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황실 위원회(3)
다호메이 왕국의 왕인 아카바(Akaba)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을 무척이나 중시했다.
그래서인지 '다호메이 아마존'이라는 여성으로 구성된 군사 조직을 양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조선의 젊은이들이 납치되어 이곳까지 노예로 팔려 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현대사에 문서로 기록된 여성으로만 구성된 군대 중 하나인 다호메이 여전사들은 서유럽인들에 의해 아마존으로 불렸다.
진짜 원조 아마존이었던 거다.
다호메이 왕국이 가진 군사력 중 1/3을 차지할 정도인 여전사들은 코끼리를 사냥할 정도로 무력 또한 높았다.
그래서 왕을 경호하는 다호메이의 중앙군은 여전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그들이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노예들을 사들인 이유는 더 강한 여전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한마디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종마'로서 사들인 거다.
아카바도 조선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전하! 조선은 세상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거대한 제국입니다."
"누가 그걸 모른다더냐?"
"그래서 간청드립니다. 그런 조선이 이곳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이제 우리 다호메이 왕국은 사자 무리를 마주한 누 떼나 다름없습니다."
"크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경고의 의미로 총을 쏜 후. 지금까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나가서 조선과 협상을 하셔야 합니다."
"크흠···."
아카바는 신하의 말이 옳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행동에 옮길 수 없었다.
노예 제도 때문이었다.
1600년 초, 선대 왕들이 어렵게 아보메이고원에 자리를 잡고 다호메이 왕국을 세웠다.
그 후, 이곳 포르토노보로 왕국의 터전을 이전한 후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피부가 하얀 이들이 가진 무기는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침략자들에게 항복하고 앞잡이가 된 다호메이 왕국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북쪽 내륙 깊숙한 곳에 사는 원주민들을 잡아 노예무역을 시작한 거다.
그 덕에 다호메이 왕국은 총과 화약을 구할 수 있었고,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속해서 다호메이 왕국을 간섭하던 오요 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7세기 중반부터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오요 제국에 더는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어진 거다.
그런 역사가 있었기에 아카바는 아버지인 호엑바자(Houegbadja) 왕이 죽고 왕위에 오르자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동안 당했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카바는 오요 제국의 요루바족(Yoruba)을 잡아다 아직도 노예를 필요로 하는 아프리카 북부에 팔고 있었다.
조선이 커지면서 더는 신대륙과 서유럽에 노예를 팔 수 없지만, 노예야말로 왕국의 부를 쌓는 가장 빠른 길이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큰 실수를 했군···."
아카바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했다.
조선군이 최강이란 말에 조선인을 잡아다 씨를 뿌려 조선군처럼 강한 군대를 양성하려 했는데, 그 일로 조선군이 이곳까지 쳐들어올 줄은 몰랐다.
또한 조선의 젊은이들을 돌려달라는 조선에서 온 사신의 요청에 무리수를 둔 것도 후회됐다.
설마 이곳까지 쳐들어올 줄 몰랐는데, 총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조선군은 이미 성을 외워 싸고 있었다.
"전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빨리 나가보셔야 합니다."
"크흠···. 저들이 날 용서해 줄 것 같으냐?"
"그거야 전하께서 하시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이런···, 빌어먹을!"
조선인으로 보이는 노예들이 있다는 말에 그들을 사서 종마로 쓰자고 했을 때 손뼉을 치며 극찬하던 신하가 이제는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하지만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조선군에 대항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인질로서 가치가 높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밤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들을 지키던 여전사들은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죽은 여전사들의 몸에 남은 흔적은 조선군이 왔다 갔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왕국의 무기 전문가가 총소리도 내지 않고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군대는 세상에서 조선군밖에 없다고 했으니 사실이 아니더라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아카바는 조선군이 더욱 무서웠다.
그런데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자신은 다호메이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자 전사였으니.
"준비하거라."
"고맙습니다. 전하.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아카바는 해맑은 모습으로 뛰쳐나가는 신하의 등에 창을 꽂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 * *
간밤을 꼬박 새운 연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아직도 정신은 맑지만, 몸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
그래서 요즘은 입에 술을 대지도 않았다.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 간 조선의 젊은이들을 구하는 일이 무엇보다 최우선이었기에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가 없었다.
임시로 급조한 막사에서 잠을 청하던 연은 뜨거운 햇살이 밀려들자 더위를 느끼며 슬며시 눈을 떴다.
"폐하, 시원한 물이옵니다."
이곳까지 따라와 연의 시중을 들고 있는 영진이가 이슬이 맺힌 잔을 하얀 천에 감싸 연에게 내밀었다.
연은 물을 마시고 난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영진이가 말했다.
"꿀과 삼을 조금 탔습니다."
"음···, 맛이 괜찮구나."
쌉싸름한 산삼의 향기와 달콤한 꿀이 어울려진 시원한 물을 마시자 기운이 다시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래, 어찌 되었느냐?"
"기수 사령관께서 다호메이 국왕을 직승기에 태워 이곳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아이들은?"
"아주 건강합니다. 다만 기가 좀 허하다고 합니다."
"그만하길 다행이구나."
다행히도 종마로 쓰기 위해 잡아 온 터라 조선의 젊은이들은 잘 먹고 잘 싸고 잘 지내고 있었다.
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영진이가 읊조리며 말했다.
"폐하, 은쌍식 사장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그러려무나."
