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267화 (267/275)

267. 떠날 준비(2)

꽉 쥔 주먹을 들어 올린 윤이 당차게 말을 뱉었다.

"그런 놈이 있다면 지옥도로 보내버릴 겁니다."

윤은 작은아버지인 훤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성격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눈치만 보던 자신과 달리, 하고 싶은 것은 하고야 마는 작은아버지가 대단해 보였다.

그런 작은아버지가 한 말이 있었다.

'사내는 그리 소심하면 안 된다.'

'네?!'

'내가 보기에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선만 넘지 않으면 되니 원하는 것을 하려무나.'

'그래도···.'

'어허! 너도 알겠지만, 내가 어릴 때 문제가 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넘지 않은 선에서 사고를 쳤고, 그 덕분에 은동리로 가지 않았느냐?'

'아···, 네.'

우주 항공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개척자로 추앙받는 작은아버지.

그가 어릴 때 저지른 일은 아직도 저잣거리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입방앗거리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혹시 아냐? 너도 나처럼 재밌는 반려자를 만날 수 있을지.'

'작은어머니께서 재밌으십니까? 전 무섭기만 하던데요.'

연이 효종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부터 시작된 궁중 법도 파괴는 이제 관행(慣行)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조선의 중심을 넘어 세계의 중심이라 일컫는 조선 황실.

전처럼 시강원을 따로 두고 개인 교육을 하지 않았다.

백성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백성들의 삶과 생각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다고 봤기에 일반 학교로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보안 때문에 관리의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로 보내고 있다.

하지만 호칭이나 말투 때문에 신분이 들통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쓰는 말투와 호칭을 가르쳤는데, 이게 입에 익어 버린 거였다.

'무섭기는! 좀 사나워서 그렇지, 너 작은어머니는 무서운 사람 아니다. 하지만 조심하거라. 선을 넘으면 작은어머니가 널 지옥도로 보내버릴지도 모르니.'

그 후로 윤의 머릿속에 선과 지옥도가 자리 잡았다.

연은 윤이 강한 의지를 보이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피를 보지 않고 처리할 수 있으면 그게 좋겠지.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네 손에 피를 묻힐 각오도 해야 한다. 대상이 황실 위원이라도 말이다. 알겠느냐?"

"노력하겠습니다. 할아버지."

"그래, 그래. 그거면 됐다."

어느새 백악정에 오른 연과 윤은 나란히 서서 한양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웠다.

연이 살았던 21세기와 비교할 순 없지만, 수십 층에 이르는 고층 건물이 없기에 탁 트여서 보기 좋았다.

경복궁 정문에서부터 한양 대교까지 쭉 이어진 한양 중앙 공원의 푸르름이 상쾌함을 더했다.

"윤아?"

"네, 할아버지."

"인생 별거 없단다."

"그렇습니까?"

"이유 없이 태어나 허망하게 죽는 게 사람인데 무엇이 있겠느냐?"

"아···."

윤은 무언가 깨달은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는 왜 그리 열심히 사셨습니까?"

"심심해서."

"네?!"

"별거 없는 인생이기에 그랬을 뿐이다."

"그래도···. 뜻이 있었기에 그러셨던 것 아닙니까?"

윤이 슬며시 고개를 돌려 연을 바라보았지만, 연은 회상에 잠긴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미래의 기억을 그대로 갖고 다시 태어난 연은 문식이처럼 여러 명의 후궁을 두고 인생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인조라는 사실을 알고 모든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러운 꼴을 보며 살 수는 없지.'

청나라에 끌려가 노예로 살고 있는 수십만에 이르는 조선의 백성들을 두고, 혼자만 즐기고 살기엔 연의 가치관이 허락하지 않았던 거다.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 줄 알기에 그랬던 거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일을 벌였을 것이다.

"윤아,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인, 인생이요?"

"그래 인생 말이다. 태어나고 죽는 순간까지 우린 무얼 위해 사는 것이냐?"

