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호랑이 없는 곳에 나타난 용(4)
나름대로 수학은 자신 있다는 연이다.
하지만 야코프가 칠판에 적고 있는 내용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무얼 의미하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한참 적고 난 야코프가 분필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이 공식은 미순이가 만든 '융합 에너지 이득 계수' 공식을 응용한 거야.'
'그래서 어디다 쓰는 건데?'
'양자 도약 시 위치를 정확히 찾고 그때 필요한 에너지도 절약할 수 있지.'
'그래?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지.'
'뭐! 다시 돌아간다고? 왜? 무엇 때문에? 장가까지 간 놈이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누가 바로 간데? 바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어. 이제야 내가 처음 만든 공식에서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했는데. 말도 안 되지.'
'아···, 그럼 돌아갈 방법을 일단 찾았으니 더 많은 지원을 해달라는 거군.'
'맞아. 바로 그거야.'
지금까지 야코프가 승인받은 연구비만 해도 21세기로 계산하면 수백조 원이 넘을 거다.
그런데도 야코프는 더 많은 지원을 요구했다.
물론 해줄 생각이다.
뭐가 됐든 야코프가 하는 일은 조선을 발전시킬 테니까.
하지만 연은 궁금한 게 있었다.
'야코프, 전에 네가 한 말에 따르면 우리가 넘어 온 이곳은 다른 우주라며? 그런데도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전에 살던 우주로? 그건 불가능해.'
'그럼, 돌아간다는 의미는 뭐야?'
'여길 봐!'
야코프는 칠판에 적혀 있는 공식과 풀이식을 설명하면서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어.'
'흠···, 한번 지나간 시간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거군.'
'맞아. 시간을 제어할 수 있다는 중력도 시간을 늦출 순 있지만, 뒤로 가게 할 순 없지. 시간은 계속 전진만 할 뿐이야. 그래서 양자 도약을 이용해 다른 궤적에 있는 우주로 넘어 온 거지.'
'그런데 미래로 가는 것은 이 우주 안에서 할 수 있다는 거고?'
'그렇지. 시간은 뒤로 갈 순 없지만, 앞으로 가고 있으니 가능하지.'
'그럼, 미래를 보고 싶다는 말이네.'
'너는 보고 싶지 않아? 네가 만든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나는 궁금해서 못 참겠는데.'
야코프는 천생 과학자였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끝내 밝혀내고야 마는 진짜 과학자였던 거다.
그가 일으킨 대전쟁시대도 치밀한 계산에 의한 거였다.
처음에는 느닷없이 등장한 조선을 견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조선의 무력은 막강했다.
그래서 조선을 이용해 러시아의 근본인 루스 차르국을 망하게 만들고자 마음먹었다.
덤으로 초원의 약탈자들까지 모조리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하지만 계산에 오차가 있었다.
사파비와 무굴 제국까지 끼어든 거였다.
그런데도 조선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단지 그것뿐이야?'
'그건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양순이가 암으로 고생했잖아.'
'양순이도 데려가게?'
'아니, 양순이가 나보다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순간 야코프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그러더니 다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양순이가 세상을 떠나면 난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때 떠날 거야.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거든.'
초점을 잃은 야코프의 눈동자는 애절함과 함께 기대감이 느껴졌다.
연은 그런 야코프를 보고 자신도 궁금함이 샘 솟았다.
'좋아! 양순이에게 말해 놓을 테니 원하는 대로 한번 해봐.'
'고마워.'
'고맙긴. 나도 득 보는 건데.'
사실 야코프가 조선의 생화학과 의학 기술을 급격히 끌어 올리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양순이 때문이었다.
양순이와 혼인한 후 야코프는 그녀의 몸에서 이상함을 발견했다.
그녀의 가슴에서 딱딱한 몽우리가 만져진 거다.
양순이는 괜찮다고 했지만, 야코프는 아니었다.
자신의 어머니 또한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야코프는 즉시 연에게 연락했고, 연은 바로 조처를 취했다.
양순이는 쌍식이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라 잃을 순 없었다.
다행히도 서두른 덕분에 양순이의 크지 않은 암 덩어리는 깔끔하게 제거됐다.
