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249화 (249/275)

249. 호랑이 없는 곳에 나타난 용(1)

조선 제국력 19년(1677) 5월.

연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기 위해 대만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17살이 된 순도 함께 데리고 갔다.

또한 배를 타지 않고 비행기로 대만까지 이동했다.

지금까지 여객기를 운영하면서 자잘한 문제는 끊임없이 보고되었지만, 사고로 연결된 적은 없기에 그리 한 거였다.

그렇다고 순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모를 사고로 함께 죽을 수도 있기에 따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다.

연은 이번에도 우방국 정상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그런데 그 수가 무려 100여 명이 넘었다.

그런데도 대만 우주기지는 붐비지 않았다.

미리 시설을 확충해 놓았기에 각국 정상들이 차지한 우주기지 영빈관(迎賓館, State Guest House)은 축제 분위기였다.

군대조차 별 볼 일 없는 유구국은 조선의 보호국이 된 후,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중원과 유럽반도에 널려 있는 소국들은 긴급 회동을 가졌다.

조선은 우방국이나 보호국이 아니면 타국의 일에 일절 간여하지 않기에 신분제를 포기하고 조선에 보호국을 신청하기 위해 모인 거였다.

기득권을 주장하는 귀족들이 반대하는 나라들도 있었지만,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을 생각하다가 침략이라도 받는다면 망하는 건 불을 보듯 뻔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주변국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을 방법은 조선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최선이란 걸 인지했기에 그런 거였다.

아무튼 수많은 소국들이 모인 '조선 보호국 정상 회담'은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

이번 회담을 주체한 네덜란드의 빌럼(Willem) 3세는 모두의 뜻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대조선의 보호국이 되기 위해 신분제는 물론 군대까지 포기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는 대조선의 이념인 홍익을 따르는 것이니 받아 주시길 진심으로 요청합니다.'

연이 아니었다면 네덜란드는 영란전쟁(英蘭戰爭)을 치렀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프랑스가 공산화를 선언하자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공산화를 선언한 프랑스가 빠르게 국력을 회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프랑스와는 브리튼 왕국의 영토인 벨기에 지역을 사이에 두고 있기에 육로를 통한 침략은 당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무역으로 먹고사는 네덜란드로써는 해상 안전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조선이 예맥 대륙 횡단 열차를 운행한 후로 대항해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래도 지중해 연안은 해상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에 모인 소국들이 거래처가 될 수도 있기에 네덜란드는 자국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에서 회담을 열자고 먼저 제안했다.

그래서 모인 나라의 수만 100여 국 가까이 됐다.

그중 반은 중원에서 온 나라들이었다.

이제는 조선말을 할 줄 알아야 국제무대에 설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인지 조선말을 모르는 정상들은 없었다.

잘하진 못하더라도 알아듣는 건 기본이었다.

그들이 작성한 회담 선언문도 조선글인 한글이었다.

아무튼 군대까지 포기하고 보호국을 신청하자 연은 모두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소국들이 보호국을 신청하면서 자국의 군대를 폐지하겠다는 얍삽한 속셈을 알면서도 연이 모두 받아들인 이유가 있었다.

전쟁으로 인류 기술이 발전한다고 말하지만, 연은 이 말을 믿지 않았기에 그런 거였다.

조선이 제국을 선언하기 전부터 전쟁은 없었다.

하지만 조선의 기술은 미친 듯이 발전하고 있었다.

연은 가장 먼저 온 문식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만 우주기지 남쪽 바닷가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하고 있는 연과 문식이.

예쁘게 설어놓은 회 한 점과 함께 맑고 투명한 잔에 담긴 술을 들이켰다.

"역시 회는 와이트 와인이랑 마셔야 제맛이군."

"조선 제국의 황제가 화이트 와인이라니, 그러면 안되는 거 아냐?"

"그럼 뭐라고 불러?"

"아파치 왕국산 백포도주(白葡萄酒)라고 불러야지."

"백포도주란 말도 중원에서 넘어 온 거잖아?"

"이런, 무식하긴."

"뭐가 무식해?"

"세상 말 전부 어원을 따지면 어차피 하나야. 따라서 시대에 맞게 쓰는 게 옳아."

