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관행
그토록 원했던 은동리에 도착한 행순이는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였다.
"와! 저기 좀 봐봐. 건물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어."
"···."
"어? 저건 뭐야?"
"···."
하지만 훤은 대답은커녕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오빠인 순식이가 은동리로 갔을 때 행순이도 함께 갔다.
말로만 듣던 은동리가 궁금했기에 생떼를 부렸고, 이기지 못한 미순이가 행순이를 데려간 거였다.
그런데 그때 행순이가 간 곳은 은동리가 아니었다.
행순이가 들렸던 곳은 옹진반도 입구에 있는 관리 사무소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놀랄 만큼 대단했다.
아무튼 행순이는 한 번 본 은동리에 꽂혀서 은동리에 가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하지만 적성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거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행순이를 눈여겨보고 있는 곳이 있었다.
바로 조서원이었다.
"너는 나를 따라오거라."
"네?! 저는 저곳으로 가는 것 아닙니까?"
행순이는 거대한 타원으로 된 은동 캠퍼스를 가리켰지만, 안내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앞으로 배우고 일한 곳은 저곳이 아닌 이곳이다."
"네?! 이곳은···."
크고 좋아 보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일반 가정집 같은 곳을 안내인이 가리켰다.
행순이는 황당한지 입을 벌린 채 안내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안내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행순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너도 들었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
"예에?!"
"쉬! 조용히 하고 날 따라오너라."
행순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호화스럽지만 깔끔해 보이는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곱상한 중년 여인이 환한 미소로 행순이를 맞이했다.
훗날, 행순이는 은진이에 이어 조서원의 제2대 원장이 된다.
* * *
조선 제국력 28년(1686).
어느새 연의 나이도 불혹(不惑)을 한참 넘긴 마흔여섯이 되었다.
연은 희끗희끗한 흰머리투성인 행식이를 보자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꼈다.
총리직을 끝낸 행식이는 황실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행정의 달인인 행식이가 원하기도 했지만, 황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외교원과 법무원을 맡을 책임자가 필요했기에 연이 요청한 거였다.
그런데 이것이 관행(慣行, Traditional Practice)이 된다.
총리직을 마친 후.
황실의 부름을 받으면, 일을 잘한 거였고.
부르지 않으면, 일을 못 한 거로 판명됐기에 총리에 선출된 이는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작년 봄.
인선 태황후가 별세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효종도 따라갔다.
두 분 다 원 역사보다 오래 살았지만, 부모를 잃은 연의 마음은 심란하기만 했다.
또한 다섯째 명안 공주까지 혼인으로 경복궁을 떠나자 허전함은 더해졌다.
하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은동리로 떠난 훤이 사고를 친 거였다.
"폐하, 송구스럽기 한량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잘못이 있다면 훤에게 있는 것 아니요?"
이제 연은 행식이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행식이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기도 하지만, 사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어찌 황자께서 잘못하셨겠습니까? 제 못난 자식이···."
행식이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은동리에 자리를 튼 행순이는 심심하면 훤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훤은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이것저것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기 싫어서였다.
그러자 행순이는 훤을 찾아갔고, 다투다 정이 들었다.
"나는 아무래도 좋소. 그러니 혼인 날짜를 정해서 알려주시오."
"어찌 감히···."
"부탁이오. 비록 태자가 아직 혼인하지 않았지만, 그냥 둘 순 없지 않소?"
"그래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행순이를 보고 싶다는 황후의 부탁인데도 그렇소?"
"황공하옵니다. 폐하."
호역으로 여행을 떠났던 태자 순은 돌아오자마자 조선군에 입대했다.
첫사랑이 다른 이의 아내가 되었기에 그런 거였다.
하지만 이 또한 관행이 된다.
태자가 조선군에 입대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조선 백성들은 연과 태자를 칭송하기 바빴다.
'역시 폐하께서는 대단하셔.'
'그러게. 우리도 그렇게는 못 하는데.'
'태자께서는 어떤가?'
'우리 아들놈은 아마 도망갔을 거야.'
'우리 아들놈도 그렇지. 그런데 태자께서는 자진해서 조선군에 입대하시다니. 역시 씨가 다른가 봐.'
나날이 발전하는 조선에서 태평성대가 이어지자, 이젠 조선군에 입대하는 이도 줄어들었다.
굳이 조선군에서 근무한 경력이 없어도 조선전력공사에 입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태자께서도 혼인을 하셔야 할 텐데···.'
'이를 말인가. 아직 폐하께서 정정하시지만, 우리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태자께서 빨리 혼인 하셔서 후손을 봐야 할 건데···.'
'그런데 소문 들었나?'
'뭔 소문?'
'둘째 황자께서 사고를 치셨다는데···?'
'그게 뭔 사곤가. 우리 조선의 축복이지.'
'그치?'
'그럼! 황실이 안정돼야 조선이 안정되는 것 아닌가?'
이미 저잣거리까지 소문이 퍼진 상태라 훤과 행순이를 빨리 혼인시켜야만 했다.
전 같으면 왕자끼리 권력을 두고 다투는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했던 백성들은 이젠 없었다.
연이 공개적으로 발표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실시된 총리 선거에서 최석정은 백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총리직을 연임하게 되었다.
그러자 연이 나섰다.
'앞으로 이 나라 조선은 민의에 의해 선출된 총리와 의원들에 의해 운영될 것이다. 황실을 대표하는 황제는 나서지 않고 지켜만 볼 것이다.'
지금까지는 조선 내부의 일이라도 총리는 중요한 사항이라고 판단되면 황제인 연을 찾았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연은 조선의 행정이 자리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굳이 황제는 물론 황실까지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갑작스레 거대해진 제국이 망한 이유를 알고 있기에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연은 이 문제를 문식이와 오랫동안 상의했다.