하지만 항암치료 기술이 없기에 어찌 될지 지켜봐야 했다.
재발이라도 된다면 그때는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황실 어의(御醫)의 말도 있었기에 야코프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떠나면 난 미쳐버릴 거야.'
순정파였던 야코프는 양순이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순 없었기에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바로 미래로 건너가는 거였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같은 우주에서 과거로 돌아갈 순 없다.
하지만 미래는 시간을 따라가면 되기에 같은 우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코프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그에 맞는 계산식을 찾았다.
마침내 미순이가 만든 공식에서 그 해결책을 얻었다.
하지만 이론을 현실로 만들 장치를 개발하는 건 언제 될지 알 수 없었다.
막대한 연구비도 문제였다.
아무리 조선전력공사의 재정이 막대하고, 그 재정의 최종 책임자가 자신의 부인인 양순이라고 하지만, 야코프는 선을 넘지 않았다.
연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지원을 요청했고, 승낙을 받았다.
연 또한 자신이 만든 미래가 보고 싶었기에 그리 한 거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야코프 같은 천재 과학자가 일에 몰두할 때 발생할 효과를 기대한 거였다.
그 효과는 바로바로 나타나고 있었다.
* * *
세계 최초로 조선이 만든 항공모함의 이름은 공식적으로 '태조 이성계 함'이지만, 내부적으론 '오소(烏巢) 1호 함'이었다.
항공모함에 탑재된 복엽기의 명칭이 '은오(銀烏)'였기에 그리 붙인 거였다.
은빛 까마귀에 탑승해 이착륙까지 경험한 각국 정상들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이곳까지 오면서 비행기라는 기물을 타봤지만, 저 작은 전투기는 차원이 다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찌 하늘에서 저리 자유자재로 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저는 빙빙 도는 것을 못 참아 실례까지 했습니다."
"그래요? 전 짜릿하기만 하던데요."
"에이, 내릴 때 주저앉는 것 다 봤습니다."
"그래요? 너무 신나서 기운이 빠진 건데 그걸 봤습니까?"
정상들은 처음 목마를 탄 아이들처럼 신이나 있었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이제 말로만 들었던 비행기는 언제든지 탈 수 있었다.
하지만 배보다 편한 여객기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은오라 부르는 전투기는 달랐다.
은오에 달린 9기통 방사형 엔진의 출력은 무려 750kW(약 1,000마력)나 되었기에 복엽기인데도 시속 400km에 달하는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날개가 하나인 단엽기였다면 시속 600km도 가능할 정도였다.
이처럼 막강한 엔진을 탑재했기에 은오는 맞바람이 세게 불면 활주 거리가 50m만 돼도 이착륙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다.
속도가 훨씬 빠르고 기름도 덜 먹는 단엽기 대신 복엽기를 항공모함 탑재기로 쓴 이유는 바로 활주 거리에 있었다.
활주로가 200m 정도인 작은 항공모함이기에 이착륙 시 안전한 복엽기를 쓸 수밖에 없었던 거다.
또한 날개가 둘이라 양력도 높기에 많은 폭탄을 싣고 다닐 수도 있다.
때에 따라서는 폭격기로 활용도 가능했던 거다.
연은 정상들의 대화가 줄어들자 앞으로 나섰다.
"보신 것처럼 이 은빛 까마귀는 단단한 바위로 쌓아 올린 성벽조차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을 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젠 안심하십시오. 앞으로 조선과 조선의 우방국들은 이 은오가 지킬 테니까요."
조선의 우방국이 된 유럽 반도와 중원에 있는 소국들.
조선이라는 방패를 얻었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조선과 인접한 나라라면 상관없겠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는 조선의 지원을 받기 전에 침략으로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제법 체급이 큰 네덜란드도 조선을 믿고 군을 해체했다.
조선과 인접해 있기에 그런 거였지만, 진짜 이유는 자국 경제 발전에 있었다.
침략 전쟁이라도 일으킨다면 모르겠지만, 군이란 전쟁이 없다면 소비만 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집단이다.
그런 소비 집단을 유지하는 비용은 어느 나라나 천문학적 돈이 든다.
