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뜻밖의 방문자
태자는 갑자기 흥분하는 황제를 처음 보았기에 놀랐다.
그런데 그런 태자를 마주한 황제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찾았다는 듯 반짝이는 눈빛과 함께.
"아버지!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너도 알아야 할 때가 온 건 같구나. 내년이면 너도 정식으로 황실 위원이 되니."
"예에?!"
태자의 의문에 황제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떼면서 말했다.
"뭐 하느냐? 따라오거라."
"네, 네."
황제를 따라 태자가 간 곳은 자주 와봤던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의자에 앉은 황제는 책상 가장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고 뭔가를 꺼냈다.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새하얀 조선 비단에 쌓여 있는 모습이 책 같았다.
"그건 책 아닙니까?"
"네가 가장 좋아하는 선황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것이다."
"현종께서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인 황제는 조심스레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더니 책을 꺼내 태자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은 현종께서 우리 후손들이 사고 치지 말라고 남기신 마지막 책자다. 그리니 조심히 다루거라."
"네, 아버지."
태자가 책장을 넘기려 하자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마지막 장을 먼저 보려무나. 그럼 그동안 황실 위원들께서 왜 그렇게 살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왜 그리 놀랐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래요?"
태자는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며 서적과 황제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변화가 없었다.
대신 단호하고 강직한 목소리로 황제가 말했다.
"직접 보면 알 것이다. 황실 위원이 되려면 그 책자를 다 읽고 소감을 말해야 한다. 그게 경종께서 추가한 황실 위원회 규칙이다."
"아···!"
태양계를 정복한 숙종에 이어 화성을 개발한 경종은 태자가 현종 다음으로 존경하는 선황이었다.
그래서인지 태자는 경건하게 옷차림을 정돈한 후, 책장을 다시 넘겼다.
"이건!"
마지막 장에 쓰여 있는 글을 보고 놀라는 태자.
황제는 그런 태자에게 고개를 짧게 끄덕이더니 입을 열어 물었다.
"놀랍지 않으냐?"
"좀 전에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이 글이었습니까?"
"그렇다. 그 세 마디 문장은 현종께서 남기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참말입니까?"
황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인생 별거 없다. 즐겁게 살 거라. 그게 남는 거다···. 나도 처음 이 글을 봤을 때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가장 위대하신 군주라 칭송하는 현종께서 남기신 거라고 믿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세 마디 문장을 황실 위원들이 따랐기에 우리 조선이 지금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세상을 이끌어 올 수 있었다."
"선대 위원들께서 기행을 일삼았던 것도 이 글 때문입니까?"
"그렇지. 그분들은 권력을 탐하기보다 세상을 즐기기 위해 노력하셨지."
"아···!"
태자는 왜 선대 위원 중에 기인이 많았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현종의 마지막 가르침을 따른 거였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아버지, 그래도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자가 말한 것은 이 세 마디 말 중 두 마디였을 뿐입니다."
"그자? 그분이라 칭하거라."
"그자, 아니 그분께서 환생하신 선황이시라고 믿는 것입니까?"
"믿을 수밖에···."
황제는 뭔가를 다시 떠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 쓰신 검술을 보았느냐? 너도 배웠으니 그분이 쓰신 검술이 무엇인지 알 거다.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이 쓰신 마지막 일격은 검수대의 필살기였다. 너도 보지 않았느냐?"
"그러긴 했지만, 그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검의 천재라고 하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의심이 들어 경기가 끝났지만, 면담까지 지켜보았다."
"아···!"
조선 황실에 대대로 내려오는 소문이 있었다.
믿기 힘든 소문이었기에 괴담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괴담으로 취급받는 소문.
황실 위원들의 기행.
그리고 호역 제일검이 펼친 검술이 떠오르자 태자는 아버지가 왜 그리 흥분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소문이 사실입니까?"
"나도 확신하진 못한다."
"네?!"
"너도 알지 않으냐? 현종에 관한 조사는 금기시되어 있다는 것을."
"그러긴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조선의 황제신데···."
"황제이기에 황실 위원회에서 결정한 일은 꼭 지켜야 한다. 그게 선대의 일이라도.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연이 떠나고 수백 년이 지났지만, 선을 지키는 일은 지속되었다.
