 진성이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야코프라는 걸.
생전 처음 본 얼굴이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품어져 나오는 눈빛은 그리움과 반가움이 섞여 있었으니.
진성이는 야코프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았다.
다시 태어난 만큼 이름도 달라졌을 거니까.
열린 입을 닫은 진성이가 머뭇거리는 순간.
야코프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진성아! 나야! 나. 이반."
"아, 이반이구나.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그러게. 아무튼 반갑다. 진성아."
"어, 나도."
"성인 교육대에서 헤어진 후 널 만나고 싶었어. 할 이야기가 있거든. 그런데 너 연락처를 알 수가 있어야지. 다행히 문식이가 알고 있더라고."
진성이는 문식이라는 말에 눈동자가 커졌다.
'틀림없구나.'
야코프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아니라면 문식이란 이름을 알 순 없을 테니.
"그래?! 문식이는 잘 있고?"
"응."
"그런데 왜···?"
"아, 문식이는 일이 있다고 해서 함께 오지 못했어."
"아쉽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진성이는 마주 서 있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성인 교육대에서 저랑 가장 친했던 친구예요."
"들었다. 참 좋은 친구들 두었구나. 한 달 전에 있었던 너 경기를 보고 수소문 끝에 여기까지 찾아왔다는구나. 어머! 내 정신 좀 봐. 마실 것도 주지 않았네. 잠깐만 기다리렴."
"괜찮아요. 엄마. 멍청아!"
-네, 작은 주인님.
"야, 아니 이반. 뭐 마실래?"
"아무거나."
"멍청아, 시원한 얼음 커피 두 잔만 타줘."
-네, 작은 주인님.
가정용 인공지능과 로봇이 있어도 음식에 관해서는 직접 만들어 먹는 게 문화였지만, 마음이 급한 진성이는 엄마 대신 인공지능에게 주문했다.
진성이는 집 뒤뜰에 있는 정자로 이반을 데려갔다.
시 외곽 주택단지에 있는 진성이네 집은 무척이나 넓었다.
땅 넓은 호역이라 주택단지 기본 구성단위가 300평이었는데, 진성이네 집은 무려 5,000평이나 됐다.
부모님이 운동을 좋아하는 진성이를 위해 넓은 대지가 있는 집을 얻은 거였다.
"집 좋네. 나도 이곳에 집을 구할까 봐."
"나야 좋지. 그런데 문식이는?"
"나도 몰라. 기억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 너 경기를 보지 않았다면 아직도 기억을 찾지 못했을 거야."
"그랬구나. 예상은 했는데, 내 예상이 맞았네."
"무슨 예상?"
"네가 만든 공식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거든."
진성이는 세종 서버에서 받은 보고서를 이반에게 넘겼다.
무려 100만 원(약 10억)이나 주고 얻은 보고서지만, 그 내용은 짤막했다.
그런데도 한참 들여다보던 이반이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또 실수했네. 처음엔 출력이 과했고, 이번에는 출력이 약간 부족했군. 그런데 신기하네."
"뭐가?"
"사람 수는 상관없다고 봤거든. 그런데 아니었잖아."
어딘가 어설픈 허당끼가 있는 야코프지만, 연구에 관해서는 철두철미했다.
진성이는 그런 그가 실수할 일은 없다고 봤기에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았던 거다.
나중에야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간 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도 문식이와 야코프는 기억을 되찾지 못했을 거다.
"다음에는 실수하지 마."
"다음이라니? 또 다른 생을 살고 싶어?"
"음···,"
진성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인데, 이반이 묻자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문식이는 어디 있을까?"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곧 나타날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나처럼 너 경기를 봤다면 기억이 돌아왔을 테니."
"정말 그럴까?"
"그럼! 단지 출력이 조금 부족해서 트리거가 작동하지 않았던 거야."
이반은 자신이 만든 공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아마도 자존심이 상했기에 그런 것 같았다.
연이어 두 번이나 사고를 쳤으니.
* * *
정훈이가 된 문식이는 이반보다 먼저 호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공식이가 어디에 사는지 알 수 없었기에 헤매고 있었다.
"호역 제일검이라고 해서 호역에 왔는데 아무도 공식이가 사는 곳을 모르네."
경기가 열렸던 방송국까지 찾아가 보았지만, 사생활 보호가 우선이라며 개인 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누리넷에서 얻은 정보로 진성이가 다녔던 학교 주변을 수소문했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는 말만 들었다.
