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인생 별거 없다
아파치 왕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태어난 정훈이는 재주가 남달랐다.
어릴 때부터 말을 잘했던 그는 글재주도 탁월(卓越)했다.
그런 정훈이가 쓴 소설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가 아직 어리다는 사실을 출판사 관계자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처음 정훈이의 글을 본 출판사 담당자.
그의 아빠였다.
정훈이 아빠는 아들의 글재주도 글재주지만, 뛰어난 그의 상상력과 진실처럼 느껴지는 필력에 감탄하고 출판을 결심했다.
하지만 고민이 있었다.
정훈이의 나이가 너무 어렸던 거다.
그래서 정훈이 아빠는 아들이 진짜 원작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출판하기로 했다.
그게 정훈이에게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다.
'정훈아?'
'네, 아빠.'
'너는 너무 어려서 이런 글을 네가 썼다고 알려지면 과도한 관심을 받을 게 틀림없다. 그래서 아빠 이름으로 출판을 했으면 하는데, 너 생각을 듣고 싶구나.'
'괜찮아요. 아빠. 저는 그냥 글 쓰는 게 즐거울 뿐이에요.'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그럼 글은 내가 쓴 걸로 하마. 대신 너 앞으로 계좌를 개설하고 세금 처리하겠다.'
'아빠. 그럴 필요 없어요. 전 진짜 글 쓰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니 그렇게 하자.'
'네, 아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하던 정훈이 아빠는 덕분에 유명 작가로 변신했다.
그가 쓴 '반지의 눈'은 영화로도 제작됐다.
개인 간의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격투장이 가상 격투장으로 바뀌었듯, 영화 또한 가상 공간에서 촬영했기에 제작 기간은 무척 짧았다.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소설 내용을 토대로 영화를 자동으로 제작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보여주는 영상미는 뛰어날지 몰라도 '매가리'가 없어 몰두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꺼렸기 때문이다.
진성이도 이 영화를 봤다.
전 세계에서 공전(空前)의 인기를 끌고, 본 사람마다 엄지를 치켜들 정도로 대단한 화제(話題)를 모으고 있는 작품이기에 본 거지만, 그보다 내용이 궁금해서다.
진성이는 영화를 본 후, 책도 사서 읽었다.
'문식이가 쓴 건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필명으로 원작자를 숨길 수 있기에 책까지 사서 봤지만, 진성이가 알고 있던 내용과 매우 달랐다.
주인공부터 소인이 아닌 야만인이었고, 반지는 손가락에 끼는 것이 아니라 반지처럼 생긴 거대한 성이었다.
'이건···?'
문식이가 쓴 책들을 읽어 보았기에 그의 문체를 알고 있던 진성이.
내용은 진성이가 아는 것에서 이것저것 짬뽕해 놓은 거지만, 문체가 눈에 익었다.
'이건 문식이가 쓴 것 같은데···.'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아파치 왕국의 작가들이 즐겨 따라 하는 문체라는 걸 알고 의심을 거뒀다.
그런데 정훈이가 판타지 소설에 이어 쓴 '제로니모 왕의 일대기'를 보고 다시 의심하게 됐다.
'문식이가 아니라면 이런 내용을 알 수 없을 건데···.'
진성이는 작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알아보았다.
'중년 작가라···. 그것도 출판사 편집자 출신?'
의심스러웠다.
'문명이 있는 곳에 제국어가 있다'라는 말처럼 세상은 제국어라 부르는 조선어가 표준이 됐다.
'세상의 모든 정보가 있다'라는 누리넷은 조선어와 한글이 기본이었다.
그래서 온라인에 연재해도 되지만 문식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파치 왕국에 있는 출판사에 투고까지 했다.
하지만 실망만 안겨 주었다.
진성이는 '문식이와 공식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고, 그 글을 정훈이 아빠가 소속되어 있는 출판사에 투고했다.
달리 원작자를 알아볼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조선 제국 다음으로 강국이 된 아파치 왕국.
조선만큼은 아니지만, 개인의 정보는 물론 사생활까지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다.
아무리 풍요로운 세상이라도 또라이는 많았고, 한때 그런 또라이들이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기에 그런 거였다.
두 젊은이의 우정을 그린 진성이의 작품은 나름대로 인정을 받아 출판되었고, 그런대로 팔렸다.
하지만 진성이가 기다리던 소식은 오지 않았다.
'하···! 문식이가 아닌가 보네.'
문식이와 야코프라면 제목만 봐도 바로 연락이 왔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호역 제일검이 글도 잘 쓴다는 평판만 올라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와 함께 만물상자를 보고 있던 정훈이가 머리를 부여잡고 딩굴었다.
세기말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방송국에서 특별 기획한 가상 검도 대회를 보던 중이었다.