연이 밖으로 나오자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가며 온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다가오는 쌍식이의 흰 머리카락도 붉게 보일 정도였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옥체는 어떠십니까?"
"전같이 않지만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그나저나 너도 많이 늙었구나."
"늙다니요. 아직 힘 하나는 쓸 만합니다."
연은 자신보다 10살이나 많은 쌍식이의 주름진 얼굴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가 늙어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던 거다.
이곳에 오기 전에 브리튼 왕국에 있던 이유도 칼 10세가 위중하단 소식을 듣고 생을 마치기 전에 보기 위해서였다.
어느새 연과 인연이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준가르 왕국의 호토고친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부름에 응했다.
외교원 원장이었던 조경도.
통상부 장관이었던 서필원도.
포도대장에서 경찰청장이 된 이완도.
병무청장이었던 구인후도 모두 떠나고 없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에 맞게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한 조선의 인재들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기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연이 쌍식이를 따라 막사 한 곳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벌떡 일어나 땅에 머리를 박으며 외쳤다.
"폐하, 다호메이 왕국의 아카바 왕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흠, 무슨 죄인지 아느냐고 물어보거라."
"네, 폐하."
연은 없는 죄를 나불거리는 아카바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악명 높은 노예 해안의 군주인 아카바 또한 평범한 사람이었던 거다.
"그래서 노예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거냐?"
"당장 폐지하겠습니다. 그러나 폐하, 우리 다호메이 왕국이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이처럼 풍요로운 땅에서 먹을 것을 걱정하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이, 그것이···."
아카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노예 거래로 부를 일구자 농사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기에 포기했던 거다.
이곳까지 올 때 타고 온 기물이 생각나자 아카바는 다시 입을 열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신하의 말처럼 자신이 하기 나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은 한참을 듣다가 손을 내저었다.
"그래, 먹고 살게 해주면 조선의 속국이 되어 따르겠다는 말인데, 굳이 속국이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또다시 주변국을 침략하거나 노예를 거래한다면 너의 목은 저 태양처럼 땅에 떨어질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지만, 아카바는 땅에 연신 머리를 박았다.
"그만 일어나거라. 내 너와 함께 둘러보고 나서 결정하겠다."
"고맙, 고맙습니다. 폐하."
연은 아카바와 함께 올빼미 호를 타고 해가 떨어지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로만 들었던 아프리카 적도 부근 서해안은 정말 대단했다.
온통 푸르름이 가득한 이곳이야말로 신이 내린 축복의 땅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좋은 환경 때문에 울창해진 밀림으로 인해 발전할 수 없어 보였다.
'다 이유가 있었구나.'
이들이 농사 대신 어업과 노예로 생을 이어나가야만 했던 원인은 다름 아닌 너무나 풍요로운 땅에 있었다.
곡식을 심고 수확을 하려 해도 무성히 자라는 잡초와 잡목 때문에 문제가 심각했다.
시찰을 마친 연은 쌍식이와 머리를 맞댔다.
"이곳은 너무 과해서 문제구나."
"숲을 없애고 제초제를 뿌리지 않는 한 농사를 지울 수 없어 보입니다. 맹수나 다름없는 야생 동물도 문제고요."
"흠···."
나름대로 분석한 쌍식이의 말에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료 공장은 필요 없지만, 발전소와 제초제 공장은 지어야겠구나."
"그러려면 이곳에 조차지가 필요합니다."
"흠···."
연은 한참 생각하다가 쌍식이의 이름을 불렀다.
"쌍식아?"
"네, 폐하."
"네가 이곳에 남아 처리를 해줘야겠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제가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쌍식이는 연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기에 바로 대답했다.
다음날, 연은 남은 일을 모두 쌍식이에게 맡기고 노예로 잡혀있던 젊은이들과 함께 군함을 타고 떠났다.
그와 달리 보급함에 실려있던 각종 장비가 노예 해안에 내려지고 공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묘한 일이 발생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나름대로 치장한 여인들이 대원들의 숙소 근처에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로 인해 훗날 이곳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조선의 피를 이어받은 이들이 사는 곳이 된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이란 말 대신 '아역 대륙'이라 불리게 되고, 악명 높은 코토누는 노예 해방을 기린다는 의미로 '해방시'가 된다.
* * *
경복궁에 도착한 연은 황후부터 찾았다.
연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기에 보고 싶었던 거다.
연이 없을 때는 황후는 은동리에 있지 않고 경복궁에서 지냈다.
황후가 보고 생각한 은동리는 완전히 딴 세상이라 적응하기 힘들었다.
은동리는 연에게 편한 곳이지만, 황후에게는 그러지 않았던 거다.
"보고 싶었소."
"쑥스럽습니다. 폐하."
연은 아직도 부끄러워하는 황후가 무척이나 예뻐 보였다.
그래서 살며시 안아 주었는데, 황후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왜 그러시오? 무슨 일이라도 있소?"
"아닙니다. 폐하, 단지 폐하의 용안에 주름이···."
"괜찮소. 세월에 따라 변하는 것일 뿐이요."
황후의 눈물을 닦아 준 연은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다음 날 아침.
경복궁 북쪽 깊숙한 곳에 연이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죄송합니다. 아버지. 저 때문에···."
훤은 안 본 사이에 많이 늙어버린 연을 보자 사죄부터 했다.
달에 가고 싶은 마음에 황실 위원회를 소집했는데, 그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 있던 연이 서둘러 오다가 몸이 상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다."
연은 손수 보따리에 싸서 들고 온 책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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