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호랑이 없는 곳에 나타난 용(3)
연이 황제에 오른 후.
조선전력공사의 핵심 시설이 있는 은동리와 옹진반도는 쌍식이와 양순이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비대칭 지식인인 야코프가 등장했다.
연은 자신만으로도 이처럼 발전한 조선이기에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가 경악으로 변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연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약속에 따른 의무감으로 야코프는 자신이 알고 있던 수학과 과학 지식을 선발된 아이들에게 전수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이변이 발생했다.
그동안 미순이에게 수학을 배웠던 아이들.
지금까지 풀지 못한 여러 문제를 야코프에게 던졌다.
야코프는 귀찮았지만, 모든 질문을 하나씩 풀어 설명해줬다.
그러면서 점점 빠져들었다.
야코프가 수학을 배울 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책과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로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쌓았던 거다.
물론 미국으로 삶을 터전을 옮긴 후에는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오직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야코프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흥미를 느꼈다.
자신이 배우면서 느꼈던 감정을 아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었기에 그런 거였다.
야코프는 귀찮아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고, 그러면서 자신의 지식도 높아져 갔다.
그러다 보니 떠날 수가 없었다.
원래는 양순이가 청혼에 승낙하든 말든 지식 전수가 끝나면 뉴질랜드로 가려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은동리야말로 자신이 원했던 최상의 환경이기에 그냥 남기로 마음을 바꿨다.
'나는 그대와 함께 새로운 땅으로 떠날 생각이었소. 하지만 내가 있을 곳은 바로 이곳인 것 같소. 내 사랑하는 그대여, 나와 함께 이곳에서 미래를 꿈꾸지 않겠소?'
사실 야코프는 미련이 없었다.
양자도약(量子跳躍, Quantum Jump)과 양자통신을 이용해 시공을 뛰어넘어 과거로 온 이유가 연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더는 하고픈 일도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은동리에서 자신과 같은 열정을 가진 아이들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이런 과정을 지켜봤던 양순이는 야코프의 청혼을 받아주었다.
혼기를 놓쳤기도 하지만, 모두가 자신을 무서워하고 어렵게 대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양순이는 평생 혼자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야코프의 심성이 착하다는 것을 알고 그와 함께 살기로 했다.
혼례를 마친 두 사람은 쌍식이 집 옆에 지어진 양순이네 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귀빈 숙소에서 지낼 때, 야코프의 생활은 단순했다.
일어나서 밥 먹고, 아이들 가르치고, 오후가 되면 산책하거나 옹진반도에 있는 시설들을 보고 다녔다.
그리고 해가 지면 양순이를 찾아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다였다.
그런 생활이 혼인으로 인해 바뀌는 건 당연했다.
혼자 살다가 전혀 다른 이성과 함께 사는 거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야코프는 정도를 넘어섰다.
늦게 찾아온 양순이란 사랑 덩이를 위해 야코프는 그녀와 함께 사는 공간을 하나둘씩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서방님, 이건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양순이는 야코프를 서방님이라 불렀다.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데릴사위제에서 데릴사위의 방은 서쪽에 두었다.
그래서 서방(西房)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지만, 야코프는 서역에서 온 사람이라고 알고 있기에 그리 부른 거였다.
'별거 아니요. 무선 전파를 이용해 조정하는 것이요. 이 단추만 누르면 창문 커튼, 아니 가리개를 여닫을 수 있소.'
양순이가 없는 사이 창문 커튼을 모두 자동으로 여닫게 만든 야코프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것만 아니었다.
쌍식이의 집과 달리 담장이 없는 양순이의 집 앞.
넓은 앞마당에는 푸릇푸릇한 잔디가 깔리고,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물을 뿌려주는 관개용살수기(灌漑用撒水器, Irrigation Sprinkler)까지 구성해 놓았다.
올빼미 모양으로 만든 우체통.
자동으로 여닫는 차고 문.
밤이 되면 알아서 자동으로 켜지는 화려한 LED 조명.
야코프는 자신이 살았던 21세기처럼 양순이의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은동리에 사는 모든 사람이 보고 있었다.
