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245화 (245/275)

245. 느림과 빠름 그리고 선(1)

국민국가(國民國家, Nation State)란 말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던 18세기 말에 생겨났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Nation)'은 혈통, 역사, 종교, 문화가 같은 사람들을 뜻한다.

이 개념은 미국 제28대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면서부터 확고해졌다.

'국민'이란 말이 생기고 개념이 정리되기까지 100년이 넘게 걸린 거다.

연도 국가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래서 단순히 조선의 왕을 섬기고, 조선말을 하고, 조선에서 살면 조선인으로 취급했었다.

다행히도 이게 먹혔다.

아니, 먹히는 게 당연했다.

그동안 나라는 있었지만, 국민은 없었다.

나라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개념조차 없던 시대에서 보호받는 건 왕과 귀족들뿐이었다.

국가 구성 요소 중 하나인 백성은 단지 착취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달랐다.

중역을 넘어 서역으로 진출하면서 조선이란 나라가 제일 먼저 챙겼던 건 백성들의 먹거리였다.

더 나가서 아늑하다 못해 호화롭기까지 한 집과 의복까지 제공해주니 모두가 조선인이 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조선의 인구는 1억 8천만 명이 넘어섰다.

자체적으로 늘어난 인구도 엄청났지만, 조선에서 백성들에게 해주는 다양한 혜택을 노리고 무작정 조선을 찾아온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삼별초가 세운 건지도 모른다는 유구국(琉球國).

그곳에서 살던 조부(朝敷) 또한 그런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어렵게 열도를 건너 부산에 도착한 조부는 조선말부터 배웠다.

'한글'이라 부르는 조선글이야 하루 만에 이치를 깨달았지만, 조선말은 쉽지 않았다.

'아마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걸 거야···.'

불혹(不惑)을 넘긴 40대 초반인 조부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유구에서 부산까지 온 이들 중 젊은이들은 벌써 조선말을 유창하게 했지만, 조부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조부는 조선말을 잘하지 못해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심양 동쪽 무순 광산에 취직한 조부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환하게 불을 밝혀놓았다고 하지만, 축축한 동굴로 들어가서 광물을 캐는 일은 항상 겁이 났다.

그래도 조부는 마다하지 않았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일보다 훨씬 안전했고, 보수 또한 높았기에 만족하며 일했다.

5년 동안 열심히 일한 덕분에 돈도 많이 모은 조부는 유구에 있는 가족들을 초청했다.

대기근 이후로 조선은 국경을 강화하고 무단 입국자를 막았다.

역병이 돌기 때문이지만, 표면적으로는 조선의 문화와 질서가 어지럽혀질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로 인해 이제는 초청 없이는 조선으로 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우릴 버린 줄만 알았습니다."

"미안하다. 내가 너만큼만 조선말을 할줄 알았다면 바로 불렀을 건데···."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불러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조부의 아내는 막내를 낳다가 생을 달리했다.

설파제가 나오기 전 조선도 그랬듯이 유구의 유아 사망률과 산모 사망률은 아직도 높았다.

"그리 생각해준다니 고맙구나. 그런데 우리 유구는 어찌 되었느냐?"

"별일 없습니다.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이제는 조선인들이 와서 쓰는 돈으로 먹고산다는 겁니다."

원래라면 해상을 오가는 무역선들을 이용해 중계무역으로 먹고살았을 유구국이다.

하지만 조선의 함선인 철갑선들이 유구를 거치지 않고 바로 한반도로 이동하는 통에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유구의 상질왕(尚質王)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만 포기하면 유구의 백성들이 조선의 품 안에서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대가 심했기에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다.

상질왕은 섭정을 맡고 있던 상상현(向象賢)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제가 조선을 갔다 온 후에 결정을 내리시지요.'

상상현을 만난 연은 그의 말을 듣고 호통하게 웃었다.

'그대의 말인즉슨 유구 또한 예맥 민족이니 도와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폐하. 우리 유구국은 예로부터 조선을 섬겨왔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품에 안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미 왕조가 있고 조정의 체계가 갖춰져 있습니다.'

'조선의 우방국이 되고 싶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어찌 저희 같은 소국이 그걸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단지 현 체제를 유지하고 싶을 뿐입니다.'

