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황실 위원회(1)
연은 아들 순이 상심해서 세상을 떠도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나무라지도, 혼내지도 않고 마냥 기다렸다.
언젠가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다시 돌아올 거로 믿으며.
하지만 순이 그랬던 것은 상심 때문이 아니었다.
검수와 함께 첫사랑을 찾아서 호역으로 떠난 순은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많이 듣고 많이 봤다.
'아니, 사람을 다 태웠으면 출발해야 하는 것 아냐?'
'알면서 왜 그러나?'
'내가 알긴 뭘 안다고 그래?'
'안전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닌가? 폐하께서는 우리 백성들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알고나 하는 소린가?'
'그거야 잘 알지. 단 한 명이라도 사고로 다치거나 목숨을 잃으면 무척이나 상심하신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잘 알면서 왜 그래? 좀 참고 기다리지. 어차피 출발하면 8일은 걸릴 건데.'
'그거야 알지만, 갑갑하니 그렇지. 뱅기 타면 금방 갈 수 있다고 하지만, 난 싫네.'
'자네 때문에 내가 뭔 고생인가? 뱅기가 뭐가 답답하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모르는 소리! 넓은 바다를 보며 가는 것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알면서 그러나?'
'알긴 뭘 알아? 내가 자넬 동무로 생각하기에 따라가는 거지. 젠장!'
아직도 비행기가 무섭다고 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행기를 타보지도 않고 답답해서 싫다고 말한다.
'미안하네. 자네도 알지 않는가?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걸.'
'그걸 알고 있으니까 이러는 거지. 그래도 안전이 제일 중요하지. 망망대해를 통과해서 바로 호역으로 가는데 가는 도중에 사고라도 나면 어쩔 텐가? 폐하께서 무척이나 상심하실 것 아닌가?'
'에이! 말을 말아야지. 자넨 입만 열면 폐하! 폐하! 찬양 일색이라 이제는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네.'
그동안 호역으로 가는 여객선은 대만과 마닐라를 경유해서 갔다.
혹시라도 모를 해상 위험에 대비하기 위함이지만, 화물을 수송하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교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조선전력공사에서 운영하는 여객선도 많아졌다.
따라서 웬만하면 다른 곳을 들리지 않고 직항으로 운행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8,000km 이상 떨어져 있는 호역도 이제는 대만이나 마닐라를 들르지 않고 바로 가고 있다.
하지만 호역까지 가는 길은 무척이나 위험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이기에 사고라도 나면 대처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 척이 아닌 두 척을 쌍으로 묶어서 운행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모를 해상 사고에 빠르게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비행기 운항도 이와 같았다.
항로를 정해 놓았기에 항로를 따라 운항하는 비행기는 최소 2대 이상 동시에 출발시켰다.
그것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인 5분 간격으로.
레이더로 조선 전역을 상시 감시하고 있지만, 막상 추락하면 어디로 떨어졌는지 알기 힘들다.
그래서 추락하더라도 바로 확인할 수 있게 한 거지만, 연비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순은 배를 타고 호역으로 가면서 아버지인 연에 대한 찬양을 수도 없이 들었다.
우상화를 극도로 경계하고, 신이라 말하는 자는 총부터 쏘라는 말이 없었다면, 신으로 모실 정도였다.
호역에 도착한 순은 수소문 끝에 그녀가 사는 곳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혼인했다는 말을 듣고 미련을 버렸다.
순은 검수와 거나하게 한잔하고 조금 남아있던 정을 마저 털어 버렸다.
그리고 호역을 돌면서 세상을 구경했다.
아직 사람이 많지 않은 호역.
하지만 이곳도 도시 위주로 개발하고 있기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호역 어느 곳을 가더라도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도 큰 동상 두 개와 작은 동상 하나가 어우러진 모양으로.
큰 동상 중 하나는 거대한 창을 들고 있는 할아버지였고.
다른 하나는 오른손에는 총을, 왼손에는 설계도를 들고 있는 아버지였다.
두 개의 큰 동상 앞에는 작은 동상이 있었는데, 호주 총독인 박문식이었다.
사람들은 동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우상화는 금지였기에 엎드려 절은 하지 않았지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가지고 온 꽃으로 동상들을 단장했다.