아니, 볼 수밖에 없었다.
연으로부터 하사받은 양순이의 집이 은동리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이다.
연의 집무실이 있던 조선전력공사 본사 바로 옆에 있는 양순이의 집은 은동리 외곽에 사는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밤만 되면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양순이의 집은 언덕 위에 지어진 연구원들의 집에서 멀지만,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따라 하기 시작했다.
빵빵한 월급을 받고 있지만, 쓸 곳이 없어 모아두었다가 여행 가서 쓰고 오는 게 은동리의 문화였는데 이제는 집 꾸미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자 밤만 되면 은동리 외곽 모습은 놀랄 정도로 변해 버렸다.
은동리 중심 본사에서 바라본 주변 모습은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조망을 선사했다.
가끔 은동리를 방문한 연도 이 모습을 보고 감탄할 정도였다.
'완전 별세계네.'
'내가 하라고 한 것 아니야.'
'알고 있어. 아무튼 멋지다.'
'그래? 그럼 더 해도 돼?'
'응. 원하는 대로 뭐든 해도 돼. 단 사람에게 이로운 거야 돼.'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런데 연이 실수한 거였다.
야코프가 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이렇게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야코프는 조선의 재정이, 아니 조선전력공사의 부가 자신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전력공사의 모든 재정관리는 양순이가 하고 있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야코프가 우연히 살펴본 조선전력공사의 수익은 말도 못 하게 어마무시했다.
'하···! 이게 뭐야? 세계 천대 기업을 합친 것보다 많은 거 아니야?'
경제 지식은 없지만, 대충 계산해봐도 자신이 다녔던 21세기 최고 기업이라 불렸던 회사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내가 원하는 대로 막 쓴다고 해도 티도 나지 않을 거야.'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자원 개발부터 최종 판매까지 하고 있는 조선전력공사의 재정은 따질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서 야코프는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이론 물리학 연구소(粒子物理學硏究所)'였다.
연은 양순이의 보고를 받고 바로 허락해줬다.
'어차피 소형원자로를 만들려면 필요한 거니 바로 짓도록 하라.'
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직도 농사를 짓고 있는 은동리 본사 동쪽 넓은 벌판에 하얀색으로 된 거대한 원형 건물이 지어졌다.
'서방님, 이 건물은 무척이나 특이하지만 단순합니다. 이렇게 짓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론 물리학이 발전하려면 자주 만나 토론을 해야 하오. 이 건물 안 빈공간은 그걸 위해 공원으로 조성할 거요.'
'그래서 공원이라 부르신 겁니까?'
'그렇소. 이 은동캠퍼스 안에 있는 공원이야말로 앞으로 이론 물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성지가 될 것이오.'
야코프가 설계한 은동캠퍼스는 21세기 다국적 거대기업의 본사인 사과캠퍼스를 따라 한 거였다.
다른 게 있다면 규모였다.
사과캠퍼스는 직경이 461m였지만, 은동캠퍼스는 직경이 500m나 되었다.
또한 지하 2층에 지상 5층으로 지어진 거대한 규모였기에 지금까지 은동리에 지어진 모든 연구소를 다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사과캠퍼스처럼 지붕을 태양전지판으로 덮여 놓았기에 자체적으로 필요한 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야코프는 입자가속기 건설 또한 바로 추진했다.
소형원자로야 전생에 만들어 성공적으로 판매한 적이 있기에 입자가속기를 따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낙후된 생물학과 의학을 끌어올리고, 자신이 원한 연구도 하기 위해 야코프는 입자가속기 건설을 제안했다.
'소형원자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니 염려 말고, 이것부터 만들어줘.'
'뭔데?'
'입자가속기.'
'세른(CERN)에서 만든 그 입자가속기를 말하는 거야?'
'맞아. 그게 있어야 앞으로 생각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거든.'
그래서 연이 허락해줬는데 야코프가 원했던 가속기는 엄청난 규모였다.
21세기에 가장 크다고 알려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는 둘레가 27km였다.
그런데 야코프가 계획한 가속기는 무려 50km나 됐다.