"그런 거야?"

"그런 거지. 지금 조선말을 생각해봐? 얼마나 많은 언어가 섞여 있는지."

조선은 제국 공용어로 조선말을 쓰도록 했다.

그렇다고 꼭 배우라고 하지도 않았다.

조선말을 배우면 주민증부터 여러모로 혜택을 주고 있기에 알아서들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각 지역에서는 아직도 그 지역에서 쓰던 말이 주류인 곳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조선의 어휘(語彙, Vocabulary)는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지 않아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조선말이다.

그런데 각지에서 쓰는 다양한 어휘까지 첨가되자 신조어가 미친 듯이 많아졌다.

그동안 표준 조선말을 홍보하던 방송국들도 이제는 신조어에 관한 내용도 방영하고 있었다.

"그러긴 하지. 나조차도 모르는 말투성이니···."

이제 37살인 연은 어느새 아제처럼 신조어를 알지 못했다.

매일 같이 쏟아지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었지만, 연에게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가?"

"그래도 아파치 왕국에서 쓰는 조선말은 너와 내가 살았던 시대의 말이잖아?"

"그러긴 하지."

"그래서 너희 왕국에서 쓰는 말이 나에겐 제일 편해."

조선과 달리 문식이가 가르친 아파치 왕국의 언어는 21세기 표준 한국어였다.

연이 아파치 왕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정이 같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근데,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응?"

"이번에 달까지 사람을 보낸다며?"

"달에 착륙하는 건 아니고 달 근처에서 우주 유영까진 하고 돌아올 거야."

"그래도 그게 말이 돼? 내가 과학을 잘 모르는 문돌이지만, 우주복만 하더라도 보통 기술로는 안 되는 거잖아?"

"먹고 싸는 게 문제긴 했지."

"해결했단 말이네?"

"응, 호랑이 없는 산에 용이 나타났거든."

"뭐?!"

연이 없는 은동리는 연이 있을 때보다 더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야코프 때문이었다.

야코프에게 배우라고 붙여준 조선의 천재들.

대단함을 뛰어넘어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야코프는 연이 약속을 지키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식을 조선의 천재들에게 가르쳤다.

그런데 흡수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양순이로부터 조선말을 배운 야코프는 그녀와 혼인했다.

조선전력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은동리 연구소와 옹진반도 공장들을 관리하는 양순이는 야코프와 가장 말이 잘 통했다.

또한 양순이의 아담한 체구와 곱상한 얼굴은 야코프가 원했던 이상향이었다.

그래서인지 야코프는 은동리 연구원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것도 21세기 방식으로.

양순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넨 야코프의 행동을 지켜본 연구원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 후로 널리 퍼져나갔다.

멋있어 보였기에 따라 한 거였다.

그런데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라 조선 전역에 빠르게 전파됐고, 이제는 주변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아무튼 연은 양순이와 야코프의 혼인식에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한국에 우수한 인재들이 많다고 들었지만, 이처럼 천재들이 많을 줄 몰랐어.'

'그게 무슨 말이야?'

'조선말에 문일지십(聞一知十)이란 말이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거든.'

'아, 아이들이 무척이나 똑똑하지?'

'똑똑함은 넘어섰지. 하나를 말하면 열을 헤아리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야.'

'그래서 뉴질랜드로 가지 않고 주저앉은 거야?'

'그곳에 가서 뭐 하겠어? 내가 할 일도 없는데. 그것보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너무나 좋아.'

'그 정도야?"

'그 이상이지."

수재인 연과 달리 진짜 천재였던 야코프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신이 났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가르치는 족족 이해하고 더 참신한 생각으로 새로운 이론의 토대가 되는 질문을 던지니, 야코프에게 아이들은 제자이자 스승이었다.

그래서 아예 정기적으로 강연회를 열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 대신 야코프가 일을 벌이고 있는 거네? 그것도 너보다 한 참 위에서 쓰던 기술을 가지고."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야. 야코프가 나보다 수학과 기초 물리학에 관해서는 잘 알지만, 프로그램과 반도체, 통신 기술은 내가 전부 전수한 거야."