"그거야···.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소손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연은 발걸음을 옮겨 황제의 산책로를 내려가면서 혼자 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인생에서 나에게 남은 것은 그녀와 지냈던 행복한 순간들이지. 그 기억이 있기에 난 외롭지 않고 슬픔을 견딜 수 있었다."

"저희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 너희들도 있었구나. 그녀가 남긴 너희들 말이야."

세상을 돌아다니면서도 연은 세자빈, 태자비, 황후, 태황후를 항상 떠올렸다.

전생에 연이 살았던 세상에서 '전생에 원수지간이 만나 부부가 된다'란 말이 있었다.

그래서 걱정했지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태황후는 사극에 나오는 그렇고 그런 여인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먼저 타인을 생각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연은 그런 태황후를 끔찍이 아꼈다.

연과 문식이는 한때 유행했던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을 사랑할 줄도 안다'라는 개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문식이가 단골 삼겹살집 벽에 붙어있는 소주 광고 문구를 보고 물었다.

'공식아, 사랑은 희생이잖아?'

'그치.'

'그런데 저 말은 뭐야?'

'어?'

'저거 개소리 맞지?'

'당연하지! 어떻게 자신이 자신에게 희생해?'

둘은 사랑은커녕 연애조차 해보지 못했지만, 사랑은 가치 있는 사물이나 대상에게 베푸는 것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태황후야말로 진짜 사랑을 할 줄 아는 여인으로 본 거였다.

또한 한 여인만 바라보고 살 수 있었다.

"내 인생은 허무하지 않구나. 그녀가 남긴 너희들이 있어서···."

그날 이후 연은 다시 칩거(蟄居)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 * *

조선 제국력 53년(1711).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모든 게 풍족한 세상이라 낙천적인 사람이 많아졌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군대를 없애고 대신 경찰력을 강화했기에 치안이 무척이나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에이, 경찰 무서워서 어디 껌을 씹을 수나 있겠어? 젠장."

"그러게 왜 길거리에 껌을 뱉어. 내가 그 버릇 좀 고치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듣지 않더니 잘됐네. 고생 좀 하라고."

"고생은 뭐. 까짓것 이번에 좋은 일 좀 하는 거지."

연이 주도해 만든 조선의 법은 무척이나 엄격했다.

길거리에 껌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을 물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적발된 횟수에 따라 차등(差等) 사회봉사를 해야 했다.

"왜? 그냥 거부하고 북해도 가서 소나 키우지 않고?"

"그거야 그냥 하던 말인데, 불알동무인 네가 그리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조심하라고 했을 때 조심했어야지. 어떡할 거야? 다음 주에 화성에서 우주 잔치가 열리는데."

"미치겠네. 다음 주 내내 봉사활동 해야 하는데. 이거 연기할 수 있나?"

"되겠냐?"

"안 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 황실 종친이라도 걸리면 얄짤없는데."

소득이 없으면 집과 먹을 것은 황실 기업인 조선전력공사에서 무료로 제공해 주기에 생계를 핑계로 사회봉사 명령을 어기거나 연기할 수 없었다.

정해진 기간에 나타나지 않거나 봉사활동을 엉망으로 하면 강제 연행 후 북해도로 보내버렸다.

북해도에 가서 사람이 아닌 소나 돼지, 닭을 상대하며 살라는 것이었다.

"다음 주 내내 축제 기간이지?"

"응. 그래서 너랑 아파치 왕국에 가기로 한 거잖아."

"미안해. 나 때문에 일정이 어긋나서."

"미안하긴, 나 혼자라도 갈 거야. 예의와 정열의 나라 아파치 왕국은 2주 동안 축제를 연다는데 포기할 순 없지."

"그러는 게 어딨어? 그건 배신이야!"

"그게 뭐가 배신이야. 내가 수도 없이 말했잖아. 못된 버릇 좀 고치라고. 아무튼 난 가서 신나게 놀 테니까 봉사 끝나면 바로 날라와. 기다리고 있을게."

"젠장! 알았어."