"정훈아!"
"으으흑···!"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놀란 부모님이 정훈이를 안고 흔들었지만, 정훈이는 고통스러운 앓은 소리만 낼뿐이었다.
"멍청아!"
-네, 주인님.
"우리 정훈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조사 결과 뇌에서 과도한 신경전달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뭐라고?"
-신경 세포(神經細胞, Neuron)가 급격히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할 수준은 아닙니다.
"휴···! 다행이구나."
웬만큼 사는 집에는 다 설치되어 있다는 '가정용 인공지능'은 집 관리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건강도 살피고 있다.
따라서 인공지능인 멍청이가 괜찮다고 했기에 정훈이 부모님은 한숨을 돌렸다.
"아빠···?"
"응, 정훈아. 괜찮니?"
"네, 이젠 괜찮아요. 그런데 저기 호역 제일검이 문식이와 공식이란 작품을 썼다고요?"
"그래, 내가 있는 출판사에 투고해서 출판한 적이 있지."
"그래요?"
정훈이는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문식이가 누구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중얼거렸다.
* * *
야코프 공화국(뉴질랜드).
호역 동쪽에 있는 섬나라다.
역사상 세 번째로 위대한 과학자라 평가받는 야코프를 기리기 위해 야코프 공화국이라 명명한 곳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뭔가 뚝딱거리며 만들기 좋아하던 이반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름을 날리더니 은동리로 들어갔다.
조선인이 아니면 잘 받아 주지 않은 은동리지만, 너무나 탁월했기에 우방국 출신인 이반을 은동리 연구원으로 받아들인 거였다.
그런데 은동리에서 살게 된 이반이 대형 사고를 쳤다.
'이, 이게 뭐야!'
'살려줘!'
'날 좀 잡아줘!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아!'
이반의 연구실 근처에 있던 연구원들은 갑작스레 일어난 현상에 당황하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들의 신체는 물론 근처에 있던 모든 물건이 이반의 연구실로 빨려 들어가 벽에 붙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압박에서 풀려난 연구원들은 인상을 쓰며 걸어 나오는 이반에게 따졌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안전이 제일 중요한 것 몰라?'
'누구라도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연구원들은 최첨단 소재로 만든 연구복을 입고 있었기에 함께 날아간 물건들로 인해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지만, 큰 부상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반은 '유레카'라 외치며 연구소 통로를 따라 뛰어 나가버렸다.
태양계 모든 곳을 정복한 인류지만, 달과 화성 말고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은 없었다.
연구 목적으로 달과 화성에 투명한 돔을 짓고 기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1년 이상 거주는 허용되지 않았다.
중력 때문이었다.
지구의 중력에 맞추어진 인간의 몸은 중력이 낮은 달과 화성에 적응할 수 없었다.
은동리를 중심으로 한 인류는 우주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지구와 너무 심하게 차이 나는 중력 때문에 우주로 나간 사람 대부분은 위성처럼 달과 화성을 맴도는 우주선에서 살고 있다.
원통형 우주선이 회전하면서 만들어 내는 중력이 있기에 지구에서 사는 것처럼 생활이 가능했던 거다.
그런데 이반이 '중력 장치'를 개발했다.
너무나 엄청난 발견이었기에 은동리 출신 석학들이 모였다.
그들은 몇 날 며칠을 토의한 끝에 이번 발견을 발표하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두 번째 과학자이자 조선제국의 기초를 만드신 현종 황제의 뜻에 따라 당분간 감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이처럼 엄청난 기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공개하는 것이 이곳 은동리의 관례 아닙니까?'
'그래도 어떻게 이런 발견을 할 수 있었는지 조사는 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특별 조사 위원회가 소집됐다.
'어떻게 이런 장치를 만들 수 있었나?'
'특이한 원소인 텔루륨(Te, Tellurium)에 구리와 니켈 그리고 은과 금을 섞어 만든 합성 분자에서 독특한 현상을 발견한 것뿐입니다.'
연이 작성한 원소 주기율표에서 52번째 원소인 텔루륨은 아주 특이했다.
주기율표에서 산소, 황, 셀레늄과 같은 16족에 속하는 텔루륨은 특이하게도 마늘 냄새가 풍기는 준금속이었다.
또한 동위원소인 텔루륨-128은 모든 방사성 동위원소 가운데 가장 긴 반감기를 가지고 있다.
약 137억 년이라고 알려진 우주의 나이보다 160조 배나 길었던 거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반감기로 인해 분해되어 사라져도, 텔루륨-128은 영원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존재한다는 의미다.
