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느림과 빠름 그리고 선(3)
고맙게도 무굴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을 조선에 양도하면서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모두 데려가려 했다.
백성들을 일이나 하고 세금이나 내는 착취의 수단으로 생각했기에 그런 거였다.
하지만 원주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무굴은 히말라야산맥에서부터 흘러내려 온 물로 인해 널린 게 곡창지대인 곳이다.
그래서 대기근 동안에도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 않은 무굴보다 조선이 훨씬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주민들은 어떻게든 남아서 조선인이 되고자 저항했다.
병사들이 마을로 진입하지 못하게 입구를 막아버렸고, 다가오면 돌을 던져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무굴은 신의 뜻이라며 강제로 원주민들을 진압하고 이주시켰다.
이때 문제가 발생했다.
인두세를 면제해준다는 이유로 이슬람으로 개종했던 사람들.
이제는 이슬람을 믿지 않으니 신의 뜻 또한 따를 필요가 없다며 강하게 저항했다.
결국 무굴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백만 명이 넘는 원주민 중 반 정도만 이주시키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양도하겠다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내부적으로도 이슬람을 믿지 않겠다며 대거(大擧) 이탈해 버리는 백성들이 늘어나자 새로 정한 국경부터 단속해야만 했다.
이로써 모든 문제가 끝난 듯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좋았다.
원주민들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군과 경찰들이 마을로 진입하자 열광적으로 반기며 환영했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무굴은 철수하면서 모든 식량을 가져가 버렸다.
그런데 어찌 알았는지 조선군은 엄청난 양의 식량을 가지고 왔다.
'역시, 조선이야!'
'조선은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것을 챙겨 준다고 하던데 사실이었어.'
'이제 배불리 먹으면서 살 수 있겠군.'
하지만 사람이란 먹고만 살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다.
조선군과 경찰들이 진입하면서 치안이 안정되자, 원주민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일도 하지 않고 조선처럼 근사한 집을 내놓으라고 시위했다.
이때 강경하게 나선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열도 출신 경찰들이었다.
덩치는 작아도 원조 예맥 민족이란 자부심이 가득한 그들은 육모 방망이를 꽉 쥐고 사정없이 내리치며 시위하는 원주민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거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조선은 백성들의 요구는 다 들어준다고 하던데, 아니었나?'
'그런가 봐.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봐.'
원주민들의 시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조선에 관한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런 거였다.
그 후, 관리들이 오면서 가장 큰 도시인 라호르부터 개발이 진행됐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한때 무굴 제국의 수도였던 라호르는 이제는 인구가 10만 명도 되지 않는 작은 도시였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원주민 중 자기 소유의 땅과 집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 땅과 집은 무굴 제국에서 인정해준 내 소유요. 절대 그냥 줄 순 없소.'
이 정도면 양반이었다.
'뭐라고? 내 땅을 황실에서 가져간다고?'
'그에 맞는 대가는 지급 할 것이요.'
'필요 없다! 당장 꺼지거라!'
좋은 집을 내놓으라고 시위했을 때 경찰이 강하게 진압한 걸 보고도 떼를 쓰는 원주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개발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내용은 조서원을 통해 즉시 연에게 보고됐고, 연은 한마디 했다.
'선을 넘어도 너무 넘는 것 같은데?'
연이 짜증이 나서 한 말이지만, 듣고 있던 쌍식이가 이 말을 행식이에게 전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행식이는 조선의 내정을 책임지는 총리였기에 어떻게든 파키스탄 지역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선을 넘었다고 연이 말하자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조선을 따르기 싫은 자는 조선 땅에서 당장 떠나라! 떠나지 않는 자는 조선법에 따라 엄하게 처벌하겠다.'
언제나 그랬듯이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하면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을 챙겨줬지만, 정도를 넘어섰다고 판단되자 봐주는 건 일절 없었다.
처음에는 자기 땅과 집이라고 우기며 반항하는 자들이 많았기에 포기하고 다른 곳을 개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자 그들을 모두 강제로 쫓아냈다.