명나라를 섬기다 청나라를 섬기면서 대국을 따르기만 하면 침략당할 걱정이 없다고 생각했던 유구국이다.

그런데 왜국이 임진왜란을 준비하면서 유구국에 간섭이 심해졌고 끝내는 속국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유구국을 다시 세운 이가 있었으니 바로 상상현이었다.

상상현은 유구국 최초의 역사서인 중산세감(中山世鑑)을 편찬했을 정도로 유능한 이었다.

연은 그런 이가 한 말이라 뜻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문식이에게 물었다.

-상상현이라···, 쇼 쇼켄을 말하는 거군. 그라면 그렇게 말했을 거야. 유구를 다시 세운 자이니.

'그런 거야?'

-응. 아마 다음 왕도 그가 섭정할걸.

'그래?'

-응. 그런데 우방국도 아니라면 뭘 원하는 거지?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대답이 확실치 않아.'

-너를 너무 잘 아는 것 같은데···.

'그래? 뭘 안다는 거지?'

-침략할 건 아니잖아?

'당연하지!'

-상상현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럼 뭐겠어? 그냥 유지하고 싶으니 알아서 해주라는 거 아니겠어? 우방국이 되고 싶지만, 너무 작으니 다른 우방국에 치일 것 같고, 독자 생존하자니 답이 없고, 그래서 아예 조선에서 정해준 대로 하겠다는 거지.

'그런 뜻이야? 난 또 뭔가 꿍꿍이가 있는 줄 알았지.'

-상상현은 작지만 한 나라를 다시 세운 이야. 보통이 아닌 자지. 그런 자가 대세를 모르겠어? 다 알면서 모나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어렵네. 어려워.'

효율만 따지는 연에게 정치는 너무나 복잡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정치를 효종에게 맡겼고, 황제가 된 후에도 행식이를 앞세우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해야 할 일은 끝도 없이 많았다.

'만력제가 왜 그랬는지 알겠네.'

'고려 천자'라는 애칭을 가진 만력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태업(怠業, Soldiering)한 이유가 이해됐다.

그렇다고 그를 따라 할 순 없었다.

연에게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너, 모나코 알지?

'지중해에 있는 도시 국가 말하는 거야?'

-응, 유구국을 모나코처럼 만들면 어떨까?

'모나코처럼이라니?'

-아직 조선에 카지노는 없잖아.

'유구에 카지노를 세우라고?'

-맞아. 네가 주장하는 게 선(線, Line)이잖아.

'그러긴 하지.'

연은 자신이 구상한 정치 체계가 정답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한 지역을 정해 이것저것 실험해보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조선 전역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정치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게 '선'이었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하지만 연은 문식이만큼 역사를 잘 알지 못했고, 인문학적 교양도 낮았다.

하지만 사람에 대해서 겪어 본 적이 많았기에 사람이 어떤 건지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연이 내린 사람이란 동물은 모순투성이였다.

강한 것 같지만, 약했고.

똑똑한 것 같지만, 멍청했고.

약은 것 같지만, 헛똑똑이가 대부분이었고.

악한 것 같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연이 생각한 사람은 한마디로 '불안전한 존재'였다.

사람이기에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연은 선만 넘지 않으면 크게 처벌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을 넘으면 가차 없이 무서운 형벌을 내렸다.

도박 또한 같았다.

'도박 빚은 빚이 아니다'고 법에 정해 놓았지만, 사람들은 도박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스포츠토토처럼 운동 경기 결과를 맞히는 복권도 운영하고 있지만, 도박의 뿌리는 근절할 수 없었다.

연은 문식이의 말에 동의하고 유구국을 조선의 보호국으로 선언했다.

우방국처럼 군사적으로 상호 보호한다는 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조선의 보호국이란 명분으로 유구국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주기로 약속했다.

'대신 그대가 해줄 일이 있소.'

'무엇입니까? 폐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앞으로 지옥도로 오가는 식량과 물자를 조달해주시오.'

'네?! 우리 유구국은 그럴만한 자원이 없습니다. 폐하.'

대만과 유구국 사이에 있는 궁고도는 이제 모두가 지옥도라 부르고 있다.

법을 어긴 사람 중에서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꼭 있었다.