그럴 수밖에.
연이 만든 조선을 침략할 나라는 없었다.
조선이 다른 나라를 침략할 일도 없었다.
따라서 전쟁도 없었고, 경제 위기 따위는 단어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현종에 관한 일은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황실조차 금기시했기에 학자들은 의문이 가득했지만, 조사한다고 설칠 수 없었다.
일하지 않아도 즐기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든 현종.
그런 현종이기에 학자들은 백성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그에 관한 일은 지금까지 묻혀있을 수 있었다.
연의 가르침에 따라 조선 황실은 백성들을 자식처럼 돌봤다.
조선 영토 자체가 모두 황실 소유였기에 난개발은 있을 수 없었다.
조선전력공사는 개발에 앞서 지역 백성들을 선발해서 개발 위원회를 만들었다.
돈에 상관없이 가장 이상적인 도시를 건설했다.
그랬기에 조선 백성이라면 누구나 도심지에 최첨단 시설이 갖추어진 집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일하지 않아도 기초생활비를 지원해줬기에 평생 놀면서 살 수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은 발전하고 있었다.
조선 산업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조선전력공사와 화폐를 관장하는 조선은행이 모두 황실 소유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방국까지 진출한 거대 기업들이 많았지만, 조선전력공사에 비하면 구멍가게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돈 많다고 패악질하는 자는 없었다.
돈 많다고 설치는 것 자체가 망하려고 작정한 거와 같았으니 그럴 수밖에.
아무튼 조선전력공사에 취직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아직도 넘쳐났다.
풍요롭기만 한 세상이었지만, 숙종이 말한 한계선인 5할 이하로 떨어진 적은 없었다.
연이 예상한 대로 항상 6할 이상은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백성들로 채워졌다.
투기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투자도 단순했기에 그에 따른 위기를 조장할 수 없었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수시로 등장하는 경제 위기의 주범 부동산.
그런 부동산을 조선 황실이 직접 관리하고 있다.
따라서 부동산 투기로 인한 경제 위기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 * *
진성이는 지팡구 제일검을 이기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쓴 필살기였는데 그 필살기를 보고 뒤집힌 곳이 또 있었다.
"대장! 저 검법은 우리 검수대의 필살기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저자가?"
"크흠···."
조선 황실의 마지막 수호자라 일컫는 검수대.
검수의 뜻을 받들어 연이 만든 무력 조직이다.
연이 가장 믿었던 조직은 조서원이었다.
또한 연이 가장 경계했던 조직도 조서원이었다.
완벽할 정도로 얽히고설킨 조선의 체계를 무너트릴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조서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조서원에 대항하기 위해 연이 추가로 만든 조직이 검수대였다.
연이 떠난 후.
삼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반란을 꿈꾸는 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실행에 옮긴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조서원과 경비대에서 고르고 고른 이들만 추려 뽑은 검수 대원들이 사전에 그런 자들을 모조리 제거했기에 그런 거였다.
황실 위원들도 검수대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권력을 탐하기보단 인생을 즐기는 쪽을 선택한 거였다.
"혹시 유출된 건 아닙니까?"
"그럴 일은 없다. 나조차도 저처럼 완벽하게 구사(驅使)하진 못한다."
"정말입니까?"
"흐음···."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검수대 대장을 보고 대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나도 알 수 없다. 폐하를 뵙고 여쭤볼 수밖에. 그러니 너는 성지로 가서 채비(差備)를 갖추거라."
"네! 대장."
조선 황실의 마지막 수호자라 일컫는 검수대의 본진이 있는 곳은 뜻밖에도 여의도 성지였다.
황실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경복궁은 대대로 내명부를 호위하는 총수대가 지키고 있었고, 검수대는 핵융합 발전소와 최첨단 시설이 갖춰진 여의도에서 훈련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특이한 게 있었다.
남녀가 섞여 있는 검수대와 달리, 총수를 기리기 위해 만든 총수대는 전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인들만 존재하는 내명부의 특성상 그리된 거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내시 제도가 폐지됐기에 그리된 거였다.
아무튼 긴 칼로 까불대는 지팡구 제일검에게 조선의 진짜 검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던 진성이로 인해 연과 연관이 있던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진성이는 즐겁기만 했다.