그러지 않아도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소형원자로에 이어 핵융합 발전기까지 등장하자 세상은 더욱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예신해협'이라 부르는 베링해협에 40km나 되는 두 개의 다리가 놓였고, 그 영향으로 태평양을 가로지르던 화물선들이 할 일이 없어졌다.

철도를 이용한 수송이 훨씬 안전하고 빨랐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등장한 제트기.

세상을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어 버렸다.

철도에 관해 잘 알지 못한 연 때문에 선로 폭이 표준궤인 1,435mm가 아닌 1,500mm로 놓여졌다.

그로 인해 1m 가까이 폭이 넓어진 기차 안은 여유롭고 안락했다.

이는 비행기 좌석에도 적용되었다.

그래서인지 '이코노미 증후군'이란 말 따위는 없었다.

일반석이라도 5시간 이상 장거리는 누워서 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기에 그런 거였다.

아무튼 세상은 인류의 화성 진출을 축하하는 우주 잔치로 들떠 있었지만, 연은 순을 만나고 있었다.

* * *

경복궁 황제 집무실.

순은 얼굴에 검은 점까지 보이는 연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꼭 떠나셔야겠습니까?"

"이제 더는 내가 할 일이 없구나. 훤이 화성에 도착하면 난 떠날 터이니 그리 알 거라."

"아버지!"

"잘 들리니, 크게 부르지 않아도 된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연은 자신의 귀를 두드리며 흐뭇한 모습으로 순을 바라보았다.

50세가 넘은 순이지만, 연의 눈에는 어려 보이기만 했다.

연은 가슴이 아려왔다.

잘생긴 순의 모습에서 태황후의 그림자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이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떠나 시기 전에 여쭐 말이 있습니다."

"대답을 못 할 수도 있다."

"그래도 묻겠습니다. 제로니모와 야코프 삼촌 그리고 아버지는 어떤 사이입니까?"

"흐흠···."

연은 깊은 숨소리를 내더니 눈을 감아 버렸다.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었기에 그런 거였다.

"혹시···!"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것이 맞으니 더는 묻지 말거라."

"예에?! 제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요?"

"무슨 생각이든 네가 짐작한 것이 맞다. 나는 이만 떠날 터이니 그리 알 거라."

"아버지. 이대로 그냥 가시면 어떡합니까? 뭐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사랑한다."

"저도요."

순은 일어서는 연에게 달려가 그를 꼭 안았다.

"이유가 있으시겠죠. 그 이유를 따지거나 밝히지 않을 겁니다. 사랑하니까요."

"고맙구나."

연은 순의 등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여섯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지만, 태황후와 함께 세상을 돌아봤던 순이기에 다른 자식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순의 성품을 믿기에 연은 미련을 두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순 없었다.

"순아?"

"네, 아버지."

"나는 너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저도요."

연은 하고 싶은 말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너무나 많았기에 끝도 없을 것 같아서였다.

가볍게 순의 어깨를 두드린 후, 연은 대기하고 있던 검수대의 수장을 따라 여의도 성지로 향했다.

* * *

그 누구도 찾지 못했다는 여의도 성지 입구.

그런데 연은 성지 안에 홀로 있었다.

연은 특별히 주문해 만든 거대한 화면을 보고 있었다.

-폐하! 아니 아버지! 보고 계십니까? 제가 드디어 화성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유일하게 아픈 자식이었던 훤이 당당히 외치는 모습을 보고 연이 중얼거렸다.

"그래, 장하구나."

노년의 몸만 아니었다면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기에 일찍 포기했다.

"언제 가는 나 같은 노인도 갈 수 있게 노력하렴. 장하구나. 나는 이제 떠나야 할 것 같구나. 사랑한다. 훤아."

연은 화성에서 벌어진 불꽃놀이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유 없이 태어나 허무하게 죽는 게 인생이라는데 나는 많은 것을 남겼구나."

그 말을 끝으로 연은 일어서서 입자 가속기와 방사광 가속기 끝에 연결된 둥근 통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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