'역사를 보면 대부분 후사 때문에 제국이 망했잖아?'
-그래서 걱정하는 거야? 너 없으면 망할까 봐?
'너는 걱정 안 돼?'
-걱정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후세의 일인데.
'안 갈 거야? 궁금하지도 않아?'
-난 관심 없다고 했잖아. 봐서 뭐 하게? 잘못되었으면 어쩌려고?
사실 문식이는 겁이 났다.
그래서 미래를 보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와 달리 연은 궁금했다.
그래서 자신이 이룬 조선이 망하지 않게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연은 오래전부터 황제의 권력을 황실 위원회에 이관시키고 있었다.
혹시라도 모를 정신 나간 후손이 조선을 망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앞으로는 황제라도 황실 위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다.'
이 말 또한 황자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권력투쟁을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다.
'폐하께서 직접 통치하지 않으시면 우리 조선은 어찌 되나?'
'별일이야 있겠어? 어차피 내부 문제는 총리께서 하실 거고, 외적인 일이야 전임 총리께서 황실 위원회 사무장으로 계시니 문제 될 게 있겠나?'
백성들은 황제가 없어도 조선이 잘 돌아갈 수 있다고 봤지만, 황제가 없는 조선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황제인 연이 만든 세상이 너무나 달콤했기에 그런 거였다.
'그리고 통치라니? 그런 말은 앞으로 쓰지 말게.'
'왜?'
'폐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모름지기 공직자는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그랬어? 음···, 생각해보니 나도 들어 본 것 같네.'
연은 '국왕은 불법을 행할 수 없다'는 영국의 관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국왕은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황제인 나 또한 사람이기에 실수를 범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나라가 위태로울 수 있다. 따라서 황제라도 함부로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되고, 꼭 황실 위원회를 거쳐 행위의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
연은 후손들의 권력투쟁을 막기 위해 황제의 권한을 축소했지만, 걱정하진 않았다.
혹시나 불미스러운 자들이 권력을 탐한다 해도.
외교원과 법무원 그리고 조선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고.
조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조선전력공사가 황실의 소유이기에 그런 걱정은 꺼낼 필요조차 없었다.
그렇다 해도 자식 문제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2년 동안 조선군에 복무한 순이 다시 예맥 기병대로 소속을 옮겼기 때문이다.
조선군과 달리 예맥 기병대 일은 너무나 위험했기에 극구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런데 훤이 사고를 치자, 황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비록 적장자(嫡長子)는 아니지만, 조선을 지탱하는 황실의 대가 이어진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던 거다.
그런데 훤의 혼례식 날이 가까워지자 순이 나타났다.
"아버지, 소자 다녀왔습니다."
연은 온통 구릿빛으로 물든 순을 보고 밝게 미소 지었다.
"그래 잘 왔다. 어머니는 만나 보았느냐?"
"네, 아버지. 생각보다 건강하셔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연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고개만 끄덕였다.
순이 어떻게 지내는지 수시로 보고를 받고 있었기에 물을 필요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 아버지와 아들.
서로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더니 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응?"
"태자로서 소임을 다할 겁니다."
"그래?"
"세상을 돌아보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잘했다."
"그래서 이제는 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은 세상을 지킬 겁니다."
"고맙구나."
연은 고개를 돌려 다 큰 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효종이 자신에게 한 것처럼 연도 순을 믿고 기다렸다.
남이 보기엔 별일도 아니지만, 상심의 고통은 정이 많은 순에게 있어 큰 고통일 수 있기에 아비로서 마냥 기다린 거였다.
* * *
조선 제국력 32년(1690).
연은 10년 동안 조선을 잘 이끈 총리 최석정을 순과 함께 만났다.
"폐하와 태자를 뵙습니다."
"그래, 수고가 많았다."
"아닙니다. 폐하.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말이야 쉽지만, 그렇게 하는 게 어렵다는 건 세상이 다 알고 있으니 더는 겸양(謙讓)하지 말라."
"황송하옵니다. 폐하."
최석정은 쑥스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그래, 따로 계획한 일이 없다면 여기 있는 태자를 도왔으면 하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영광된 일을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고맙구나."
연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승낙한 최석정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자신에게는 행식이가 있었지만, 앞으로 조선을 이끌어갈 순에게 최석정이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기에 마음이 놓였다.
"석정아?"
"네, 폐하."
"순아 너도 이리 오너라."
"네? 네, 폐하."
연은 최석정과 순이 앞에 서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석정이 네가 황실 위원회 사무장으로서 일해 나가려면 나보다는 순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연은 오랫동안 생각해 온 일을 마무리 하기로 결정했다.
효종이 그랬던 것처럼 연도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한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노욕에 사로잡혀 잘못을 저지를까 두렵구나."
"아닙니다. 폐하."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폐하."
연은 행식이에 이어 총리가 된 최석정의 능력을 높이 샀다.
10년 동안 조선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최석정이지만, 잡음조차 없을 정도로 일 처리가 깔끔했다.
게다가 문식이의 말처럼 최석정은 의리가 남달랐기에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내 나이 이제 지천명(知天命)이다. 그러니 너희 둘을 믿고 쉬고 싶구나."
""폐하!""
다른 이유도 아니고 쉬고 싶다는 말에 둘은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폐하'를 외칠 뿐이었다.
연이 이러는 이유가 있었다.
이처럼 선위를 꺼낸 이유는 효종이 자신에게 한 것처럼 자신도 늙기 전에 선위함으로써 관행으로 정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한 번이면 넘어갈 수 있지만, 반복되면 관행이 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