순은 효종과 연의 동상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경복궁 안에 있는 도서관은 세상의 모든 책이 있다고 할 정도로 거대하다.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기에 순은 세상의 이치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분명 아버지는 정복자인데···.'
예맥 대륙 북부를 조선의 영토로 만들 땐 침략이 아니라 방어하다 그렇게 된 거라고 하지만, 이곳 호역은 그러지 않다는 걸 순은 알고 있었다.
표면적으론 미개한 원주민들만 사는 빈 땅이라 조선의 영토로 복속시켰다고 했지만, 순이 본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순은 도서관 보관실에 쌓여있는 기록물에서 호역에서 벌어진 일들을 읽어 보았다.
'기록물의 내용에 따르면 반항하는 원주민들을 가차 없이 죽였다고 했는데···.'
그런데 순이 보았던 기록물은 일부 원주민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것도 극히 일부였다.
박문식이 호역을 개척하면서 제일 중시했던 것은 방역이었다.
전염병에 저항력이 없는 원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에 무척이나 조심한 거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박문식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몸에 뭔가를 넣는다고 하자 놀라 도망을 쳤고, 재수 없게 전염병이 돌아 한 마을이 몰살을 당했다.
그러자 겁을 먹은 다른 마을 원주민들이 박문식이 있는 요새를 공격했다.
그런 일은 호역을 개척하면서 곳곳에서 벌어졌다.
호전적인 원주민도 있기에 그랬지만, 생소한 이방인이 무섭고 두려웠던 게 진짜 이유였다.
아무튼 박문식의 노력 덕분에 많은 원주민들이 살아남았고, 조선에 교화되었다.
교화된 원주민들은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수 있었고, 자기들을 문명 세계로 인도 한 효종과 연 그리고 박문식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동상을 세웠다.
사실을 알게 된 순은 펑펑 울었다.
아버지가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인격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순은 혼인조차 거부하며 말썽을 부렸던 자신에 대해 반성했다.
'이럴 게 아니라,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그래서 순이 조선군에 입대했던 거다.
그런데 조선군은 전쟁을 치르는 병사라 보기 힘들었다.
조선군이 주로 하는 일은 공사였다.
도로와 철도를 깔고, 다리를 놓고, 요새와 집을 짓고, 장비를 고치고, 물자를 수송하는 일이 기본이었다.
연은 일부러 조선군을 공병대(工兵隊)로 만들었다.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고 전쟁을 치르는 일은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에서 하고 있기에 조선군은 보급 및 공병으로서 양성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조선군을 그만두더라도 세상에 나가 바로 일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인지 조선군 출신은 어느 곳에서나 높은 임금을 받았다.
기초가 확실했고, 무엇보다 안전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선 공사 중 사고라도 나면 공사 현장은 즉시 폐쇄된다.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마련하기 전까지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안전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는 조선군 출신을 대우해주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튼 순은 진짜 군인은 경비대라는 것을 알고, 경비대에 지원했다.
그것도 가장 험난한 일을 한다는 예맥 기병대에.
순을 말을 타고 오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깨달았다.
'대단하구나. 어찌 이런 체계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조선 곳곳에는 도시화 되지 않은 원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예맥 기병대는 그런 곳까지 찾아다니면서 원주민들이 잘살 수 있게 지원하고 있었다.
'선배님, 왜 이런 사람들까지 챙겨야 합니까?'
'이런! 우리 후배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네. 폐하께서 말씀하셨지요. 이대로 그냥 두면 나중에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고. 그러니 우리 후배님도 저들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마주하는 도적으로 변한 난민들을 보며 깨달았다.
'후배님, 저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이곳으로 넘어와 도적이 되었지만, 저들도 한때는 선량한 백성이었을 겁니다. 우리 조선도 폐하께서 없었다면 저런 이들로 천지를 덮였을 겁니다.'
'참말입니까?'
'참말이고 말고요. 내가 경비대만 10년 넘게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지요.'
반항하거나 도주하는 난민들에게는 가차 없이 총질을 하는 선임대원이 하는 말이라 믿기 힘들었지만, 사실이었다.
순은 예맥 기병대를 따라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며 깨달았다.
노숙은 기본이라는 예맥 기병대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우리는 예맥 대륙을 지키는 첨병입니다. 우리가 없으면 이곳은 무법천지로 변할 겁니다. 그러니 후배님!'
'말씀하십시오. 선배님.'
