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어려운 자식 농사(2)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황태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자 순이 좋아했던 눈이 큰 여자아이.
외교원 관리 김지남(金指南)의 여식이었다.
원래라면 중인 신분이었던 김지남은 역관을 하면서 흙을 달여 염초를 굽는 방법인 자초법(煮硝法)을 알아내 큰 공을 세웠겠지만, 세상이 바뀐 터라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어학에 재능이 있는지라 외교원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김지남이 호역(濠域)으로 발령이 났다.
연은 호주(豪州)를 호역이라 명명했다.
성벽을 따라 파인 해자처럼 주변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에 그리 이름 지은 거였다.
지금까지 호역은 박문식이 총독직을 수행하며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총독과 다름없는 역장 또한 선거에 의해 선출하기로 했기에 준비할 것이 많았다.
그래서 김지남이 그 일을 도우러 호역으로 떠난 거였다.
졸지에 첫사랑이 사라져버리자 순은 검수를 찾았다.
'스승님,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흠···.'
어릴 때부터 아침마다 경복궁 뒤뜰에서 무예를 닦던 효종을 보고 자란 순은 무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조선 제일 검인 검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정식으로 무도에 입문했다.
세상을 달관한 검수는 그런 순을 친조카처럼 보살폈다.
그래서인지 순은 속내까지 검수에게 다 털어놓고 있었다.
사인검을 손질하고 있던 검수는 검을 내려놓고 옆자리를 툭툭 쳤다.
순이 검수 옆에 털썩 앉자 검수가 검을 들어 햇빛에 반사하더니 검집에 넣고 입을 열었다.
'장부라면 한 여인에게 연연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도 한 여인만 찾고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가무에 능하기 때문이지요. 더 잘하는 기생이 있다면 저는 그곳으로 갈 겁니다.'
경강만 한양 중심을 가로지르지 않았다.
청계천 또한 종로를 따라 한양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방향이었다.
경강과 반대인 동쪽으로 흐르는 청계천은 폭 50m로 확장됐고, 21세기처럼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또한 청계천을 따라 양옆으로 도로가 놓여있었고, 그 밑은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하수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처럼 청계천에 공을 들인 이유는 단지 홍수로 인한 물난리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름만 되면 들끓는 모기떼를 원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연이 황제로 있는 조선은 도시 위주로 발전하고 있기에 모기에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었다.
'물이 고인 곳은 모기의 서식지이니 모두 없애야 한다.'
모기는 사람을 괴롭히고 전염병까지 옮길 수 있기에 연은 모기퇴치에 투자를 많이 했다.
보건부 차관으로 있는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은 그런 연의 뜻을 받들어 모기퇴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쓴 산림경제(山林經濟)처럼 홍만선은 다재다능했다.
집 짓는 것부터 농사와 해충박멸, 약 조제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런 홍만선이 나섰으니 어찌 되겠는가.
여름인데도 한양에서 모기 보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튼 종로와 청계천 사이는 한양에서도 유명한 유흥가였다.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검수는 그곳을 자주 찾아갔다.
서역에서 온 백설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기생 설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조선에서 신분제가 폐지됐다고 하지만, 기생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창기나 다름없는 관기는 사라졌다.
하지만 시와 음률에 능한 기생의 수요는 아직도 많았기에 기생이 되고자 하는 이는 넘쳐났다.
그렇다고 아무나 기생이 될 순 없었다.
시에서 주관하는 연예인 시험에 합격해야만 기생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조선 문화의 질을 올리기 위해 음지에서 활동하는 기생을 양지로 끌어 올리려는 연의 의지에 따른 거였다.
그래서인지 기생이 되고자 하는 이는 무척이나 많았다.
운이 좋아 발탁이라도 되면 라디오나 만물상자에 출연할 수 있었고, 인기를 얻으면 단숨에 유명한 연예인이 될 수도 있기에 지원자는 끊이지 않았다.
검수는 실의에 빠진 순을 데리고 청계천 북쪽에 있는 기생집을 찾아갔다.
세상에는 재능있고 예쁜 여인이 많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순은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화장까지 한 기생들의 모습이 순에게 선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뒤 순은 여인에 관한 관심을 끊었다.
