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262화 (262/275)

262. 황실 위원회(4)

손이 귀한 조선의 황실이라 황실 위원회에 참석한 이는 달랑 세 명이었다.

황실의 종친은 황제의 직계 8촌까지 규정했지만, 황실 위원회는 황제의 직계 4촌까지 정했기에 더 많은 인원이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순이 한 명, 훤이 두 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너무 어렸다.

그래서 이번 황실 위원회 소집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아무튼 연이 탁자 위에 보따리를 내려놓자 순과 훤이 물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책이 아닙니까?"

연은 두 아들의 물음에 방긋 웃더니 손수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 안에는 대학생들이 즐겨 쓴다는 '대학 공책'들이 여러 권 있었다.

"이것은 내가 후손들을 위해 써놓은 글들이다. 그러니 명심하거라. 앞으로 황실 위원회의 위원이 될 후손들에게는 이 기록들을 숙지하게 하고 따르도록 하거라."

"무슨 내용인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려무나."

두 아들은 연이 써 놓은 기록들이 담긴 공책을 조심스레 들고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양한 제목들이 적힌 공책들을 한참 읽어 보던 두 아들의 표정은 수시 각각 변했다.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지만, 모르는 내용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르는 내용 대부분은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폐하! 이것은···?"

"아버지! 도대체 이런 내용은 어찌 아시고···?"

놀라 묻는 두 아들의 질문에 연은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 그걸 예측하고 기록해 놓은 것이니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두 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물었다.

"그렇다 해도 이런 내용은···."

"어떻게 이리 자세히 예측하실 수 있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참말로 대단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의 기온이 주기적으로 변한다니···."

말을 하다 만 훤이 무언가 떠오른 듯 정색을 하며 연을 바라보았다.

"혹시 야코프 선생님께서 추진하고 있는 핵융합 발전 계획도 이를 염두에 둔 것입니까?"

"그렇다."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뭔가를 깨달은 훤이 고개를 끄덕이자 순이 궁금한지 물었다.

"무엇을 알겠다는 말이냐?"

"언니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아버지! 이 일에 제가 참여해도 되겠습니까?"

"너는 달에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 달이 문젭니까? 우리 조선, 아니 우리 인류가 나갈 길이 여기에 있는데? 그리고 달보다는 화성이 더 매력적입니다. 언니?"

"왜?"

"제가 달에 가는 건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니 이 화성 개발 계획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이걸 보십시오."

훤은 들고 있던 공책을 순에게 넘겼다.

한참 훤이 준 공책을 읽어 보던 순은 연과 훤을 번갈아 보더니, 의문을 표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거기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까?"

"너야 보면 알겠지만, 내 눈은 수학에 까막눈 아니냐?"

"그게 어디 수학입니까? 공식이 나열되어 있어도 간단한 산수나 다름없는데."

"이놈이! 네가 수학을 잘한다고 나를 이리 무시하는 것이냐?"

"어찌 제가 대조선의 황제 폐하를 무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내용이 그렇다는 말이지요."

연은 두 아들이 다투는 모습에서 문식이가 떠올랐다.

자신도 문식이와 두 아들처럼 수시로 다투지 않았는가.

"훤아?"

"네, 아버지."

"앞으로 내가 없더라도 네 언니를 잘 보필 해야 한다."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버지. 어디···."

"그건 아니다. 전과 다르게 피로가 쉬 회복되지 않는구나. 이러다 갑자기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미리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할아버지를 도와 대조선 제국을 건국하신 아버지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약해 보입니다."

어릴 때 말없이 혼자 놀던 훤이 아니었다.

은동리에서 살더니 입에 모터를 달았는지 줄줄 따지며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보다 못한 순이 훤을 불렀다.

"훤아!"

"왜요? 제가 못 할 말을 했습니까? 저는 단지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돼서 하는 말입니다."

"이놈이!"

"언니, 아버지께서 수시로 하신 말씀 모르십니까? 나약한 마음은 나약한 정신을 만들고 그로 인해 육체까지 나약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이놈아. 너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서 이곳까지 서둘러 오신 아버지께 무슨 망발이냐?"

"그건···."

훤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니다. 네가 잘못한 것도 없지만, 잘못을 인정할 줄 알면 됐다."

연은 보따리에 싸여 있는 공책 중 아래에서 한 권을 꺼내 펼쳤다.

"여기에 적어 놓은 것처럼 앞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후손은 황실 위원이 돼서는 안 된다."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버지께서 강조하신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도리에 어긋나는 것 아닙니까?"

"맞다. 그러니 꼭 명심하거라. 단 한 방울의 먹물만으로도 접시에 담긴 물이 모두 물들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꼭 명심하겠습니다."

훤과 달리 순은 연이 펼쳐놓은 공책에 적힌 내용을 한참 보더니 물었다.

"꼭 죽여야만 합니까? 전처럼 유배를 보내는 방법도 있는데···."

"방금 말하지 않았더냐?"

"그래도···."

"핏줄에 연연하여 방치한다면 큰 재앙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연은 다른 공책을 꺼내 순에게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이건 인간의 심리에 관해 내가 겪은 것을 적어 놓은 것이다."

"그렇습니까?"

"그래요? 제가 봐도 되겠습니까?"

연은 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들은 내용을 함께 살펴보더니 서로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먼저 순이 입을 열어 물었다.