'이러는 법이 어디 있소? 이건 무굴제국에서 내 땅과 내 집이라고 인정해준 서류요. 그런데 당장 나가라니. 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그래? 그럼 법에 따라 널 체포한다.'
'뭐, 뭐라고요? 날 체포한다고요?'
'조선의 법에 따라 널 체포할 수밖에 없다. 싫으면 당장 무굴로 꺼지거라. 이제 이곳은 조선의 땅이니 무굴이 발급한 토지문서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단속에 나선 경찰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대처하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토지와 집이라고 말한 자가 많았지만, 대부분 거짓이었다.
행식이가 진두지휘하는 조선의 행정력은 엄청났다.
조선군과 경찰에 이어 들어온 관리들은 즉시 행정을 장악했다.
남아있는 문서들을 번역해 토지 소유권도 전부 파악해 놓았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라이야트'라고 불리는 농민들은 자신들의 경작지를 상속, 저당, 매매할 수 있었지만, 봉토를 받은 관료나 군인들의 토지는 모두 나라 소유였다.
그런데 남아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이점을 악용해 가짜 문서를 만들어 주장하고 있었던 거다.
처음에는 타일렀지만, 그래도 반항하면 사기죄를 적용하여 가차 없이 체포했다.
주변에 탄광은 없었지만, 시멘트를 만들 수 있는 석회석은 풍부했다.
사기죄에 연루된 죄인들은 시커먼 탄가루 대신 희뿌연 석회석 가루를 온몸에 칠해야 했다.
그때서야 원주민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라비아 상인이나 중원의 상인들처럼 상대를 속여서 이득을 더 많이 남기는 행위가 정당한 곳이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가짜 같은데···, 진짜 맞소?'
'당연히 진짜지 가짜겠소?'
'만약에 가짜라면 사기죄로 처벌받는다는 건 아시오?'
'그게 무슨 말이요? 사기죄라니. 그런 죄가 어디 있소? 잘못 산 사람이 병신이지.'
'조선에선 살인죄보다 더 무서운 게 남을 속여 이득을 보는 사기죄라는 걸 모르시오?'
'뭐, 뭐라고요?'
중원처럼 남을 속여 이득을 보는 행위를 영웅시했던 곳이라 사기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런데 살인보다 더 무서운 죄가 남을 속이는 행위라고 하자 상인들은 달라졌다.
아직도 원주민들끼리는 흥정했지만, 조선에서 온 사람이라 생각되면 흥정은커녕 판매조차 거부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다음 달에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들어 온다며?'
'지금 한참 공사 중인데 이달 안으로 끝난다고 하니 바로 개장하겠지.'
'그럼 우린 어떻게 하지?'
절반이 넘는 원주민들이 무굴로 끌려간 후라 집은 남아돌았다.
구역을 정해 모두 쫓아내고 도시를 개발하고 있지만, 살 집은 부족하지 않았다.
또한 관공서로 가면 먹을 식량을 챙겨 줬기에 먹고 사는 일은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옷감 같은 생필품이나 싱싱한 채소와 과일은 그때그때 사야만 했다.
그런데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들어오면 어찌 되겠는가.
상인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러지 말고 차라리 공사장에 나가는 건 어때?'
'공사장?'
'지금 도로와 철도를 깐다고 모집하고 있잖아.'
'그래?'
'응. 그래서 다 때려치고 공사장에 나갈까 봐. 같이 가자.'
'장사하는 것보다 나을까?'
'내가 오면서 들어 봤는데, 하루 일당이 무려 5전이래.'
'정말?'
'들은 말이라 확실하지 않은데 틀리진 않을 거야. 내가 다시 알아볼게. 그 정도면 장사할 필요 없잖아?'
'그러긴 하지. 사실이기만 하면 당장 때려치우고 공사장에 가는 게 낫지.'
조선과 달리 느리게만 생활했던 이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썩어서 버리더라도 비싸게 팔아 큰 이득을 남기려 했던 상인들이 먼저 움직였다.
동역에서 5전은 큰돈이 아니지만, 중세나 다름없던 지역이라 아주 큰 돈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슬람을 믿었다면 7일 중 하루는 쉬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선인처럼 5일 중 하루를 쉬지도 않았다.