"짜식! 이번에도 복 받았네."
진성이의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운동 능력은 이성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성이 부모님은 힘들기만 했다.
처음에는 잘난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쪽지와 함께 선물을 남기고 가는 여학생들이 많아지자 부모님은 서둘러 다른 곳으로 집을 옮겼다.
이성은 물론 동성 친구조차 관심이 없는 진성이.
일일이 찾아가 받은 선물을 돌려줬고, 그럴 때마다 원망 섞인 여학생의 눈물을 보았다.
"그나저나 골치 아프네."
그동안 얻은 정보에서 진성이가 물맥질하러 자주 간다는 해변을 알아냈지만, 해변의 길이가 무려 57km나 됐다.
"빌어먹을! 이래서 골드코스트라 불렀구나."
진성이가 사는 곳은 황금 해변을 끼고 있는 '금해시'였다.
호역에서도 휴양지로 가장 유명한 도시였기에 추운 북반구를 피해 이곳으로 여행 온 사람들이 많았다.
"혼자 지내길 좋아한다고 했으니, 주택단지와 가까운 한적한 해변부터 찾는 게 빠르겠지. 똑똑아, 그런 해변부터 찾아봐 줘."
-네, 제로니모님. 가장 가까운 곳은······.
300여 년 전부터 유행했다는 똑똑이 전화기는 100여 년 전에 완전히 사라졌다.
콩알만 한 배터리가 내장된 똑똑이 시계의 기능이 넘사벽이었고, 한 번 충전하면 1년은 거뜬히 쓸 수 있기에 그런 거였다.
정훈이는 대여한 로봇 말을 타고 황금 해변을 달렸다.
주로 혼자서 노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며.
해변에 모기떼가 극성이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동물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모기는 모두 멸종되었기에.
그러던 어느 날.
해변에서 쉬고 있는 건장한 청년 두 명을 스쳐 지나갈 때.
귀에 익은 자신의 이름이 들렸다.
급히 로봇 말을 세운 정훈이.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돌아서자 두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다가간 정훈이는 말에서 내려 정중하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네?!""
"이곳에서 자주 물매질을 한다고 하던데, 야코프 공화국에서 온 공식이란 사람을 혹시 아십니까?"
서로를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난 두 사람.
놀란 눈으로 외쳐 물었다.
"제로니모?"
"문식이?"
그 순간 정훈이는 주저앉았다.
모래를 움켜준 그의 손은 부들거렸다.
"드, 드디어 찾았구나. 맞아! 나 문식이야."
""문식아!""
건장한 세 청년이 서로를 얼싸안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세 청년은 한참 동안 재회의 기쁨을 나누더니, 진성이가 투덜거리며 정훈이에게 말했다.
"너도 그렇고, 애도 그렇고, 약속한 누리넷 사이트에 접속만 하면 쉽게 연락할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고 그래?"
"미안, 그 생각은 못 했네. 다급한 마음에 무작정 이곳으로 왔어. 오면 쉽게 찾을 수 있을지 알았지."
"미안은···, 그나저나 어떻게 살았어?"
정훈이가 살아왔던 과정을 이야기하자.
진성이가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혹시나 했는데, 진짜 너였단 말이지?"
"응, 아빠가 그러는 게 좋다고 하셔서···."
"어쩐지, 너 아니면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없는데. 그나저나 축하해! 유명한 작가가 돼서."
"고마워. 그나저나 야코프? 넌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진성이와 정훈이가 말하는 동안 듣고만 있던 이반은 수시로 표정이 변했다.
"신기해."
"뭐가?"
"내가 생각한 데로 오차 없이 비슷한 시기에 우리가 다시 태어났어. 그런데 태어난 곳 말이야 너무···."
정훈이가 이반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아, 그거? 나도 너희들을 찾아다니면서 생각해 봤거든. 내가 생각하기엔 동상이 그렇게 만든 것 같아."
"뭐?"
"동상?"
진성이와 이반이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너무나 뜬금없기에 그런 거였다.
"응, 내 동상이 가장 많은 곳이 아파치 왕국이고, 너 동상은 야코프 공화국. 그리고 넌 이곳 호역에 가장 많잖아."
"뭐?"
과학적이지 않은 말에 이반은 정색했지만, 진성이는 아니었다.