'잊지 마십시오. 훗날 군주가 되셔도 우리 예맥 기병대의 전통은 보존해 주십시오.'
'예에?!'
항상 자신과 같이 붙어 다니는 선임대원의 말에 순은 경악했다.
하지만 선임대원은 씩 웃더니 정중히 예를 올렸다.
'그동안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알고, 알고 있었던 겁니까?'
'모르는 대원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하.'
순만 몰랐던 거였다.
그럴 수밖에.
순에게 '후배님'이라 호칭했지만, 급할 때는 거침없이 쌍소리도 내뱉었기에 오해를 했던 거였다.
'예맥 기병대는 후임에게도 존대를 하는구나.'
세상에 그런 무력 조직은 없다는 걸 순은 몰랐다.
결국 순은 예맥 기병대를 그만둬야 했다.
자신 때문에 다른 대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조선 제국력 32년(1690) 5월.
순과 달리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훤이 순을 찾아왔다.
"폐하, 잘 지내셨어요?"
"폐하?! 무슨 부탁이냐?"
평소에는 언니라 부르는 훤이 폐하라 부르자 순은 묘한 표정으로 훤을 째려봤다.
"이번에 달 착륙선 있잖습니까?"
"안 된다."
"안되긴 뭐가 안 돼요? 내가 다 주도해서 만든 건데."
"그래도 안 된다."
"언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리 소리를 치는 게냐?"
"좋아요. 그럼 황실 위원회를 열어서 결정해요."
"해보나 마나 뻔한데 왜 고집을 부리는 거냐?"
"참말로 가고 싶단 말입니다."
드디어 인류 최초로 유인 우주선을 달에 보내기로 했다.
전처럼 달 궤도만 도는 것이 아니라 진짜 달에 착륙해서 조사하는 임무를 띠고.
"너무 위험하다. 생각해 보거라. 만약 네가 잘못되면 어찌 될지?"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뭔 상관입니까?"
만나기만 하면 다투던 행순이와 훤은 금실이 좋았다.
손이 귀한 조선 황실에 연이어 아들을 안겨준 거다.
조선 후기처럼 칠거지악이니 남존여비니 하는 말이 아예 없었고, 남녀 구분 없이 균등하게 상속하는 조선이다.
하지만 황실 위원회에 여인은 관여할 수 없었다.
혼인하면 남의 집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실에 들어온 여인들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아들을 둘이나 출산한 행순이는 내명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전 같으면 서로 자기 자식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치열한 음모가 판을 쳤겠지만, 연이 만든 조선 황실엔 그런 건 없었다.
황제가 돼봐야 황실 위원회를 거치지 않고서는 독자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고, 백성들을 위해 노력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의 모든 것인 조선전력공사의 거대한 규모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황실의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보았기에 그런 거였다.
물론 종친들로 구성된 황실 소위원회가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황실의 관혼상제와 종친들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도 안 된다."
"왜 안 된다고 그러는 겁니까?"
"언니들 다 출가하고 형제라고는 너 하나뿐이지 않으냐?"
"그래서요?"
"그래서요 라니? 무슨 말을 그리 하느냐?"
"제가 다 만들었다고요. 지금까지 제가 왜 그렇게 노력했겠어요? 참말로! 참말로! 달에 가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어릴 때부터 혼자 놀며 사고를 치던 훤은 은동리에서도 남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훤은 황자이기에 대하기가 어렵기도 했지만, 하는 일도 남달랐기에 친해지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미사일 개발에 앞장섰다.
연에게 혼나면서 깨달은 게 있었기에 그런 거였다.
아무튼 훤 때문에 조선의 미사일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제는 실리콘 카바이드(SiC) 반도체까지 생산하고 있기에 우주 로켓은 물론 달 착륙선을 제어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물론 훤 혼자서 한 건 아니었다.
은동리에 있는 수많은 천재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였다.
조선 최고의 수학자인 미순이에게 수학을 배운 행순이의 도움도 한몫했다.
"다음에 가면 되지 않느냐?"
"그건 아니죠."
"왜?"
"아직도 사람들은 창공이를 최고라 치며 그가 한 말이 회자 되고 있습니다."
"허··· 참! 너도 명예를 탐했더냐?"
"저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결국 순과 훤은 합의를 보지 못하고 황실 위원회가 소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