조선인이라면 주말인 금요일 저녁부터 술을 마시고 인생을 즐겼겠지만, 돈맛을 안 원주민들은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땀 흘려 번 돈의 달콤한 맛이 더 좋았기에 그런 거였다.
조선전력공사 분점이 개장하자 방문한 원주민들.
말로만 들었던 기물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훔쳤다간 모든 지원이 끊기고 석회석 광산으로 끌려갔기에 아쉽지만 꿈틀거리는 손가락을 단속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일 만하면 언제든지 원하는 기물을 살 수 있기에 일에 매진했다.
그러면서 기술까지 배운 원주민들은 집 짓는 일로 자리를 옮겼고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느리게만 흘러가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이었는데, 이제는 그 어떤 곳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인들이 자주 말하는 선이라는 개념도 깨달아 가고 있었다.
* * *
조서원의 열도 담당 요원이었던 정칠이는 은진이의 특명을 받고 라호르에 도착했다.
철도가 완공되었다면 편하게 올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한참 공사 중이라 그럴 수 없었다.
이제 '사양'으로 이름이 바뀐 '사마르칸트'에서 특별히 개조한 육발이를 타고 라호르까지 왔지만, 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카불을 지나 이곳 라호르까지 오는 길은 정말 첩첩산중이었다.
게다가 여름이 지났는데도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지속되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조선전력공사 직원으로 신분을 위장한 정칠이는 라호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분점으로 갔다.
"차장님,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거 드시고 기운 내십시오."
"이건···, 팥빙수 아니오?"
"이 지역의 특산물이 콩입니다."
"그래요?"
"네, 차장님. 그런데 맛이 좀 다를 겁니다."
"단맛이 부족한가요?"
"팥이 없어서 병아리콩만 넣고 만들었습니다. 대신 꿀을 좀 탔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나저나 왜들 싸우는 거요?"
"드시고 나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조서원의 요원은 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조선전력공사 분점에도 배치되어 있었다.
연은 정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거의 모든 지역에 요원들을 배치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요원들의 성격에 따라 정보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기에 큰 문제가 발생하면 특별요원을 파견하여 자세히 알아보았다.
"흠···, 결국 밥그릇 싸움이란 거네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이 지역의 관습입니다."
"이거 참 그냥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두 처벌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차장님께서 오신 것 아닙니까? 아직 대치 중이니 시간을 두고 해결 방법을 찾으셔도 될 겁니다."
"그래도 빨리 해결하는 게 좋겠습니다."
힘들게 라호르에 도착한 정칠이는 쉴 틈이 없었다.
바드샤히 모스크를 놓고 서로 대치 중인 유교 탈레반과 이슬람이 주먹을 휘두르진 않았지만, 종교적 문제라 빨리 해결하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아버지인 파디샤 자한 1세를 몰아내고 왕좌에 오른 아우랑제브는 라호르에 모스크를 건설하라 지시했다.
대기근이 한참 진행 중인 1671년에 착공을 시작한 모스크 건설은 단 2년 만에 완공됐다.
하지만 이제 막 지어진 바드샤히 모스크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조선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이곳에 유학을 전파하러 온 유교 탈레반들이 바드샤히 모스크를 자신들이 사용하겠다고 관공서에 신청했다.
관리들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모스크라는 걸 확인했기에 그 신청은 받아 들여졌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슬람에서 강하게 항의했고, 끝내는 서로 모스크 앞에서 대치하며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사람은 모두 동등하거늘 어찌하여 그대들은 여인과 아이들을 그리 천시하는가? 이는 하늘의 뜻에 어긋나는 짓이니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흥! 우리 이슬람은 율법에 따라 모든 것을 진행할 뿐이다."
"율법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는 꺼내지도 말라! 내가 그대들의 율법을 살펴보았지만, 그런 구절은 단 하나도 없었다."
"뭐라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조선에서 남의 종교를 비방하다니 큰 벌을 받을 것이다."
"비방이 아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바드샤히 모스크에 도착한 정칠이는 서로 악담을 퍼붓는 모습을 마냥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에 미치도록 덥지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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