"잠시만, 말이 되는데. 다시 말하자면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거잖아?"
"그치!"
"신기하네."
"그러게···."
정훈이는 자신의 말에 수긍하는 두 사람의 반응에 신이 났는지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묘호(廟號)도 그래. 제국이 된 조선은 황제 묘호를 써도 되지만, 쓰지 않고 있지. 신기하지 않아?"
"그거야 효종께서 그러라고 해서 그런 거야. 제국이 된 조선이니, 더는 중원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하셨지."
"그랬던 거야?"
"응."
조선의 역사를 모르는 이반은 듣고만 있었다.
미안한지, 그런 이반의 등을 두드려 준 정훈이가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그런데 왜 너 이후로도 묘호가 같아?"
"같기는, 한자가 다른데."
"그래도 발음은 같잖아."
"흠···. 왜 그럴까? 신기하네."
"그치! 너도 신기하지?"
"응, 후대로 가면서 달라지긴 했어도 정말 신기하네."
진성이는 손가락으로 묘호를 세어 보더니 다시 말했다.
"나 이후 10대까지는 발음이 거의 비슷해. 물론 조(祖)는 없고 전부 종(宗)이지만."
"너 이후 10대까지면 순종이고, 그 이후는 없잖아. 그래서 그런 것 아닐까?"
"그런가?"
듣고 보니 여러모로 신기했다.
비록 효종이 중원에서 쓰는 황제의 묘호를 쓰지 말고 쭉 써왔던 조선의 묘호로 해달라고 했지만, 이처럼 비슷하게 묘호가 정해지다니 놀라웠다.
이때 이반이 나섰다.
"아무래도 어떤 흐름이 있는 것 같아. 그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규칙이고."
"인과율(因果律, Causality)을 말하는 거야?"
"그게 뭐지?"
"원인에 따른 결과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말이야."
정훈이가 인과율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 이반은 뭔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으로 모래에 수식을 적어 나갔다.
"뭐 하는 거야?"
"문식아, 잠시만."
진성이는 이반이 풀고 있는 수식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건 바로 양자 이론을 이용한 시공간 도약에 관한 거였다.
그런데 일전에 설명해줬던 수식과 매우 달랐다.
"기본적인 것은 같은데···, 어? 변수 하나가 더 추가됐네?"
"하나가 아니야. 4개를 더 추가한 거야."
진성이의 말을 정정해준 이반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수식을 풀어나가는 이반.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는 진성이와 정훈이.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다.
넓은 해변 모래밭에는 이반이 풀어나간 수식이 가득했다.
"공식아?"
"어. 말해."
"잘하면 상위 차원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뭐?"
"상위 차원?"
놀란 두 사람을 보고 씩 웃는 이반.
그런 이반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는 진성이와 정훈이.
석양빛에 황금색으로 물든 해변에 세 사람이 있었지만, 침묵만 존재했다.
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찰나와 같은 순간이 지나고 이반이 입을 열었다.
"인과율이라고 했나? 아무튼 원인과 결과가 정해져 있다고 가정하고 수식을 새로 만들었어. 그러자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했어. 바로 이거야."
모래밭에 어지럽게 쓰여있는 수식을 가리키는 이반.
정훈이는 알 수 없기에 진성이를 쳐다봤다.
"새로운 거라니, 뭘 말하는 거야?"
"방금 말했잖아. 상위 차원."
"진짜야?"
"응, 변수 4개를 추가했더니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어. 그래서 말인데 이걸 연구할 시설이 필요한데···."
말을 얼버무리는 이반.
조선전력공사에서 받은 엄청난 보상금이 있지만, 그걸로는 어림도 없었다.
곤란해하는 이반의 표정을 보고 진성이가 나섰다.
"그건 걱정 마. 내가 준비해 놓은 게 있으니. 그런데 진짜야?"
"수식은 정직하지."
"알았어. 그럼 어떻게 할래? 바로 한양으로 갈까? 아니면 좀 더 즐기다 갈까?"
"즐길 게 뭐가 있다고 바로 가자."
"알았어."
진성이와 이반이 결론을 내리자, 정훈이가 따졌다.
"이러는 게 어딨어?"
"왜?"
"너희 둘이 결론을 내리면 어떡해?"
"아, 미안. 너는 어쩔래?"
"어쩌긴 뭘 어째. 먼저 뭔지 설명은 해줘야 할 것 아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