"변하지 않은 인간의 심성이라···, 사실이옵니까?"

"그렇다. 앞으로 학자들이 더 연구해봐야겠지만, 내가 겪은 바로는 변하지 않을 것 같구나."

"그렇다면 큰 문제 아닙니까?"

"그건 아니다. 반사회성 성격장애가 있다고 해도 꼭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아니니까."

이때 지켜보던 훤이 나섰다.

"그래도 위험한 것 아닙니까?"

"너희들이 하기에 달린 거다. 그러니 명심하거라. 법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황실의 법도는 더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25명 중 1명꼴로 이런 자들이 있다니···, 학자들은 시켜 더 자세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참말로 사실이라면 해결할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려무나. 그건 그렇고 아직도 달에 직접 갈 생각이냐?"

"안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있는 것들을 연구할 시간도 부족한데 거길 왜 갑니까?"

연은 훤의 태세 전환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자식이라 항상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는데 더는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황후가 말한 것처럼 자신과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훤아, 세상은 0과 1로만 되어 있는 건 아니다. 너도 양자역학을 공부해서 알겠지만, 0과 1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수가 존재한단다. 앞으로 너는 그것만 명심하면 될 것 같구나."

"그렇습니까?"

"음···, 너는 너무 옳고 그름만 따지는 성격이라 그것만 고치면 될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러지 않아도 요즘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래?"

훤은 아들 둘을 키우면서 겪은 일과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고 했는데, 훤은 늙지도 않았는데 정말 말이 많았다.

어릴 때 못다 한 말을 이제야 풀어 놓는 것 같았다.

"자식을 낳고 키워 봐야 어른이 된다고 하더니 이제 너도 어른이 다 되었구나."

"고맙습니다. 아버지."

항상 철이 없다고 행순이에게 혼나면서 사는 훤은 연의 말에 고마움을 느꼈다.

내명부의 법도에 따르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훤과 행순이는 동갑내기 동기라 격이 없이 지금도 투덕거리며 살고 있었다.

물론 황실의 본거지인 경복궁이 아니라 은동리에서 따로 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무튼 훤은 자신을 이해하는 아버지의 말이 고마웠다.

항상 불안한 듯한 시선을 아버지에게서 느꼈지만, 더는 그런 느낌이 없기에 마음마저 편안했다.

"그런데, 아버지. 저건 무엇입니까?"

훤은 보따리 제일 밑에 포장되어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건 내가 떠나거든 열어 보거라."

""네?!""

"어디로 떠나신다는 말씀입니까?"

"때가 되면 떠나야 할 것 아니냐?"

"아직 정정(亭亭)하신데 무슨 말씀을···."

훤을 말을 잇지 못했다.

주름 가득한 연의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왔기에 침만 꿀꺽 삶길 뿐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직은 건강하니."

연은 이제 막 50세가 넘었지만, 자신의 건강을 장담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효종을 따라 운동도 열심히 했지만, 전과 다르게 기운이 빠진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구하고, 급히 한양으로 돌아오느라 몸을 무리해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몸이 급격히 피로를 느끼는 이유를 문식이와 통화하면서 알 수 있었다.

-나도 내가 만든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

'곧 개발이 완료된다고 하니 조금만 더 버텨.'

-곧? 언제? 당장 버티기도 힘들 것 같은데.

문식이의 나이는 문식이도 정확히 모른다.

어릴 때 다른 부족의 침략으로 부모를 모두 잃었기에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식이의 장자인 일식이의 나이가 연과 비슷했기에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힘내! 너까지 떠나면 난 누구와 말하냐?'

-야코프 있잖아.

'야코프도 상태가 별로야.'

-이런···.

야코프 또한 문식이와 연배가 비슷했기에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야코프가 연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은동리에 있는 천재 중의 천재들만 모아 핵융합 발전기를 연구하고 있지만, 반도체와 프로그램은 연보다 경험이 많은 이가 없었기에 지원을 요청한 거였다.

아무튼 연이 갑자기 극심한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알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쌓인 상실감 때문이었다.

"나는 너희 둘을 믿는다. 서로 성격은 다르지만, 합심하면 나보다 더 멋진 조선을 만들어 갈 거라 본다. 그러니 내가 없더라도 지금처럼 해주길 바란다."

""아버지!""

연은 소리쳐 자신을 부르는 두 아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내가 떠난다는 말은 죽는다는 말이 아니니 그리 부를 건 없다. 난 앞으로 은동리에서 살 거다. 이곳은 자주 들리겠지만···. 부탁할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아버지."

"말씀만 하십시오. 소자 꼭 지키겠습니다."

"너희 어머니를 자주 찾아보거라. 너희들도 알다시피 너희 어머니는 이곳이 더 편하다고 하는구나."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매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저도요."

훤이 따라 응하자 순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넌 은동리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매일 온다는 말이냐?"

"제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 되지 않습니까?"

"아서라. 이곳에서 무슨 사고를 칠지 알고 너를 받아들인단 말이냐?"

"언니!"

둘 다 아이를 낳고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다투는 모습에 연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정이 많은 순이 훤을 끔찍이 아끼고, 훤 또한 순을 누구보다도 따른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런 거였다.

이렇게 처음 열린 황실 위원회는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연은 은동리로 거처를 정식으로 옮겼다.

아들 둘에게 자신이 만든 조선의 미래를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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