꺼내든 필살기 때문에 정체가 탄로(綻露) 날지도 모르는데도 진성이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진성이는 이번 대전으로 받은 막대한 상금을 어디에 쓸지 생각하느라 바빴을 뿐이다.
* * *
조선 제국력 400년(2058) 1월 1일.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바쁜 일정을 보낸 황제는 검수대의 수장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받고 태자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올 줄 아셨습니까?"
"당연하지 않소?"
"폐하께서도 보셨군요.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흐음···."
밤새 잠을 설친 황제는 답을 찾지 못했는지 침음을 내뱉었다.
검수대 수장까지 찾아왔기에 확신이 더해졌지만, 그렇다고 당장 찾아갈 수는 없는 일.
"지켜봅시다. 진짜 그분이시라면 성지로 오시겠지요."
"저도 그리 생각해서 채비하라 했습니다."
"잘하셨소."
황제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릴 때 현종의 일대기를 읽고 치솟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너무나 대단했기에 신이 아닌가 의심까지 했었다.
하지만 신이라 칭하는 자는 일단 총부터 쏘라는 지시를 했던지라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소문만 무성하던 현종에 관한 일.
조사조차 하지 말라는 선황의 엄명이 있었지만, 궁금함은 커져만 갔다.
그래서 나름대로 알아본 봐.
'혹시 시간 여행자 아닐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황실 위원이 된 후 현종이 손수 적어 남겨 놓았다는 책자들을 볼 수 있었다.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현종이 남긴 수십 권이나 되는 책자들은 한결같이 미래를 예측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적혀 있었다.
따라서 신이 아니라면 미래에서 온 사람이 틀림없었다.
'이래서 조사조차 하지 말라고 하셨구나.'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심양에서 태어나신 게 확실한데···. 어떻게···?'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서 쳐들어온 왜놈들과 되놈들로 인해 벌어진 4번의 전쟁으로 폐허나 다름없는 조선.
그런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운 현종의 일대기를 보면, 이해되지 않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길 원했지만, 황실은 그에 관한 자료를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소문만 무성해졌다.
그렇다 해도 그 누가 대놓고 따질 수 있으리.
이처럼 풍요로운 세상을 수백 년 동안 이어지게 만든 현종의 업적을 트집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묻고 넘어갔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내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라는 책자에 남긴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황들은 다시 올지도 모른다며 현종을 기다렸다.
'그게 내 대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구나···. 그런데 뵈면 뭐라고 해야 하지?'
새해 첫날부터 황제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 * *
호역 제일검에서 세기의 제일검이 된 진성이는 달라진 게 없었다.
오늘 하루도 파도를 헤치며 물매질을 하고 난 진성이는 남반구의 뜨거운 햇살 아래 쉬고 있었다.
진성이는 세기말 행사에서 받은 상금으로 요트를 주문해 놓았다.
하지만 밀린 주문이 많다고 기다리라는 통보를 받았다.
"체! 우주선도 며칠이면 뚝딱 만드는 시대에 대기라니···."
투덜거리는 진성이.
자신이 주문한 요트는 진짜 나무로 제작하는 것이라 오래 걸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만을 토했다.
그때 손목에 차고 있던 똑똑이 시계에서 화면이 떠 올랐다.
-마님께서 연락하셨습니다. 연결할까요?
"응? 무슨 일이지. 연결해줘."
한량처럼 지내고 있지만, 할 일은 하고 있기에 이 시간에 엄마로부터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진성아? 빨리 집에 와야겠다. 손님이 찾아왔어.
"네, 손님이라고요?"
-응. 네 또래 같은데 야코프 공화국에서 너를 만나야겠다고 찾아왔데.
"그래요? 누군데 연락도 없이 찾아왔데요?"
-그건 나도 모르겠고, 은동리 연구원이라고 하던데.
"그래요? 혹시 사기···. 아니에요. 바로 갈게요."
-그래 빨리 온 나.
조선에서 사기를 치다가 목이 달아난 자가 한둘이 아니기에 진성이는 의심을 넣어두고 집으로 향했다.
물매판을 타고 집에 도착한 진성이.
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저 왔어요."
엄마의 대답보다 먼저.
진성이 눈에 엄마와 다정히 담소를 나누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