역사적으로 1782년 오스트리아 광물학자 프란츠-요제프 뮐러 폰 라이헨슈타인이 금 광석에서 발견한 텔루륨은 ‘지구’를 뜻하는 라틴어 ‘텔루스(tellus)’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런데 텔루륨은 성질이 매우 복잡했기에 '문제를 만드는 금'이란 뜻인 ‘아우룸 프로블레마티쿰(aurum problematicum)’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열에 의해 결정과 비결정을 오가는 텔루륨.
50℃에서 전기저항이 은의 약 10만 배에 이르며, 빛의 강도에 따라 전기저항이 변하기에 이 성질을 이용해 복사기, CD, DVD 등 광학 기억저장 매체에 사용되고 있다.
이반은 이런 텔루륨에 다양한 물질을 섞어 합성고분자 화합물은 만들어 냈다.
그리고 전기에 이어 빛을 흘려보내자 주변 물체를 끌어당기는 현상을 생긴 거였다.
처음에는 자력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자성이 없는 물체도 끌어당겼기에 흥분했고, 흥분한 상태에서 과도한 전력과 빛을 왕창 투입했기에 급격한 환경 변화를 일을 킨 거였다.
아무튼 이반은 조선전력공사로부터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받고 새로 개발한 장치에 관한 모든 권리를 넘겼다.
이제 막 개발되었기에 상용화하는 데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당분간 발표조차 금지한 기술이기에 그런 거였다.
또한 쉬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생은 즐기는 게 남는 것이라고 누가 그랬는데···.'
가끔, 지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떠오르는 말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오래된 서역 지역 언어가 섞여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이해 할 수 있었다.
은동리에서도 유레카라 외치며 뛰어다녀 듯이 오래된 서역 말을 중얼거리는 이반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런 이반을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이반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혼자 지내야만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수시로 떠오르는 인생을 즐기라는 누군가의 말에 행동에 나섰다.
이반은 숨 쉬듯 돈을 썼다.
밥 먹듯이 기부도 많이 했다.
하지만 조선전력공사에서 받은 엄청난 보상금은 아무리 써도 줄지 않았다.
그만큼 이반이 개발한 중력 장치를 높이 쳐준 거였다.
이반은 은동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돈을 쓰면서 느낀 감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건 중노동이나 다름없네. 연구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
야코프 공화국에 사는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큰 집을 사주고, 자신도 유명한 휴양지마다 별장을 사고, 좋다는 건 다 사보았지만, 골치만 아프고 피곤하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 산처럼 쌓여 있는 상품들.
포장조차 뜯지 않은 게 대부분이었다.
다행히도 조선인으로 국적이 바뀐 이반에게 수작을 거는 이는 없었다.
돈 많다고 접근하는 사람도 없었다.
괜히 오해를 살까 봐 예쁜 처자들도 접근하지 않았다.
아직도 사기죄에 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은 조선이기에 그에게 사기 칠 간 큰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세상은 세기말로 들떠 있었지만, 사회성이 좋지 않은 이반은 혼자 지낼 수밖에 없었다.
생각 끝에 이반은 부모님 집을 찾아갔다.
"어서 와라. 그러지 않아도 보고 싶었는데 잘 왔다."
"잘 지내셨어요?"
"우리야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는데···, 많이 야유였구나. 무슨 걱정이라도 있니?"
"걱정은요. 그냥 재미는 게 없어서 은동리로 다시 돌아갈까 봐요."
"그래 잘 생각했다. 그곳이라면 너와 같은 사람이 많을 거니 네 뜻대로 하렴."
이반의 부모님은 이반이 어떤 아이인지 잘 알기에 걱정이 많았지만, 이반이 은동리로 간 후에는 안심할 수 있었다.
괴짜들만 모여있는 곳이 은동리라 알고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난 이반은 함께 만물상자를 시청했다.
"저 아이가 너랑 나이가 같다고 하는데 호역에서 제일가는 검객이라 하더구나."
"그래요?"
이반은 한참 면담 중이던 진성이를 유심히 살폈다.
세상에서 프로축구 다음으로 인기 있는 검도 대회 호역 우승자였기에 모르지는 않았지만, 진행자와 대화 중 나온 말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아, 그러니까 호역 제일검의 가치관은 '인생을 즐겨라'군요.
-네, 인생 뭐 별거 있습니까? 즐기면서 사는 거죠.
-좋은 말씀입니다. 아무튼 다시 한번 오늘 경기에서 승리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보고 있던 이반의 눈동자가 격하게 요동쳤다.
또한 다른 곳에서 이 면담을 보고 있던 이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다름 아닌 조선의 황제였다.
흥분했는지 상기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황제의 말.
"인생 별거 없다. 즐기면서 살 거라. 그게 남는 거다."
"예에?!"
옆에서 함께 보고 있던 태자가 의문을 표했지만, 황제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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