언제든지 원하면 아름다운 목소리와 어울리는 뛰어난 연주를 들으며 예쁜 여인들을 볼 수 있기에 그런 거였다.
하지만 첫사랑은 잊지 못하는 법.
성인 교육대를 마친 순은 첫사랑이 호역에 있다는 소식에 그녀를 보기 위해 여행에 나섰다.
연은 검수로부터 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신신당부했다.
'너라면 안심할 수 있으니 꼭 함께 가도록 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태자께서는 제 몸과 같은 하나뿐인 수제자입니다. 제가 책임지고 보살피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효종과 검수에게 무예를 배운 순이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검수가 순을 따라 함께 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연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순은 무술에 능하고 정도 많지만, 훤은 그러지 않았다.
* * *
어느 집이나 문제아는 꼭 한 명씩 있다.
경행식과 강미순의 셋째인 행순이가 바로 그 문제아였다.
오빠인 순식이는 너무나 탁월했기에 초등학교 때 바로 은동리로 가버렸다.
그러자 행순이가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모든 방면에서 월등한 순식이가 있기에 눈치를 보며 살았던 행순이.
이젠 주변을 둘러봐도 자신을 나무랄 자는 없어 보였기에 안하무인이었다.
행순이는 예쁜 얼굴만큼 영악했다.
몇 번 사고를 친 후 행식이에게 혼이 나자 이젠 주변을 이용했다.
경복궁을 향해 로켓을 발사한 것도 혼자 놀던 훤을 꼬드긴 거였다.
사실 훤은 자폐기가 있는 아이였다.
연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공론화시키지 않았다.
자폐라는 말이 아직 대두되지 않은 세상이었고, 증상도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혼자 노는 훤에게 아이들을 붙인 것도 행순이었다.
오빠인 순식이처럼 은동리로 가고 싶었지만, 적성검사에서 문제점이 발견되어 추후 검사를 다시 봐야 했던 행순이는 심심함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또다시 사고를 치면 아버지에게 혼날 게 뻔했기에 훤을 대신 이용하기로 했다.
'너 이거 만들 수 있어?'
'뭔데?'
행순이는 라디오 겸용 휴대용 연주기를 꺼내 훤에게 보여줬다.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닫는 한쪽 면에 액정 화면이 달린 제품이었다.
조선의 과학 기술은 건너뛴 것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새로 출시된 제품들도 특이한 것이 많았다.
행순이가 훤에게 보여준 제품도 이런 것들 중 하나였다.
훤이 연주기의 작동 단추를 누르자 액정 화면에서 로켓이 발사되는 장면이 반복 재생됐다.
'이렇게 큰 건 못 만들어.'
'그럼 이 정도는?'
행순이가 양팔을 활짝 벌리자 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걸 어디서 날려?'
'저곳!'
훤은 행순이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학교 운동장 한쪽에 있는 씨름판이었다.
'걸리면?'
'바보냐? 안 걸리게 해야지.'
훤은 처음으로 듣는 바보라는 말에 행순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예뻤다.
'언니가 예쁜 여자는 조심하라고 했는데.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고···.'
훤은 순이 한 말을 떠올리며 짧게 입을 열었다.
'부품은?'
'말만 해. 내가 준비할게.'
사실 훤도 로켓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폭발할 수도 있는 위험한 물건이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여자아이가 부품을 준비한다고 하자 군침이 돌았다.
그날 이후.
훤은 행순이가 붙여준 아이들과 합심해서 로켓을 만들기 시작했다.
모르는 것은 은동리에 있는 순식이에게 물어보면 해결됐다.
그래서 제작 완료한 로켓은 최첨단 미사일과 다름없었다.
이제 12살인 훤은 혹시라도 들킬 것을 염두에 두고 로켓 발사대를 제작했다.
씨름판 모래를 파서 구멍을 만들고 1m 남짓한 로켓을 숨겼다.
무선 장치와 연결해서 단추만 누르면 뚜껑이 열리고 발사되게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경복궁 곳곳을 돌아다니며 익힌 지식이 있었고, 청계천 남쪽에 형성된 상가에서 필요한 부품을 모두 조달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 * *
훤과 행순이는 연의 집무실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었다.
황제의 막내와 전 총리의 막내가 서로를 노려보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배신자!'