그런 자들을 따로 추려 그들끼리 자유롭게 살라고 보낸 곳이 궁고도였다.

하지만 궁고도는 무법천지였기에 지옥처럼 끔찍한 일이 수도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지옥도라 부른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앞으로 유구국은 조선에서 온 관광객들로 먹고사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네? 그게···.'

'그대가 말하지 않았소. 유구국 또한 예맥 민족이 사는 곳이라고.'

'맞습니다. 폐하.'

'그러니 형제의 나라인 유구국을 조선이 보살피는 건 당연한 거요.'

'고맙습니다. 폐하.'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져야 하오.'

'그럼, 공물을 진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렇소. 형제의 나라끼리 진상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허나 그대의 유구국이 지옥도와 가까우니 지옥도에 곡식과 물자를 책임지고 배달해 주시오. 그에 따른 보상은 반드시 할 터이니.'

'알겠습니다. 폐하. 꼭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이 이렇게 지옥도 문제를 유구국에 떠넘긴 이유가 있었다.

조선전력공사 경비대 대원들 때문이었다.

지옥도에 보내진 이들은 모두 목을 베도 마땅한 이들이지만, 게 중에는 단순히 기질 때문에 꼬장을 부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번 들어가면 쉽게 나오지 못하는 곳이 지옥도이지 않은가.

나중에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선처를 호소하는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시로 경비대원들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당연히 거절당했지만, 그들은 대원들에게 편지라도 전달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차마 그 부탁까지 거절하지 못한 대원들.

당연히 문책을 받았다.

그러자 지옥도에서 근무하기를 원하는 대원들은 없었다.

처음에는 한적한 곳에서 낚시나 하며 한두 해 지내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대원들이 많이 지원했지만, 이제는 그런 대원들은 없었다.

악귀 같은 자들이 외치는 소리도 짜증 났지만, 괜한 일로 문책까지 받자 몸을 사린 것이다.

이래서 연이 유구국에 그 임무를 맡기려 한 거였다.

비록 죄를 짓고도 벌조차 받으려 하지 않은 자들이 모여있는 지옥도지만, 먹을 식량과 입을 옷은 보내줘야 했다.

그들 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런 거였다.

아무튼 유구국이 조선의 보호국으로 지정되자 그곳으로 놀러 가는 여행객들이 즐비했다.

전처럼 배를 타고 가지 않아도 됐기에 주말을 이용해 유구국을 갔다 오는 사람도 많았다.

한양 서쪽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면 3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유구국.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꿈에 그리던 낙원이었다.

조부의 자식들도 비행기를 타고 심양까지 왔다.

"우리 유구국도 이제 먹고살 만하다고 하더니, 그렇게 된 거였구나."

"네, 아버지. 황제께서 우리 유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유구도 배를 곯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았다. 그나저나 너희들도 일을 해야 할 텐데···."

"거주증을 받고 왔으니 주민증부터 따고 일자리를 찾을 생각입니다."

"그래, 조선말···, 아니다 조선말은 나보다 유창하니 따로 공부할 필요는 없겠구나. 그동안 고생했을 건데 당분간 쉬도록 해라."

"그럴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그러느냐?"

"조선은 무척이나 빠름을 추구한다고 들었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조부는 아들 상후의 말에 피식 웃었다.

자신 또한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조선에서 살다 보니 조선만큼 느린 곳도 없었다.

"상후야, 다른 건 몰라도 이곳은 안전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단다."

"그거야 수도 없이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냐?"

"네, 아버지. 그래서 연락을 받자마자 모두 정리하고 이곳으로 온 것 아닙니까?"

"그랬구나. 그래도 이곳에서 살려면 안전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너도 봤겠지만, 도로에 사람이 있으면 차들이 다 멈추지 않더냐."

"그것도 안전 때문입니까?"

"그렇다 안전이 최우선이다. 그러니 너도 명심하고 꼭 지켜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안전을 무시하면 선을 넘는 것이니 큰 벌을 받을 수 있다."

"선을 넘다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선에는 보이지 않은 선이 어느 곳에나 존재한단다."

"네?!"

이해하기 어려운 아버지의 말에 아들은 눈이 커졌다.

그런 아들을 보고 조부는 선에 대해 그동안 느낀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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