그런데도 무리 없이 추진되고 있었다.
옹진반도 북쪽 산악지대 깊숙한 곳에서 건설하고 있는 입자가속기는 엄청난 양의 초전도체가 필요했지만, 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지연 없이 모두 제공됐다.
이처럼 연에 이어 야코프까지 등장하자 조선의 과학, 아니 은동리의 과학은 21세기 초반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기술은 전기를 이용한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생물학과 의학 기술은 잘해야 20세기 중반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생물학과 의학 기술은 전쟁 시 상대를 죽이기 위한 또는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한 생체실험이 있었기에 급격히 발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런 전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침략을 당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방어를 한 것뿐이었다.
시대를 뛰어넘은 막강한 화력으로 단숨에 물리쳤기에 생화학전 같은 반인류적인 무기를 개발할 필요조차 없었다.
의학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의무병이나 의무대원 출신을 의사로 만들고 있기에 심도 있는 의학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야코프가 설치기 시작하자 생화학과 의학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야코프는 단순히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만큼 편하게 지내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한 행동이나 요구로 인해 은동리는 또 한 번의 개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노 단위까지 볼 수 있는 전자현미경이 개발되자 반도체 기술뿐만 아니라 생화학과 의학 기술 또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1930년에 등장한 전자현미경이 모든 분야를 획기적으로 바꿔 놓은 것처럼 나노 단위를 측정할 수 있는 전자 장비가 개발되자 생화학, 의학 기술뿐만 아니라 소재와 센서 기술도 미친 듯이 올라가고 있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연이 물었다.
'도대체 네가 원하는 건 뭐야? 뭘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한 거야?'
자신보다 더한 야코프를 보고 혀를 내두르며 묻는 연의 질문에 야코프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핵융합.'
'뭐? 핵융합? 그게 가능해?'
연은 자신이 살다가 온 21세기 중반까지 핵융합 기술은 답이 없다고 했기에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야코프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깜짝 놀랐다.
'응, 이곳에서 힌트를 얻었거든.'
'이곳? 이곳 은동리 말이야?'
'맞아. 이곳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곳이었어.'
아무리 천재라고 하지만 알지 못하는 현상을 밝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은동리에 있는 호기심이 넘치는 아이들로 인해 야코프는 그 벽을 깰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질문을 받다 보니 떠 오른 게 있었다는 말이지?'
'응, 그래서 고민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어.'
아이들의 질문 속에서 힌트를 얻은 야코프는 고민 끝에 미순이를 찾았다.
이연 공과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미순이는 야코프의 고민을 듣고 몇 달 동안 생각하더니 뭔가를 적어 가지고 왔다.
'선생님, 이 공식을 적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어디 봅시다.'
미순이가 적어온 공식과 설명은 무려 100여 장이나 됐다.
그 안에는 핵융합 시 문제가 되는 '융합 에너지 이득 계수(Q ratio)'를 계산하는 공식과 설명이 적혀있었다.
핵융합도 핵분열처럼 엄청난 에너지가 주입돼야 반응한다.
그것도 지속해서 공급해줘야만 한다.
이때 주입한 에너지와 반응으로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같으면 '핵융합 에너지 이득 계수'인 Q 값이 1이 된다.
하지만 이런 이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00이라는 에너지를 투입해서 100이라는 에너지를 얻는데 막대한 돈을 투입한 꼴이니 바보짓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Q 값이 1이 넘어야 조금이라도 남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지만, 투입한 돈과 효율을 생각하면 Q 값이 10은 되어야 한다.
그래야 10MW의 에너지 주입으로 100MW의 융합 전력을 생산할 수 있으니, 투입한 자금과 물자를 빼더라도 이득을 볼 수 있는 거다.
'이제 소형원자로만 양산하면 에너지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데 핵융합까지 개발해야 해?'
'응, 원하는 게 있거든.'
'그게 뭐야?'
'다시 돌아가는 것.'
'뭐?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이곳에서 연구하다가 찾아냈어.'
'정말이야?'
야코프는 대답 대신 분필을 들고 칠판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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