"그래? 그럼 이렇게 발전할 수 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네."

"뭐?"

"그렇잖아. 나 때문에 잡다한 것 다 배웠다며?"

"잡다한 건 아니다."

"야코프에 비하면 잡다한 거지."

문식이는 말하면서 계속 연을 살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 중 하나인 친구 놀려먹기를 하면서 반응을 보고 있는 거다.

하지만 연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물론 야코프가 있기에 원천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지만, 잡다한 내 기술이 있었기에 이처럼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문식이는 자신을 보며 씩 웃는 연의 모습에 들고 있던 술잔을 들이켰다.

"술이나 따라봐."

"왜 더 놀리지 않고?"

"재미없어서 관둘래."

문식이는 조선처럼 아파치 왕국의 체제를 바꾸어 버렸다.

총리를 두어 행정을 독립시키고, 왕실 위원회를 두어 외교와 군사력, 법 집행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할 일이 없어 시간이 남아돌았다.

중남미를 다 차지한 아파치 왕국을 돌아보는 일도 더는 흥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심심하면 연과 야코프가 있는 조선에 자주 들렀다.

"공식아, 하나만 더 물어보자?"

"응, 말해봐."

"왜 아직도 가격을 책정하지 않은 거야?"

"무슨 말이야? 가격을 책정하지 않다니."

"은동리 말이야. 은동리."

"아, 그건 연구원들과 공돌이들이 위축될까 봐. 그런 거야."

21세기만큼 발전한 은동리에서는 아직도 연구비나 개발비란 말이 없었다.

연구원들과 공돌이들이 신청하는 원자재나 부품에 가격이 매겨지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연이 말한 것이 있어서 그런 거였다.

조선전력공사 사장에 임명된 쌍식이가 그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폐하, 시중에 파는 물건은 모두 가격을 정하는데 왜 은동리에서는 가격 대신 수량만 표기하라 하신 겁니까?'

'그건 연구원들과 공돌이들이 놀라서 조심할까 봐 그런 거다.'

'네?! 그게···.'

'생각해봐라. 쓸만한 기물 하나 만들 때까지 버리는 원자재와 부품값이 얼마나 되는지?'

'그야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십만 원은 들지 않겠습니까?'

'그치. 최초로 우주에 발사한 홍익 1호만 해도 그때까지 날려 먹은 로켓만 백여 대가 넘지 않느냐. 그걸 돈으로 따지면 어찌 되겠느냐?'

'아, 그런 거였습니까?'

공식이였을 때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연은 연구비란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팠다.

'연구비를 얼마나 투입했는데 아직도 성과가 없다'는 등.

위에서 쪼아 대지만, 직접 연구하는 입장에선 턱없이 부족했다.

부족하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아껴 쓰면 되니.

하지만 필요한 부품을 신청하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게 가장 큰 애로사항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면 된다고 하지만, 최첨단 전파통신연구소에서 그 말은 해당하지 않았다.

부품이 있어야 시제품이라도 만들 수 있고, 장비가 있어야 테스트라도 할 수 있는 게 최첨단 기술 아닌가.

또한, 연말이면 새해 연구비를 산정한다고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곤 했다.

그런 기억이 있기에 연은 연구비와 개발비란 말을 아예 입에 담지 않았다.

원자재와 부품값도 산정하지 말라고 했다.

대신 수량만 정리해서 관리하라고 했다.

조선전력공사에서 시중에 판매하고 있는 모든 제품에는 가격이 책정되어 있지만, 은동리와 옹진반도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황실 기업인 조선전력공사가 모든 걸 가지고 있기에 가격을 책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까 연구원들이나 공돌이들이 비싼 부품값을 보고 조심할까 봐 그랬다는 거야?"

"맞아. 값을 모르면 거리낌 없이 만들고 실험할 거잖아. 그런데 그 값이 천문학적이란 걸 알면 어쩌겠어?"

"위축되겠지."

전쟁이 아니더라도 조선의 기술이 미친 듯이 발전할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게다가 야코프까지 설치고 있으니 어찌 되겠는가.

야코프가 양순이에게 청혼할 때 준 다이아몬드 반지도 연구소에서 만든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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