따라서 조선과 벌어진 엄청난 격차를 조금이라도 따라잡으려면 군을 폐지하는 게 정답이었다.
대신 경찰을 양성하여 불안한 치안을 잡는 게 여러모로 바른길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조선을 믿고 따를 수는 없었다.
역사를 따져봐도 믿다가 배신당해 망한 나라가 한둘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우방국이 된 소국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지속해서 조선에 문의했다.
'폐하, 만약에 침략이라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린 대조선만 믿고 군을 없애버렸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커지는 프랑스가 두렵기만 합니다.'
'만약에 프랑스의 공격을 받는다면 조선에서 도와준다고 해도 망하고 없을 겁니다. 그러니 폐하, 저희가 안심할 수 있는 뭐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물에 빠진 사람 건져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었지만, 연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21세기 중엽.
세계 5위 군사 강국이 된 대한민국이지만, 항상 안보 불안에 시달렸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2번째로 높은 GDP 대비 국방비를 투입하고 있지만, 더 강한 주변국의 입김을 무시할 순 없었다.
게다가 호시탐탐 시비를 거는 북한은 핵을 보유하고 있기에 독자적인 전략을 세울 수도 없었다.
답답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갔다.
자신만 아는 정치인들은 그런 상황을 이용해 이득을 취했고, 악용했기에 통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어떤 나라도 대한민국을 도와주지 않았다.
되려 못된 정치인들과 짜고 대한민국의 국부를 찬탈해갔다.
연이 만든 조선이라면 사기죄로 지옥도가 아니라 목이 잘렸겠지만, 그 누구도 기소조차 당하지 않았다.
연은 자신이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에는 그런 나라가 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룰 수 없다고 봤기에 포기하고 살았다.
그런데 야코프로 인해 힘을 얻었다.
야코프가 설치기 시작한 지 10년.
연은 그토록 기다리던 소형모듈원자로(SMR)가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짜야? 정말 소형원자로 개발이 끝난 거야?'
'그럼! 그러니까 널 불렀지. 여기 보라고. 이게 바로 미크로웨어에서 팔던 그 소형원자로 맞아.'
'그래? 생각보다 큰데?'
지름 5m에 높이가 20m나 되기에 소형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어찌 됐건 출력이 100MW 정도였기에 분류상 소형이 맞았다.
'지금은 그렇지만, 5m 이하로 줄일 수 있어.'
'그럼 당장은 배에 탑재할 수 없겠네.'
연은 아쉬워했지만, 야코프는 달랐다.
'무슨 소리야? 이와 똑같은 원자로가 벌써 탑재되어 있는데.'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벌써 탑재되어 있다니.'
'몰랐어? 나는 아는 줄 알았는데.'
야코프는 혹시라도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 건조하고 있던 항공모함에 소형원자로를 탑재해 시험 가동했다.
여차하면 통째로 바다에 수장시킬 생각이었던 거다.
'일전에 시험 운행했다는 항공모함이 이 소형원자로로 운행되고 있다는 말이야?'
'맞아. 다행히 지금까지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어.'
그토록 원했던 소형모듈원자로가 벌써 가동되고 있다는 말에 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쁘게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 그럼. 바로 양산할 수 있는 거야?'
'한 일 년 정도 더 테스트해보고 판단하자고.'
일 년이 지난 지금.
100여 개국이 넘는 정상들 앞에 선 연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조선은 우방국의 안전뿐만 아니라 전력까지 책임지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모두 놀란 눈빛으로 연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조선이 아닌 곳에서 전기를 얻는 방법은 단순했다.
몇몇 나라에서는 조선에서 수입한 열식 발전기를 생산해 쓰고 있지만, 대부분 나라는 조선에서 수입한 열식발전기를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출력이 너무 낮았다.
그래서 지속해서 요구했지만, 조선은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력을 책임지다니.
발전소를 지어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폐하, 아파치 왕국처럼 우리 왕국에도 수력 발전소를 세워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좋은 발전소를 조선의 우방국에 설치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입니까?"
연은 자신만 바라보는 정상들의 시선을 느끼며 손가락을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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