'배신자라니! 너야말로 배신자지.'
'뭐?'
'황자라고 말하지 않았잖아?'
'그건 교칙에 밝히면 안 된다고 되어 있어.'
'흥! 그래도 나에겐 말해줬어야지. 우린 동업자잖아. 그러니 너야말로 진짜 배신자야.'
훤은 자신을 고발한 행순이를 배신자라며 힐책했지만, 말로는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훤이 발사한 로켓은 끝내 누구의 짓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북촌초등학교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중 씨름판을 볼 수 있는 카메라에 행순이가 장난쳐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계천 부품상가를 수소문한 끝에 문제의 로켓 발사대 부품을 사간 이를 찾아냈다.
바로 행순이를 돌보는 이였다.
"어허! 아직도 반성하고 있지 않다니. 지옥도로 가고 싶은 게냐?"
"아, 아닙니다. 폐하. 저는 반성하고 있습니다."
"···."
행순이는 빠르게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훤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훤은 할 말이 없느냐?"
"···선은 넘지 않았습니다."
"오호! 그래서 공중 폭발시킨 것이더냐? 그러다 떨어진 파편에 사람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그랬느냐?"
"이, 인적이 뜸한 곳입니다."
"그렇다 해도 불이 날 수 있는데 그건 생각하지 않은 거냐?"
"···죄송합니다."
범인이 행순이와 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연은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사고도 사고지만, 훤이 만든 로켓과 로켓 발사대가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건 완전 지대공 미사일인데.'
훤이 만든 로켓은 경복궁을 넘기 전에 폭발했지만, 이를 잘 이용하면 지대공 미사일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 지대공 미사일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잡기 위해 비행기 근처로 접근하면 자동 폭발한다.
폭발 시 분산되는 파편으로 빠르게 나는 비행기를 잡는데 효율적이기에 그런 거다.
또한 발사대는 격납고(Silo)나 다름없었다.
"위치 수신기(GPS)는 어찌 알고?"
"···도서관에서 봤습니다."
"크흠···."
훤의 언어 능력은 떨어졌지만, 기발한 발상은 천재급이었다.
로켓 안에 내장시킨 위치 수신기를 파악해 경복궁을 넘기 전에 로켓이 자동으로 폭발되게 만들었다.
그것도 정해진 위치로 날아간 후에 말이다.
연은 아직 미사일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사일을 쓸 정도로 조선의 안보를 위협할 만한 적이 없었고, 우주 개척에 필요한 기술은 제어가 안 되는 고체 연료보다는 액체 연료를 제어하는 기술이 필요했기에 그런 거였다.
그런데 시중에 나도는 부품으로 지대공 미사일과 같은 로켓을 만들다니.
한편으론 기특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미사일과 미사일 방어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할 필요성을 느꼈다.
"손은 내리고 저곳에 앉아 있거라. 싸우지는 말고. 알았느냐?"
"네, 폐하."
"···."
행식이가 있다면 둘의 처우 문제를 상의했겠지만, 신임 총리인 최석정에게 인수인계를 마친 행식이는 미순이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그렇다고 10년 넘게 총리를 하면서 고생한 행식이를 오라고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사고 친 행순이를 집무실까지 불러들인 거다.
그래도 남의 자식 문제라 연락은 해야 했다.
수화기를 든 연은 인사를 하기도 전에 행식이의 사과를 들었다.
"알고 있었던 거냐?"
-네, 폐하. 좀 전에 들었습니다. 참말로 죄송합니다. 다 제가 못난 탓입니다.
"그리 말하면 나 또한 못난 놈이 되는 것 아니냐?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죄송합니다. 폐하.
한참 행식이와 상의한 후.
연은 둘 앞에 다가섰다.
"너희 둘을 은동리로 보내기로 했다."
"참말이십니까? 폐하?"
벌떡 일어난 행순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참말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은동리에서도 사고 치면 다음은 지옥도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절대! 절대로 사고 치지 않겠습니다. 폐하."
행순이는 자신도 모르게 새끼손가락을 연에게 내밀었다.
연도 웃으면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한 거다?""네, 폐하. 꼭 지킬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천재급 사고뭉치 아이 둘이 은동리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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